“미술관은 무엇을 수집하는가” (MMCA 연구 프로젝트 국제 심포지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추진하고 있는 연구프로젝트로, 작년의 “미술관은 무엇을 연구하는가?”에 이어 올해는 “미술관은 무엇을 수집하는가?”라는 직설적인 질문으로 미술관의 정체성에 대한 폭넓은 담론들을 아우르고 있다. 이 연구프로젝트는 국제 심포지엄과 학술서 발간의 형태로 전개되는 것 같은데, 나는 지난 주말에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국립현대미술관(서울) 멀티프로젝트홀에서 열린 이번 심포지엄은 11월 30일(금)과 12월 1일(토) 이틀 동안 진행되었는데, 생업 관계로 금요일은 참석할 수 없었다.

첫째 날은 미술관의 수집에 있어서 ‘후기식민주의를 넘어서는 다양성과 포용성’이 논의되었다. 나는 참석하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결국 서구제국주의 논리에 의하여 황금기를 맞았던 근대적 미술관의 현주소를 반성하고, 그동안 주류에서 밀려나 있던 ‘타자’를 존중할 수 있는 새로운 수집전략이 모색되었던 것 같다. 역사 속에서 그야말로 ‘타자’ 그 자체였던 우리가 다양한 국적의 연구자들을 초대해서 이 주제를 꺼내든 주체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한때 제국주의의 피해자였던 우리는 식민지배와 전쟁의 참화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충분한 성찰 없이 서구의 제도, 문화, 역사관 등을 수입했었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없이 새로운 제도를 수입하다보니 거기에 내재되어 있는 서구적 가치관들도 다소 왜곡된 채로 함께 유입되었고, 그것의 착근과정에서 분열과 반목이 야기되기도 했다.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어느덧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된 우리는 이제 새로운 타자를 억압할 수 있는 위치가 되었고, 우리 스스로가 한때 타자였다는 사실을 점점 망각해 가고 있다. 엄연한 타자로서 주류가 되기를 열망하고, 그러면서도 새로운 타자를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현주소는 후기식민주의 이후의 전시전략을 논의하는데 있어서 매우 특별한 지점으로 볼 수 있다.

내가 참석한 둘째 날은 저명한 현대미술 이론가 테리 스미스(Terry Smith)의 기조강연으로 시작하였다. 그는 오늘날의 근대적 미술관이 형성된 역사적 근원을 푸코(Michel Foucault)의 ‘감시와 처벌’ 이론, 그리고 제국주의자들의 시선에서 찾았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시선은 높은 곳에서 파노라마처럼 모든 것을 한 눈에 파악하려는 욕망의 발현이며, 일관된 기준에 의거하여 모든 것을 카테고리화할 수 있다고 믿은 데카르드적 합리주의의 소산이다. 이러한 의견은 오리엔탈리즘의 전시질서를 논했던 티모시 미첼(Timothy Mitchell)의 견해와 맞닿은 것이다. 또한 푸코에게서 발견한 단서는 파놉티콘(Panopticon)이다. 단일한 시점으로 모든 것을 조망하면서 시선의 권력을 확보하고, 피관찰자가 스스로를 검열하면서 계도될 수 있도록 만드는 장치의 연장선상에 근대적 미술관을 위치시킨 것이다. 테리는 이제 미술관이 변화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그 이유로 미술 환경 자체가 매우 복잡해지고 다양해졌다는 점을 이유로 꼽았다. 미술이 전시될 수 있는 공간, 시간, 상황 등 ‘경우의 수’가 과거와 다르게 현저하게 증가하였으며, 디지털화의 물결이 이러한 경향을 더욱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소유보다 경험을 강조하는 현 시대상은 소장을 중요시했던 미술관에도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테리는 수장고 자체가 전시장이 될 수 있는 사례, 소장품이 아예 없는 미술관의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그러한 변화가 눈앞에 와있음을 상기시켰다. 상대주의 시대의 현대미술 이론가답게 그의 결론은 상당히 유보적이었다. 그는 새로운 미술관들에게 있어서도 소장의 가치는 여전히 중요할 것이며, 그것은 동시대성, 공정함, 윤리성을 최우선으로 지향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디지털 혁명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선을 그으며, 가까운 미래에도 그것은 여전히 미술관과 미술경험에 있어서 보완적인 기능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이어서 오후 세션에서는 퐁피두센터의 뉴미디어 수석큐레이터인 마르셀라 리스타(Marcella Lista)가 <비물질 展(1985)>의 사례를 통해서 퐁피두센터가 뉴미디어를 대하는 자세를 설명해주었다. <비물질 전>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가 기획했던 뉴미디어 아트 분야의 기념비적이면서도 선도적인 전시였다. 이 전시에서는 컴퓨터, 영상, 음향, 인터랙티브 등 기존 예술의 장르를 뛰어넘는 선구적인 작품들이 출품되었고, 부스 형태와 동선 구조 자체를 작품들에 맞게 개방적이고 유연하게 재설계하였다. 마르셀라는 이 전시를 통해 퐁피두센터가 주도적으로 작품 중개소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계와 지역사회에 비평의 장을 마련하는데 초점을 두었다고 강조하였다.

