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수의 「일제강점기 조선미술교류사: 일본 화가들 조선을 그리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에서 활동했던 일본인 화가들을 추적한 기록물이다. 엄정한 의미의 미술사는 아니다. 특정 시대의 미술을 통시적으로 아우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과 인연을 맺은 일본인 화가를 공시적으로 다루되, 화파나 경향을 토대로 계보학을 수립하려 애쓰지 않고 분절적인 에피소드를 자유롭게 나열해 놓았다. 45장으로 촘촘하게 분절되어 쓰인 이야기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기승전결을 갖추고 있는 소논문 내지 에세이다. 가장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화가들과 기본 배경들이 초기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 밖의 장들은 독자적인 이야기들이므로 순서를 마구 뒤섞는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 저자 황정수는 미술사 전공자가 아니며, 스스로도 미술 애호가로 소개하고 있는 만큼, 본격 미술사 저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딜레땅뜨적 미술사 연구 모음집’ 정도로 볼 수 있다. 이 책의 딜레땅뜨적인 특징은 전문적인 학술용어를 자제한다는 점, 배경지식을 상세하고도 중복적으로 설명한다는 점, 작품에 대한 저자의 주관적인 감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일제강점기의 일본인 화가들이 조선의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화가나 작품에 대한 미술사적 논의가 매우 부족하다는 점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하였다. 근대 미술사를 구축함에 있어서 일본을 바라보는 우리 민족의 복잡미묘한 감정 때문에 그들의 영향력에 대해서 온전히 분석할 수 없게 된 현실에 개탄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근대 미술을 균형 잡힌 시선으로 조망할 수 없는 까닭은 전해 내려오는 작품이나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자료의 부족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한다는 명분하에 일본인들의 작품을 제대로 보존하지 않거나 왜곡시켰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일본인 화가의 작품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 한국인 화가의 이름으로 작품을 위조하거나, 수결을 훼손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고 하는데, 이 같은 만행은 오늘날 객관적인 근대 미술사 정립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열악한 현실 속에서, 우리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일본인 화가들의 작품을 새롭게 발굴하는데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그에 따라 이 책에서는 저자가 학계에서 최초로 발표하는 일본인 화가의 작품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러한 대목에서 자신이 어떻게 그 작품을 만나게 되었는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 발표인지를 감격에 차서 이야기 한다. 저자가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작품을 우연한 기회에 만나서 감격에 젖는 장면들은 흥미를 끈다. 하지만 이러한 대목에서 지나치게 해당 작품을 찬양하는 경향이 있어서 어느 정도는 걸러서 읽을 필요가 있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우리 미술사에서 근대화를 서구화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 화가들이 서구적인 화법을 받아들이게 된 계기가 일본 화가들이었으므로, 우리 미술의 진보에 영향을 미친 일본 화가들의 작품을 알아야 한다는 논지가 전제로 깔려 있다. 일본이 우리 보다 앞서서 서구의 화풍을 받아들이고 서구화를 모색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화풍이 일본을 통해서 조선에 전파되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서구화가 근대화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서구화가 진정한 의미에서 진보와 발전인지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 민족은 주체적인 역량으로 ‘우리식의 근대 국가’를 형성해 보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그것이 형성되었다면 이상적인 유토피아였을지, 절망적인 나락이었을지 가늠할 수 없다. 나아가 우리식의 근대 국가가 만들어냈을 법한 예술이 서구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었을지, 아니면 외세를 우리 고유의 정신과 절묘하게 융합한 것이었을지, 그도 아니면 우리가 세계 미술을 주도하는 결과로 나타났을지도 감히 추측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우리의 머릿속에 ‘근대화=서구화’의 공식이 뿌리 깊게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대 일본 최고 미술가 중 한 명이었던 가와이 교쿠도의 조선미술전람회 참여 (중략) 로 인해 일본화 경향은 빨라졌지만 일본인이 먼저 받아들인 서구 미술 사조의 유입이 빨리 이루어져 한국 근대 미술이 자리를 잡는 데 긍정적인 역할도 하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307p

이러한 기술은 ‘근대화=서구화=진보’의 공식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서구 미술 사조가 빨리 유입되어야만 근대 미술이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나름의 방식대로 근대화를 이룰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물론 세계는 강자의 논리로 돌아가므로 일제 침략이 없었더라도 언젠가는 서구 미술이 유입되었겠지만, 그 시점이 늦어졌다고 해서 근대화가 늦어졌다고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 나름의 잣대로 근대화를 평가하면 된다. 근대화, 서구화, 진보가 동의어처럼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그런 궤적을 따라 살았기 때문에 형성된 결과론일 뿐이지, 응당 그래야 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전반적인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 근대 미술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화가들의 작업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 일본 화가들의 행적과 작품들도 분석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 조선을 그린 일본 화가들의 인명사전과도 같은 이 책은 그러한 작업에 좋은 이정표를 제시할 것이다.

구성면에서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45개의 장에 독립적인 이야기들을 구성하다보니 기본 전제가 되는 정보들이 반복적으로 여러 장에 걸쳐 등장한다. 일본 화가들이 금강산과 평양과 기생을 사랑한 이야기, 시미즈 도운이 사진관과 화숙을 차리고 화가들과 교류한 이야기, 김황원이 부벽루에서 시 짓다가 좌절한 이야기 등이 대표적이다. 중요한 정보이기는 하지만 서너번쯤 반복해서 읽자니 지겹다. 또한 많은 화가들을 소개하면서 간략한 인물 정보를 싣고 있는데, 너무나 단편적이고 무미건조해서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마치 부고 기사를 연상케 한다. 물론 인물에 대한 자료가 부족해서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수많은 화가와 작품들이 등장함에도 ‘찾아보기’가 없다는 점이다. 여러 장에 분절적으로 등장하는 특정 화가의 정보를 찾기 위해서는 장장 744페이지를 뒤적거려야 한다. 기껏 대작을 만들어 놓고도 ‘찾아보기’ 몇 페이지 넣는 노고를 아끼는 바람에 문헌으로서 활용 가치가 떨어졌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깝다.

이 책이 소개하고 있는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시미즈 도운의 「최제우·최시형 참형도」는 주목할 만하다. 일본인 화가가 그린 작품임에도 결국은 천도교도들의 주문에 의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한국적 근대 종교화’의 원형으로 평가할 수 있다. 마에다 세이손의 「조선 노상 풍속」도 인상적이었다. 이시동도법(異時同圖法)이 두드러진 이 작품은 서구 중세미술의 내러티브 구성 방식이나, 20세기 초현실주의자들과 비교해서 논할만한 흥미로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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