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그렇게 됐나 싶은데, 이제는 그럴 때가 된 듯도 하다. 콜드플레이(Coldplay)도 그들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하나 쯤 가질 때가 된 것이다. 이 작품은 맷 화이트크로스(Mat Whitecross)가 20년 동안 콜드플레이를 따라다니면서 촬영한 매우 사적인 영상들과 기존의 라이브 공연 영상들을 한데 엮어서 만든 다큐멘터리다. 20년 전부터 이들이 슈퍼스타가 될 것을 어떻게 알고 촬영하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극장을 나서면 누구나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와… 저거 다 안 찍어 두었으면 어쩔뻔했냐” 문화예술에서 아카이브가 이렇게 중요하다. 물론 대학교 기숙사에서 처음 만나서 치기 어린 록밴드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엄밀한 의미의 다큐멘터리 촬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유치찬란한 그들만의 홈비디오와 사진들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멤버들의 솔직한 인터뷰가 어우러져서 슈퍼밴드의 시작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는데 부족함은 없다.
대체로 슈퍼스타들의 다큐멘터리들은 입지전적인 영웅서사로 점철되기 일쑤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딱히 그들이 뭐가 그리 잘났는지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모든 일들이 우연히 벌어진 것처럼 보인다. 우연히 만나고, 우연히 주목받고, 우연히 계약하고, 우연히 투어하고, 우연히 성공하고… 그런데 어쩌면 그 우연이야말로 진리일 수 있다. 섬광 같은 영감이 한 시대와 조우해서 엄청난 창조력으로 퍼져나가는 순간은 원인에 대한 담론이 무의미하다. 미켈란젤로가 왜 뛰어난 예술가였는지를 논하는 것은 재미가 하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콜드플레이, 보다 정확하게 크리스 마틴(Chris Martin)은 그냥 원래 뛰어난 사람이고, 우리 시대가 그를(의 음악을) 원했다.
이 작품의 최대 미덕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방식이다. Yellow, Fix You, Adventure of a Lifetime, Scientist 등 주옥같은 명곡이 어떠한 작곡, 편곡, 레코딩 과정을 거쳤는지 보여주고, 그래서 지금 대중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가 한 영상으로 매끄럽게 연결된다. 스튜디오에서 데모로 연주하던 장면이 3~4만명 규모의 콘서트 현장으로 연결되는 장면들에서는 누구나 소름이 돋을 수 밖에 없고, 당장 극장을 뛰쳐 나가서 저 군중 속에 합류하고 싶은 열망으로 뒤덮인다. 우리가 알고 싶던 그 명곡들의 창작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팬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내게는 Adventure of a Lifetime 의 제작 과정이 가장 인상 깊었다. 다른 곡들과 마찬가지로 크리스가 이 곡의 기본 선율을 만들어서 멤버들에게 건냈는데, 조니 버클랜드(Jonny Buckland)가 불연듯 꽂혀서 만든 리프가 모두의 마음을 대번에 사로잡아 버렸다. 그래서 이 곡의 후렴구는 기존 가사를 지워버리고 기타 리프로만 꽉 채웠다.
과거와 현재의 연결은 단순히 개별 음악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4년 뒤에 자신이 세계적인 스타가 될 것을 예견하는 스무살의 크리스 마틴과, 정말로 4년 뒤 글라스톤베리의 지배자가 된 크리스 마틴의 오버랩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보면 볼수록 크리스 마틴은 정말 섹시한 사람이다. 그가 만약 음악을 안했더라면 그냥 빼빼 마르고 키만 멀대 같이 큰 곱슬머리 너드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창조적 샘물은 마르는 법이 없었고, 계속 과거를 못마땅해 하면서 새로운 시도들로 이어졌다. 그는 한때 대중의 지나친 관심에 치이기도 했고, 사생활 문제로 좌절을 겪기도 했으며, 정점에 오른 아티스트로서 우울, 중독, 번뇌의 수렁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역경을 자기파괴적인 방식으로 분출하거나 은폐시키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작품의 창작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그렇게 뛰어난 앨범들을 만들었음에도 항상 되돌아보면 전작은 못마땅했다고 토로한다. 그같은 못마땅함에 힘입어 우리는 늘 기대와 희망을 품고 콜드플레이의 신선한 음악을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드러머 윌 챔피언(Will Champion)은 스튜디오 레코딩 과정을 버티지 못하고 잠시 밴드를 떠났던 당시, 엄청난 좌절감으로 괴로웠음을 고백했다. 그 심정이 이해가 간다. 크리스 마틴 옆에만 딱 붙어 있으면 엄청난 성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이미 온 몸으로 직감했을텐데, 그 성공의 문턱에서 방출을 통보 받았으니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그러니 천재를 만나면 물불을 가리지 말고 일단 딱 붙어 있자. 뭐라도 떨어지겠지.
콜드플레이 20년의 역사를 총정리하는 다큐멘터리다보니, 그때의 명곡이 흘러갈때마다 그 곡과 함께 했던 과거의 내가 떠올라 아련한 감동이 밀려왔다. 예술을 향유한다는 것은 작가와의 대화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그것을 즐기고 있는, 혹은 즐겼던 나와의 만남이라는 의미가 더 크다. 예술은 그렇게 나 자신을 보여주는 창 하나를 열어 젖혀준다.
이 다큐멘터리에 대해서 한 가지 아쉬움을 꼽자면, A Head Full of Dreams 월드투어 장면에서 서울은 단 한 장면, 그것도 단 3초 정도만 스쳐지나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잘 해 줬는데! 전 국민의 3%가 예매를 시도했었는데! 다시 돌아와! 혼내줄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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