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것은 진실이 아니다.”
앙리 마티스
마티스가 남겼다는 이 말을 이번 전시에서 발견했다. 그런데 이 말은 마치 이번 전시를 두고 남긴 것처럼 느껴진다. 이 전시를 대중에게 내어 놓는 방식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진실’하다고 보기 어렵다.
이번 「피카소와 큐비즘」展에서 피카소(Pablo Ruiz Picasso)의 채색화는 단 세 점이 출품되었다. 내가 직접 세어보았기 때문에 정확하다. 대신 그와 함께 입체주의를 열어 젖힌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의 작품은 10점 안팎으로 다채롭게 출품된 듯 하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미술사 서술이 그렇듯, 이번에도 브라크는 그저 ‘피카소의 동료’로서만 기억되는 듯 하다.

채색화 세 점 이외에도 피카소의 이름으로 출품된 작품이 하나 더 있다. <무용(1925)>의 테피스트리 버전(1975)이다. 학예사에 따르면, 이 작업은 피카소가 말년에 직접 요청했었다고 한다. 화가가 자신의 작품을 직접 새롭게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다고 하니, 이 테피스트리도 원본성과 작가성을 어느 정도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테피스트리가 이번 전시의 메인 포스터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자못 의문스럽다. 우리는 통상 어떤 전시의 메인 포스터에 실린 작품이 해당 전시에 출품되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작품이 회화라면, 인쇄나 판화로 ‘재가공’된 버전이 올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좀처럼 품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이 전시의 포스터를 보았을 때, 당연히 <무용>원본이 섭외된 것으로 믿었고, 이 대표작을 어떻게 가져왔을지 궁금해졌다. 전시장 앞 포토월에서도 그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전시장에서 나를 마주한 것은 테피스트리였다. 실소를 머금고 다시 전시 포스터를 자세히 들여다 보니, 윤곽의 사선에서 테피스트리 특유의 계단식 직조 형태가 눈에 띄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피카소의 채색화 세 점은 소소한 인물화/정물화들이기 때문에 포스터로 쓰기에는 부적절했을 것이다. 이 작품들은 브라크와 같이 살면서 입체주의를 실험했던 시기의 산물들로, 당시 두 사람은 거의 동일한 조형적 언어를 선보였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니면 서로 이름표를 바꿔 달아 놓아도 구분하기 쉽지 않다. 기획자 입장에서도 이 작품들로 홍보를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전시 제목에 피카소를 넣었으니, 누가 봐도 피카소스러운 대표작 하나를 포스터로 “뙇” 넣어 주어야 하는데, 마땅한 작품이 없으니 이 테피스트리를 택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다른 화가들에게 미안해진다. 예를 들어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의 6미터짜리 초대형 작품 다섯 점이 파리 바깥으로 반출된 것은 80년만에 처음이었지만, 이 테피스트리 한 장에는 밀린 것이다.

근대까지 이어져오던 서양미술사의 모든 조형 언어를 실험하고 다시 파괴한 후, 현대 미술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던 피카소의 업적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전시의 제목과 포스터에서 피카소를 옹립하는 방식은 다른 화가들이 새롭고 독자적인 조형성을 탐구하려고 노력했던 진실한 열정을 감안할 때 부당해 보인다.
물론 우리는 열악한 문화적 저변과 손익분기점의 압박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스타 일변도’의 마케팅은 언제나 미술사의 주역들을 주변화/타자화한다는 점에서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혼자 만든 미술사는 없다.

전시 첫 날, 첫번째로 발권하고 전시장에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전시장에 나홀로 들어서는 호사를 누려보려 했으나 개장 직전에 기자간담회가 있었는지, 기획자와 기자들이 전시장 안에서 어수선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전시는 폴 세잔(Paul Cézanne)의 풍경화로부터 시작한다. 복합적인 시점을 처음으로 실험했던, 그리고 자연을 단순한 입방체로 재구성하는 가능성을 모색했던 혁신가에 대한 마땅한 헌사이다. 그리고 세잔을 모방하고 싶었던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와도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블라맹크 展에서 만났던 회색조의 풍경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고, 그의 화면에서 느껴지는 무정함은 역시나 겨울의 차가움과 잘 어우러졌다.

장 메챙제(Jean Metzinger)의 <우의적 구성(1926-1927)>은 현대 스마트폰 시대의 그래픽디자인을 예견한 것 같다. 고전적 이상, 사회주의의 물결, 산업화, 바다, 기계미학, 자유 등 작가의 머리 속에 맴도는 아이디어들이 붉은 벽을 뚫고 유영하다가 가장 잘 배치된 어느 한 순간에 멈춰버린 모습이다. 강렬한 색채의 대비와 화면을 조화롭게 가득 채우는 균형감각이 마음에 든다.
그래도 결국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의 모습이다. 조형적 언어가 바뀌어도 사람을 그리고 싶은 화가들의 근원적인 욕망은 바뀌지 않는다. 무언가를 그린다는 것은 그 대상을 불러내고, 어루만지고, 소유하고 싶은 욕망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로베르 들로네의 <머리 손질하는 누드(1915)>는 여인의 과장된 상반신을 관음증적인 각도로 빗겨서서 바라보고 있는 작품이다. 여인의 엉덩이에 표현된 원형의 입체감은 마치 등고선을 연상시키고, 허리와 가슴에서 느껴지는 둥그런 양감도 인체가 아닌 미려한 물질로 환원되어 있다. 이 양감은 배경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원형의 추상적인 구조물과 대구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들로네가 가장 사랑했던 패턴이 인체에서 출발했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어떤 물질을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가장 미시적인 단위로 파고들어간다면 원형(구球)의 무언가가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은 최첨단의 광학기구가 발달하기 이전부터 통용되어 왔다. 모든 인간이 한 때는 자궁 속 원형의 체세포였던 것처럼, 어쩌면 이 세상 모든 물질의 근원은 지고한 원형에서 출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들로네는 한 여인이 책을 읽고 있는 무심한 뒷 모습에서 세상의 근원을 발견했다. 그 근원은 쿠르베(Gustave Courbet)가 발견한 ‘세상의 기원’에 비하면 훨씬 암시적이지만, 그래서 훨씬 포괄적이며 시적이기까지 하다.

마리아 블랑샤르(Maria Blanchard)의 <글 쓰고 있는 학생(1920)>은 사실 학생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얼굴의 다채로운 음영이 소녀의 얼굴에 지나친 깊이를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나 학생을 학생답게 묘사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이 소녀의 얼굴은 묘하게 관람자를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이 그림에서 책상과 배경은 입체주의적 실험이 다분히 강조되고 있는 입방체의 조합이다. 반면에 소녀의 피부, 즉 얼굴과 손은 정교한 3차원적 랜더링의 곡률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직선과 양감의 대비가 인격체를 배경으로부터 구원해내면서 생동감과 실존성을 부여해주고 있다. 투박한 손은 미숙한 나무조각처럼 보이지만 금방이라도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움직일 것 같다.

장 메챙제의 <레이스 옷을 입은 여인(1914)>는 방 안에서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는 여인을 보여준다. 사물은 원근법과 소실점이 상실되어 제 멋대로 놓여져 있지만 전체적으로 방을 해체하는 수준은 아니다. 친숙한 것들이 이질적으로 공존하는 모습을 이렇게 조화롭게 표현하기도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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