게티연구소의 에밀리 퓨(Emily Pugh)는 미술 아카이브의 새로운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디지털 시대는 미술 아카이브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으며 도전과제들을 주고 있다. 과거에는 저장하지 못했던 방대한 양의 사진자료나 삼차원 매체들을 정교하게 저장하고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에드 루샤(Ed Ruscha)의 로스엔젤레스 거리 사진은 수 만장에 달하는데, 이것을 모두 디지털 저장소에 체계적으로 분류해 넣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위성 지리정보와 연동하여 공간적으로 맥락화해 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삼차원 건축 모형들은 한 건축가가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 이것을 삼차원 정보로 저장할 수 있기 때문에 건축사적으로 매우 폭넓은 함의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에밀리 퓨는 새로운 미술 아카이브 환경에서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아카이브의 규모와 범위가 확장되었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그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확장은 앞으로도 더욱 가속화될 것이고, 이제는 모두가 자신만의 아카이브를 가지는 시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연구자에게는 검색의 부담이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과거에는 연구를 위해서 원본을 보아야 했지만, 이제는 디지털로만 접근해도 거의 완벽에 가까운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카비스트는 작품의 세부에 대한 묘사에 시간을 들이는 대신 이용자가 찾기 쉽게 만드는데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셋째, 아카이브를 하나의 데이터로 간주해야 한다. 연구자라면 데이터의 수집, 관리, 활용 등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넷째, 완벽한 온라인 카탈로그를 갖추는 것 보다는 지금 얻을 수 있는 자료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

독일 국립박물관(함부르크)의 큐레이터인 스벤 벡슈테테(Sven Bechstette)는 2018년에 열렸던 <헬로 월드, 소장 검토> 展의 사례를 들려주었다. 2년 동안 준비한 이 전시는 여러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작품들을 13개의 세션에 모은 대형 기획전이었으며, 국가와 민족 맥락을 초월한 다양성을 구현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 전시에 대해서 칭찬하는 측에서는 ‘이 전시는 너무 늦었다’고 평했으며, 비판하는 측에서는 너무 구태의연하며 어렵다고 평했다고 한다. 스벤은 국제적인 맥락을 다채롭게 보여줄 수 있는 이러한 전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세계 여러 나라의 미술관과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문명화, 세계화는 단 한 번도 단일한 과정이었던 적이 없었다”는 그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장선희 학예연구사는 ‘작품의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제시했지만, 사실상 죽음보다는 삶, 그것도 영속성의 추구 측면에서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현대미술의 여러 사례 속에서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영속시키기 위한 독특한 전략들을 취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예를 들어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은 전시 담당자가 공식 복제품을 만들 수 있도록 허가했고, 그 복제품들은 지금도 여러 미술관의 주요 컬렉션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뒤샹이 물질보다 ‘컨셉’이 앞설 수 있는 시대를 열었기 때문에 복제품들도 원작의 생명력을 얻게 되었다. 솔 르윗(Sol LeWitt)은 작품의 증명서와 제작 매뉴얼만 있으면 자신의 작품을 복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영속적인 개념이 원본의 지위를 가질 수 있는 전환을 이루었다. 티노 세갈(Tino Sehgal)은 작품의 사진 촬영이나 동영상 촬영을 거부하고 일체의 문서화도 거부함으로써 물질적 작품의 비물질화를 추구하였다. 이는 점점 과도한 문서, 텍스트, 메타데이터로 포장되어 가는 현대미술, 특히 미술시장에 대한 도전으로 읽힌다. 한 예술가의 자의식이 새로운 미술 제도를 출현시킬 수 있을까?

