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선반과 독서율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이용하는 지하철에도 신형과 구형이 있다. 나야 신형 지하철의 도입시기, 제품번호, 상세 재원 따위는 알 턱 없는 일개 시민에 지나지 않지만, 일단 타보면 이게 신형 지하철인지 아닌지 정도는 대충 안다. 일단 조도가 높아서 쾌적하고, 도장도 산뜻하다. 실내 공기도 맑은 느낌이다.

그런데 이 신형 지하철에서 선반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늘고 있다. 7호선에서 가끔 보이는 중앙 좌석형 객차야 서 있을 공간이 양측면으로 밀려났으니 선반이 없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2호선의 신형 지하철은 좌석 배치가 예전과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좌석 위 선반이 없다. 경로우대석 위를 제외하고는 선반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다.

어찌된 일일까? 원가절감일까? 의아함만 품고 있다가 불연듯 생각 나서 검색을 해 보니, 신형 지하철 교체 사업이 완성되는 2020년 이후로는 지하철 선반 자체가 없어질 것이라는 비극적인 기사가 보인다.

나는 대학교 2학년 이후로 백팩을 매지 않는다. 신사는 가방을 등에 매지 않는다는 나름의 패션 원칙을 세웠기 때문이다. 2010년 이후 스마트폰이 폭발적으로 보급되면서 디지털노마드족을 만족시켜 준 백팩도 빠른 속도로 대중화되었지만, 나는 그 파고에 편승하지 않았다. 그 원칙을 10년 이상 지켜 오다가 최근에야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어쩔 수 없이 백팩 하나를 구입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카메라가 없는 날에는 손에 드는 가방을 선택한다.

토드백이나 브리프케이스를 손에 들고 지하철을 타면, 선반에 가방을 올려야만 책을 읽을 수 있다. 한 손에 가방을, 다른 한 손에 책을 드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짧은 퇴근길이지만 지하철에 타자마자 선반 위에 가방을 던져 놓고 치열하게 책을 읽는 시간이 내게는 매우 소중하다. 하루를 지적으로 마무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신형 지하철 보급율이 높아질수록 나의 퇴근길 독서도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가뜩이나 우리나라 독서율이 낮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매년 들려 온다. 2017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40%는 1년에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 종이책 기준 성인의 독서량은 연평균 8.3권으로 지속 감소 추세이다.

물론 이런 통계를 가져와서 지하철 선반을 다시 설치해야 한다는 근거로 사용하는 작자들은 사실상 ‘통계학의 적폐’일 것이다. 누가 봐도 두 현상 사이의 연결고리는 미미하다 못해 전혀 별개의 사건이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엄연히 세계 속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실존적 주체로서 ‘나’에게는 삶의 질을 변화시킬 정도의 심대한 인과관계가 나타나고 있다. 매우 유의한 인과관계이다.

결국은 원가절감이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낮은 수준의 요금에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하철공사로서는 이용률이 낮으면서도 재료 및 공정비가 많이 소요되는 선반이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그 마음을 이해해주려고 해도 있다 없으니까 도저히 불편해서 안되겠다. 무임승차 대상 연령을 높여서라도 적자를 메꾸어 다시 선반을 달아주었으면 한다. 솔직히 요즘 65세 어르신들은 청년이나 다름 없지 않나(본인 입으로도 그렇게 말씀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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