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소영의 전작인 「실험실의 명화」도 흥미롭게 읽었었다. 그때는 미술사적 지식이 너무나 일천했던 3년 전이었다. 미술과 과학의 접점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시절이어서 그 책이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다른 관련 도서들도 추가로 참고하여 ‘예술과 과학’이라는 주제로 회사와 동호회에서 세미나를 했었다. 이번 책 「화가는 무엇으로 그리는가」는 재료로 보는 미술사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어서 집어 들었는데 알고 보니 같은 저자였다. 그것을 감안하고 읽으니 「실험실의 명화」 후속작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E.A.T.와 아폴로 프로젝트가 등장하는 뒷부분이 특히 그랬다.
출판사인 모요사는 최근 예술 분야에서 개성 있는 책들을 선보이고 있다. 이지은의 「사물들의 미술사1: 액자」도 여기서 나왔다. 두 책을 함께 엮으면 ‘사물로 보는 미술사’ 시리즈가 될 것 같다. 한편으로는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든다. 실제로 내용이 중복되지는 않지만 이번 이소영의 책에서도 액자를 다룬다. 뭐 두 책 사이의 차별성에 대해서야 출판사가 알아서 잘 하겠지.
책은 총 14개의 챕터로 서양미술사의 도구와 기법을 분석한다. 저자는 새로운 도구의 탄생은 새로운 표현과 양식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템페라는 선적이면서도 견고한 양식으로 천사와 성자 같은 영속적이고도 고귀한 존재들을 표현하는데 최적화되어있고, 유화는 섬유나 보석 같은 촉각적인 질감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데 탁월한 매체이므로 세속적 세계관과 연관되어 있다. 또한 아크릴 물감은 싼 가격과 총천연색의 표현력에 힘입어 더욱 참신한 시각적 충격을 추구한 20세기 중반의 팝아티스트와 추상표현주의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화가들은 이처럼 변화되는 사회상에 부합하는 새로운 표현을 개발하기 위하여 부단히 고민해왔고, 소수의 혁신가에 의해서 새로운 표현과 양식이 개발되면 이내 미술계의 공감대를 거쳐 새로운 표준으로 받아들여졌다. 도구는 표현을 낳고, 표현의 욕망은 도구를 낳는 선순환의 구조 속에서 오늘날과 같은 다차원적인 표현과 양식의 발작이 도래할 수 있었다. 결국 저자는 양식이 테크놀로지, 매체, 그리고 테크닉의 함수라는 데이비드 섬머스(David Summers)의 공식을 재확인하고 있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대중서이기 때문에 역사학적/과학기술적 분석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상당부분이 화가들의 사례와 흥미위주의 에피소드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으므로 학술적 접근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상당히 오글거리는 장면들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화가들의 이야기를 소설처럼 재구성한 각 챕터의 서두가 특히 그렇다. 저자 스스로가 인정하는 것처럼 책의 상당부분은 사실을 논증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생각을 끄집어내기 위한 화두의 선에서 멈춰있다. 그도 그럴 것이 302페이지의 손바닥만 한 책에서 14개의 도구, 혹은 재료의 미술사를 논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몇 개의 도구에 집중해서 경제, 교역, 사회, 문화와 맞물린 심도 있는 접근을 제시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마지막의 E.A.T.(Experiments in Art and Technology)와 아폴로 프로젝트는 꽤 신선했다. 아마 저자의 주특기가 유감없이 발휘된 영역이라 더욱 그럴 것이다. E.A.T.는 올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특별전으로 제시되었던 바가 있기 때문에 더욱 시의적절한 언급이었다. 과학과 예술의 만남이 공식화되었던 E.A.T.의 창조성이 여러 경로로 우리나라에서도 계승되어서 새로운 융복합적 가치들을 창출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미술계 안팎에서 자주 논의되고 그 가치가 제대로 인식될 필요가 있는데, 이번 저술도 그런 한 조각의 기여가 되기를 바란다.
앤디 워홀(Andy Warhol) 등 미국 현대미술가 여섯 명의 작품이 아폴로 12호에 실렸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는데, 이 사례는 발사체와 달탐사선 개발에 한창 박차를 가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나라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과 일변도로 치닫는 우리네 과학기술정책에서는 예술적 감수성을 도무지 찾아보려야 찾을 수가 없어서 안타까울 때가 많다. 유럽의 경우, 1985년에 발사한 우주탐사선의 이름을 ‘르네상스의 아버지’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의 이름을 따 ‘조토호’로 지었다. 조토가 아레나 성당에 그린 「동방박사의 경배(1304-1306)」에 핼리 혜성이 그려져 있는데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핼리 혜성을 관측해서 우주 탄생의 실마리를 찾겠다는 지적 욕망에, 그 혜성을 선구적으로 목격하고 기록했던 위대한 (유럽) 예술가를 기리는 자의식까지 투영한 것이다. 그 덕분에 핼리 혜성을 탐사했던 고도의 지적 과정을 복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조토의 예술적 창조성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된다. 단순히 ‘우주를 탐사하겠다’, 그리고 ‘살아서 돌아오겠다’는 단선적인 목표에만 경도되면 이런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없다.
예술은 오로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우주를 탐사하는 터무니 없어 보이는 과업도 궁극적으로 인류의 행복에 기여하기 위한 지적 열망의 하나라면, 예술적 영감을 그 과정에 포함시키지 않을 이유가 없다. 태초에 하나였던 예술과 과학이 다시 만날 때, 어떤 창조적인 결과물이 나올지는 알 수 없으나, 예술이 없는 것보다는 있을 때 그 결과가 더 풍요롭고 아름다워질 것이라는 점만큼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