서울대학교 서양화과의 오인환 교수는 자신의 작품 활동 속에서 ‘상호성’을 추구해온 궤적을 설명해주었다. 그는 이번 컨퍼런스의 유일한 작가 발제자였고, 스스로의 입장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깊은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오인환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지 않음에도 연사로 초대된 것이 이색적이었다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는 우리는 왜 그가 연사로 초대되었는지를 이내 알 수 있었다. 게이로서 느끼는 감정과 부조리를 작품에 담아내는 그는 우리 사회의 ‘타자’이며, 비물질성의 일회성을 추구하는 그의 작품 활동들은 ‘소장’의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가진 키워드는 이번 연구프로젝트 전체를 포괄한다. 오인환은 작가로서 ‘상호성’을 가장 중요시한다. 미우나 고우나 어쨌든 미술계, 나아가 사회 구성원 모두는 타자와 함께 공존하고 있다. 오인환에게 타자로서의 정체성은 삶에 있어서 가장 큰 경험적 요소 중 하나이다. 그는 타자로서 얻는 감정들을 문화비판적인 입장으로 작품에 녹여낸다. 그의 작품들은 한국 맥락에서 퀴어미술의 의미를 재정의하기 위한 노력이며, 실제로 그러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결국 작가는 메아리 없는 외침에 그쳐서는 안 되고, 작품으로써 견고한 제도에 나름의 방식으로 계속 의미들을 전달해야 한다. 그것이 어떻게, 얼마만큼이나 받아들여지는지는 나중 문제이다.

마지막 연사인 베릴 그레이엄(Beryl Graham)은 뉴미디어아트 전문가로서 새로운 개념의 작품들이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를 다양한 사례로 보여주었다. ‘캔버스에 유채’로 규명할 수 없는 새로운 개념의 작품들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에 대한 미술관들의 고민은 깊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테이트의 작품 정보는 새로운 매체에 맞게 훨씬 세세하고 폭넓어졌다. 하지만 이처럼 새롭고 다양한 존재들에 대한 분류 기준의 표본은 온라인 쇼핑몰 이베이에서 볼 수 있다. 이베이의 분류 체계의 정확함과 다양성은 미술관에게 오히려 본보기가 될 만하다. 이 말은 미술관들이 아직은 예술의 변화 속도에 뒤처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뉴미디어도 전통 회화와 마찬가지로 수집가들의 소장욕구를 자극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뉴미디어의 이해관계자 수와 연결 양상은 전통 회화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기 때문에 모든 주체들의 시스템적 협력이 필요하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행사 준비, 진행, 동시통역, 디자인 등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서 국제 심포지엄으로서 손색없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심지어 행사가 다 끝나고 저녁꺼리도 챙겨줘서 몸과 마음을 모두 채울 수 있었다.

다만, 대부분 미술이론 전문가들로 구성된 연사들 중에서 오인환 작가의 진솔한 이야기들은 색다른 진정성으로 다가왔는데, 이처럼 다양한 생각을 가진 작가 연사를 조금 더 늘린다면 훨씬 유익한 시간이 되었을 것 같다. 이러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론가들 특유의 애매함 때문이었다. 상대주의와 다양성의 시대에 미술관의 전략을 논의하는 시간이니만큼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는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겠지만, 사례 나열식으로 반복되는 발표들에 서서히 지쳐갈 수밖에 없었다. 모두를 존중하는 자세는 응당 필요하지만, 사실상 우리가 묻고 싶은 질문은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옹호하죠? 당신은 무엇에 감동받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가 아닐까 한다. 새로운 시대의 수집 전략이 ‘모두, 차별 없이, 공정하게’라면, 제한된 시간과 재화의 여건에서 그것이 진정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의문으로 남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전략의 의미는 ‘선택과 집중’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상대주의로 점철된 이번 심포지엄은 미술관에 대한 닫힌 생각을 여는데 있어서는 유익한 시간이었을지 몰라도 그 이후의 더 날카로운 논쟁으로 나아가는데 있어서는 한계를 보였다. 누구 하나 용감하게 나서서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꺼내지 않는다면, 그에 뒤따르는 선명한 동의나 반대의 목소리도 이끌어낼 수가 없다. 진실한 애정에 기반을 둔 열렬한 옹호와 반박의 장이 되지 않는 한 진정으로 창조적인 담론의 장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이번 연구프로젝트의 최종적인 결과물을 조만간 학술서 형태로 출판할 예정이라고 하는데, 추후 그 내용을 살펴보면서 내 입장도 더 가다듬어 보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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