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이 고전으로 숭상을 받기 시작하면 오히려 피하고 싶어진다. 똑같은 사람이 되어 버릴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의 코스모스(Cosmos)도 대중 과학서로서 고전 중의 고전인지라 역시나 피하고 싶었지만, 여러 저자들의 손가락이 계속 이 한 지점을 향하고 있는 바람에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세계 6억명의 시청자가 감동했던 동명의 전설적인 다큐멘터리와 동시에 기획된 서적이다. 매체가 매체이니 만큼 다큐멘터리보다는 조금 더 무게감이 있는 지식들이 채워져 있다고 한다. 다큐멘터리와 똑같이 13부로 나뉜 719페이지에는 저자의 우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가감 없이 녹아들어 있다. 방대한 천문학적 지식을 담고 있는 책이지만 가치중립적인 우주대백과라기보다는 ‘우주과학예찬론’에 가깝다.
결국 우리가 정말로 읽고 싶은 글은 저자의 진실한 애정이 묻어나는 글인지도 모른다. ‘객관적’이라는 미명 하에 판단을 유보하고 군중 속으로 숨어들어가려는 현 시대의 세태 속에서 40여년 전에 출간된 이 과학서적은 여전히 펄떡이는 생명력을 보여준다. 그 시간 동안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에도 이 책의 가치가 사그러들지 않은 까닭은 결국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바가 과학적 지식이 아닌, 인간과 우주를 바라보는 관점이었기 때문이다. 지식의 효용성은 유한할지 몰라도 지혜의 효용성은 거의 무한에 가깝다.
저자는 우주의 비밀을 벗기기 위하여 과학적 탐구에 매진했던 진리 탐구의 역사를 보여주며 기원전 300년 경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경험적이면서도 실증적인 절차에 기반하여 세상을 인식하고 거기서 밝혀진 지식들을 문서로 축적하기 시작한 역사가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인류 역사는 실증적 지식의 탐구와 신비주의적 맹신이 빈번히 교차하면서 오늘에 이르렀고, 따라서 지식의 축적은 선형적이지 않았다. 과거의 지식은 새롭게 발견된 지식과 융합하여 인류의 진보를 앞당길 수 있지만, 반동분자들의 존립과 맞닿아 있는 신비주의적 광신은 그 과정을 결코 호락호락하게 두고 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축적과 파괴가 되풀이되는 지식의 전장 속에서도 우주정거장을 설치하고 화성에 탐사 로봇을 보낼 수 있는 오늘날 인류의 저력은 진정 경탄할만한 것이다.
칼 세이건이 우주를 갈망하고 경외하면서 우리도 역시 그렇게 하기를 소망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외계의 지적 생명체와 조우하여 세상의 기원에 관한 실마리를 풀고 그 지식을 통해 세상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생물학과 역사학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타자를 이해함으로써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략) 외계의 생명은 우리가 추구할 궁극의 목표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줄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103
그가 전제한 우주의 생명체 가운데는 목성의 ‘찌’와 같이 미개한 형태도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의 논의는 대체로 우리 보다 지적으로 앞선 생명체를 상정하고 있다. 어떤 대목에서는 우주의 지적 생명체에 대한 갈망이 지나쳐 일종의 ‘외계 사대주의자’ 같은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생각하면 참으로 우습기만 하다. 지구인이 우주로 내보내는 방송의 내용이란 것이 아무 생각 없는 수많은 상업 광고, 끊임없이 언급되는 국제 분쟁과 위기, 가족 구성원 간의 지지고 볶는 불화가 고작이라니, 어떻게 우습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선별’하여 우주로 내보내는 내용에 대하여 심각하게 반성해 볼 일이다. 외계의 문명인은 지구의 문명인을 어떻게 생각할지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572
저자의 이러한 생각은 1997년에 영화화 되기도 한 소설 「콘택트」에서도 일관되게 드러난다.
“우주에 만약 우리만 있다면 엄청난 공간의 낭비이겠지.” 영화 「콘택트(1997)」 중에서
나는 사실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지적 생명체와의 조우를 갈망하는 세이건의 마음이 그렇게까지 뜨겁게 와닿지는 않았다. 나는 세상의 기원에 관한 문제 만큼은 과학이 아닌 신념의 영역에 속해 있다고 본다. 과학은 경험적으로 입증된 적확한 추론에 대하여 실증적으로 검증함으로써 하나의 이론을 정립한다. 기원의 문제에 대하여 추론하고 실험하면서 지식을 쌓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하나, 결국 현재로서 밝혀진 사실들은 진리라기 보다는 가장 설득력 있는 대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전제할 필요가 있다. 나는 그릇된 토대 위에 상호텍스트적으로 쌓여가는 모든 지식들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상식과 비상식을 가르는 잣대가 되는 현상에 우려를 품고 있다. 향후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기술이 실현된다면 세상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신념의 영역에서 과학의 영역으로 넘어올 것이다.
“토대가 잘 다져진 믿음의 토대에는 토대가 없는 믿음이 놓여 있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외계 생명체에 대한 지나친 갈망에 마음이 동하지 않는 부분은 있지만, 세이건이 우주에 대한 열정에 역사, 철학, 생물학, 종교, 생태학 등 방대한 지식을 적절히 결합하여 설명하는 방식은 대단히 아름답고도 설득력 있어서 그저 존경할 수 밖에 없다. 만약 표지와 제목에만 함몰되어 우주를 알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이 책을 건너뛴다면, 지적 탐구에 대한 인류의 매우 중요한 궤적을 함께 놓치게 되는 셈이다.
대통령이 성경책에 손을 올리고 취임 선서를 하는 나라에 살고 있었던 칼 세이건이 왜 그토록 종교적 맹신을 부수기 위해 한 평생을 헌신했는지는 이해가 간다. 영화 「콘택트(1997)」를 보면 알 수 있듯, 세이건은 결벽에 가까울 정도의 무신론자였다. 하지만 그가 전 생애를 바쳐 사랑한 우주에 대한 헌사를 들어 보면, 마치 ‘우주교’의 교리에서 따온 한 대목 같다. 극과 극은 통한다더니…
“퀘이사를 생각하다 보면 그 신비의 늪은 깊어지기만 한다. (중략) 우리는 외계 은하들을 연구함으로써 우주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었다. 상상을 초월한 규모로 벌어지는 격렬한 혼돈의 폭력 역시 우주의 한 속성이다. 우주는 자연과 생명의 어머니인 동시에 은하와 별과 문명을 멸망시키는 파괴자이다. 우주는 반드시 자비롭지만은 않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적의를 품지도 않는다. 우주 앞에서 우리의 생명, 인생, 문명, 역사는 그저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다.” 4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