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레드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20세기 중반, 프랑스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미술의 수도로 떠오른 미국에 두 개의 신성(新星)이 있었다. 한 사람은 피카소를 넘어서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한 몸부림 속에서 스스로를 극한으로 내몰아 갔다. 그는 미술사상 최초로 캔버스를 수평으로 눕혔고, 안료가 흩뿌려지는 과정 자체를 회화의 구성요소로 편입시켰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치밀한 연구를 통해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의 정서를 움직이는 숭고의 미를 재발견했다. 상반된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곳에서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손을 잡고 모더니즘 회화를 완성했다. 비로소 회화는 무언가를 재현하려는 근본적인 목적 자체를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의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그 아성은 최정점에서 2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등장한 광고 디자이너 출신 앤디 워홀(Andy Worhol)에 의하여 순식간에 사그러들었다.

연극 레드는 추상 표현주의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두 번째 거인,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를 잭슨 폴락(Jackson Pollock)에 이어 ‘두 번째’라고 언급했다는 것을 그가 안다면 매우 분개할 일이 틀림 없겠지만, 사실상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심지어 극 중 로스코 스스로도 (마지 못해) 인정한다.

작품은 실화와 가상을 적절히 섞어 놓았다. 로스코가 기념비적인 시그램 빌딩(Seagram Building)에 오픈한 최고급 레스토랑 포시즌스의 벽화 주문을 받았었고, 이내 그것을 철회했던 일화는 실화이지만, 그 외 부수적인 이야기들은 가상이다. 일단 연극에 등장하는 단 두 명의 인물 중 하나인 조수 켄(Ken)이 가상의 인물이다. 그러므로 연극을 구성하고 있는 두 사람의 대화가 모두 가상이다. 물론 제작 과정에서 로스코의 회고나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밝혀진 사실들이 두 사람의 대화 속에 녹아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주워들은 편린들로 구성한 각본 치고는 꽤나 완성도가 높은 편이다.

미술을 연극으로 옮기는 작업 자체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회화는 공간의 예술이고, 연극은 시간의 예술이다. 회화는 숱한 고민과 작업의 시간을 담아낸 최종적 결과물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반면 연극은 서사의 과정 속에 우리를 끌어 당긴다. 이처럼 미술과 연극은 시공간을 상이한 방식으로 점유하는 매체이다. 하지만 로스코의 작품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조금만 고민해 본다면 다른 화가에 비해서는 ‘서사화’에 적합한 회화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지닌 놀라운 시지각적 능력으로 인하여 우리는 회화의 전체 상을 순식간에 받아들이고, 이내 부지부식간에 해석과 판단의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시야의 범위를 극한까지 활용하도록 강요하는 로스코의 작품은 조금 다르다. 그의 작품은 화면과 구성요소들의 물리적 크기 때문에 한 눈에 조망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그로 인하여 작품 앞에 서서 다소 초점이 어긋난 시선으로 주의를 조금씩 바꾸어가며 색채의 섬세한 변화와 선의 진폭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숭고의 미를 일깨우는 로스코의 진정한 가치다. 이렇게 서사적 힘을 발휘하는 로스코의 대형 화면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자신의 진정한 속내를 꺼내 놓고 소통하기 시작하는 연극 속 두 인물과 맞닿아 있다.

로스코가 오이디푸스 신화를 극복해 가는 과정이 연극의 핵심 주제다. 미술사에서 위대한 창조자/변혁가로 기록된 화가들은 선대의 양식을 거부하고 자신 만의 새로운 신화를 써내려갔다. 로스코가 그렇게 존경하던 마티스의 붉은 화면에서 죽음을 상징하는 ‘블랙’을 발견한 것은 로스코가 야수파의 강렬한 색상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숭고의 추상을 완성함으로써 자신의 회화적 아버지를 자기 손으로 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아들 세대인 앤디 워홀과 라우셴버그에 의하여 스스로의 작품에서도 ‘블랙’이 물들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렇게 한 시대는 다시 한번 종언을 고한다.

로스코는 그러한 자연스러운 순환의 과정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독선으로부터 차츰 눈을 뜨게 한 것은 2년 동안 스튜디오에서 온갖 뒷바라지를 감내 했던 조수 켄이었다. 로스코 보다는 폴락을 더 좋아했던 켄은 아버지를 잃은 상처를 품고 있는 예술가 지망생이다. 로스코 보다 미술, 철학, 역사, 문학적 지식은 부족했지만, 켄에게는 동시대를 읽는 감각이 있었다. 함께 일한 2년 내내 켄이 어디 사는지 조차 몰랐던 로스코는 결국 격정적인 논쟁 끝에 켄을 빛 한 줌도 들지 않는 스튜디오로부터 세상으로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켄을 세상에 내주는 순간, 로스코의 작품들도 진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제대로 찾아 가게 된다. 그곳이 어딘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국식 자본주의의 정수인 시그램 빌딩은 결코 아니었다.

나는 강신일(로스코), 박정복(켄) 캐스팅으로 감상했는데, 극의 특성상 두 배우가 쉬지 않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가며 계속 떠들어야 하는 작품이었기에 그 엄청난 노고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미술에 대한 이야기로만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캔버스에 밑칠을 하는 장면이 등장하며 로스코의 스튜디오를 은밀하게 엿보는 듯한 생동감을 느낄 수 있었다.

초반에는 장광설을 늘어 놓는 로스코의 연기가 너무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한 대가가 진짜 내면의 목소리를 발견하는 과정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같은 함축적인 장광설이 불가피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두 배우가 서로에게 맞서는 과정은 사실상 자기 자신과 맞서는 과정이었다. 우리가 대화와 소통에 목을 매는 까닭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내 머리 속에 자리 잡은 로스코는 섬세한 내면으로 침전하는 구도자의 이미지가 강했는데, 작품에서는 너무 독불장군식 꼰대로 해석한 점이 못마땅했다. 마치 영화 <미스터 터너(2014)>에서 비호감으로 해석한 터너를 만났을 때의 그 느낌과 비슷하다. 아마도 실제의 로스코는 독불장군 꼰대와 초대형 화면을 앞에 둔 구도자의 모습, 그 사이 어디쯤에 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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