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품전: 근대를 수놓은 그림 展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여러 기획전 중에는 틀림없이 근대에 초점을 맞춘 것이 하나 이상 있다. 지금은 「대한제국의 미술: 빛의 실을 꿈꾸다」 展이 덕수궁관에서, 「근대를 수놓은 그림」 展이 과천관에서 각각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근대미술을 다룬 전시가 두 개인 셈이다. 어떻게 보면 이번 「근대를 수놓은 그림」 展은 근대미술을 교과서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훑는 전시이기에 과천이 아닌 근대미술 전문 미술관을 표방하고 있는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것이 어울려보였다. 하지만 나중에 열린 「대한제국의 미술」 展이 맥락상 덕수궁에 자리 잡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에 「근대를 수놓은 그림」 展이 미리 자리를 양보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번 전시는 근대미술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훑는 전시로서 기획 상 특징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근대미술의 발아’, ‘새로운 표현의 모색’, ‘의식의 표출’이라는 세션 구분도 진부할 정도로 무난한 선택이다. 따라서 간과되었던 진실이 드러난다거나 새로운 통찰을 전해준다던가 하는 의미를 발견하려 노력해서는 안 된다. 그냥 개별 작품들을 즐기는 선에서 가볍게 살펴보면 된다.

작품들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자랑하는 근대미술의 대표작들로 엄선되었는데, 그동안 여러 차례의 근대미술 기획전에서 출품되었던 것들을 다시 ‘돌려막기’하고 있기 때문에 친숙한 것들이 많다. 전통적인 동양화 기법의 작품들은 세션의 처음과 끝에 몰려있는데, 마치 ‘근대화’를 ‘서구화’와 동의어로 처리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오지호의 「누드(1928)」는 아내를 그린 모양인데, 옆에 나란히 놓여 있는 이해선의 「누드(1928)」와 함께 우리나라 서양화 여명기의 여성 누드를 보여준다. 사료에 따르면, 최초의 서양화풍 여성 누드는 김관호가 그렸다고 한다. 어쨌든 오지호의 누드는 실제 인물을 보고 그린 것이 분명한데, 아무리 남편이라지만 당대 조선의 관념에서 밝은 조명 아래 옷을 다 벗고 시선을 받고 있는 상황 자체가 꽤나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인지 화가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고 있는데, 그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사연들을 상상하게 한다.

반면 구본웅의 「여인」은 적나라한 가슴 노출과 당당한 포즈로 시대를 초월한 파격을 보여주는데, 오지호의 누드와 약 10년여의 간격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놀라운 혁신이다. 야수파, 앵포르멜, 표현주의가 뒤섞인 이 작품에서 여인은 도발적인 괴물로 표상되며 피카소, 드 쿠닝과 같은 모더니즘 회화 선구자들과 같은 전략을 보여준다.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존재는 욕망과 공포 사이에서 뒤틀리는 것이 동서양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하는 정서인가보다.

대구에서 후학들을 기르는데 힘썼다는 서동진의 「팔레트 속의 자화상(1930년대)」은 독특한 오브제이다. 회화의 도구 안에 회화가 담겨 있는 자기순환이면서, 회화의 과정을 암시하는 메타회화이고, 화가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내는 정체성의 표상이다. 도구와 작품이 결합되고, 그 작품을 그린 물감은 견고히 굳은 채로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따뜻한 온도의 물을 충분히 묻히면 다시 안료를 찍어서 저 그림을 수정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처럼 회화의 과정을 연상시키며 참여의 욕망까지 불러일으키는 이 오브제는 단순한 화가의 도구가 아니라 여전히 생명력을 지닌 ‘도구-작품 복합체’로서 기능한다.

낯익은 화필이 눈에 들어와 자세히 보니 김세용의 「시장(1941)」이다. 나는 「내가 사랑한 미술관: 근대의 걸작전」에서도 김세용의 작품에 주목했었다. 그가 표현한 우리 민족의 정서는 느슨하고 거칠지만 분명 진실한 애정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낮은 시선으로, 가장 낮은 자들을 관찰했고, 그 틀을 깨지 않고 한발자국 뒤에서 조심스럽게 기록했다. 거친 붓질 속에 스쳐 지나가는 인물들은 서로 뒤엉켜서 움직이고 있는 찰나에 포착되었고, 그 순간의 기록이 오히려 더욱 강한 실존성을 부여하고 있다.

오승우의 「법당내부(1957)」 가장 동양적인 공간을 가장 서양적인 재료와 화풍으로 표현했다는 점이 이채로웠다. 비슷한 아이디어로, 가장 전통적인 동양화 기법으로 피렌체나 로마 전경, 또는 대성당 내부를 그린다면 어떤 작품이 나올지 궁금해졌다. 내가 동양화를 전공했다면 그런 작품으로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했을 터인데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 번째 세션으로 들어가는 입구 옆 복도에 「가설」이라는 제목의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었다. 진리 탐구를 위한 전제로서의 가설, 임시로 세우는 시설물로서의 가설, 떠도는 이야기로서의 가설이라는 동음이의어로 재미있게 풀어냈다. 유휴 공간으로 여겨지는 미술관 복도를 커뮤니티와 휴식의 공간으로 탈바꿈해보자는 것이다. 내가 갔을 때는 평일 낮이라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 없어서 이 기획의도가 제대로 구현되었는지 알 턱이 없었지만, 제한된 예산 여건 내에서 설치 자체는 완성도 있게 이루어진 것 같았다. 철골뼈대와 목재합판이 어우러진 구조물은 수직수평의 안정감 속에서 면의 변주가 조화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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