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진 展 「노동요: 흙과 매트리스와 물결」(PKM 갤러리)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 2017’ 후원작가 선정 이력이 말해 주듯이 백현진은 최근 가장 핫한 작가임에 틀림 없다. 내가 그의 작품을 만난 것은 그 올해의 작가상 展 , 그리고 최근의 커피사회 展 에서 한 꼭지 정도뿐이지만, 우리 사회의 고정관념이나 온갖 병리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쉽고도 신선한 은유로 접근했던 작가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전시는 쉽지 않았다.

PMK 갤러리에서 열린 이번 개인전에서는 우선 60여점의 리넨 캔버스 회화가 1층 전체에 둘러져 있다. 대부분 강박적인 정사각형으로 재단된 작품들은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작품이기는 했지만 대체로는 서로와의 관계 속에서 더 큰 작품으로 기능하는 모듈회화로 볼 수 있었다. 어떤 작품들은 일군의 수직-수평으로 배열되어 명확한 타일 패턴이 되었고, 어떤 작품들은 규칙성 없이 더 넓은 평면 위에 자유롭게 내던져졌다. 이들 자유로운 작품들에는 추상적이고 무성의한 패턴들과 초등학생의 낙서 같은 사람 형태가 병치되었다. 개별 작품들은 ‘잡초들’, ‘버려진 공원’, ‘다소 오래된 동네’와 같은 의미심장한 제목들이 붙어 있지만, 사실상 작품과 제목의 관계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백현진 작가 한 사람 뿐이다. 우리는 그저 한 가지 사실만을 알 수 있는데, 인간은 추상적이고 난잡한 패턴들 속에서 재현적인 형태, 그중에서도 특히 인간을 암시하는 형태를 찾아내려는 근원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벽면을 느슨하게 메우고 있는 작품들 속에서 작품을 걸려는 흔적일뿐인 못들이 엄연한 작품으로서 제목까지 당당하게 획득하고 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못들’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캔버스가 걸려 있어야 할 것만 같은 벽면에 박힌 두 개의 못이다. 제목을 ‘따지’ 않았다면 아마 그 누구도 눈 여겨 보지 않았을 오브제다. 작품이 걸려 있어야 마땅할 곳에 작품은 없고, 그것을 걸려고 했던 하나의 과정만이 고정된 개념으로서 외롭게 서 있다. 이 외로움을 달래는 것은 그나마 이 작품이 ‘못’이 아니라 ‘못들’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못은 두 개가 나란히 박혀 있다. 캔버스는 작품이지만 본질은 아니다. 설령 본질을 잃은 무의미한 흔적이라 할지라도 함께 있다면 외롭지 않다.

‘함께 있음.’ 그것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힘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이 노동요이다. 노를 젓거나 모를 심을 때,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노동이 쉬워질리는 없다. 생물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노래를 부르는 일련의 호흡 및 발성 과정은 필경 열량을 소모할 것이므로, 노동에 수반되는 노동요는 절대 효율적인 활동이 아니다. 그럼에도 노동요를 부르는 까닭은 공동체가 함께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연대의식과 감정적 위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동체의 단결된 목소리가 작업의 리듬감을 촉진하며 구성원 전체의 조직적인 활동을 가능하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백현진의 노동요는 이러한 공동체의 단결, 리듬감, 연대의식 등과는 또 전혀 다른 형태를 띄고 있으니 다시 한 번 아이러니가 시작된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퍼포먼스 ‘뮤지컬: 영원한 봄’이 출품되었다. 이 작품은 시, 노래, 연기, 페인팅, 박자가 결합된 종합 퍼포먼스이다. 우선 작가는 시를 들고 갤러리에 들어선다. 그 시를 벽에 붙이고 초록색 물감을 붓에 묻히기 시작한다. 이제 시는 노래 가사였음이 밝혀진다. 작가는 노래를 부르며 붓을 들어 벽에 초록색을 칠한다. 작가가 그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붓이 지나간 흔적일 뿐이다. 그 흔적은 벽에도, 가사가 적힌 종이에도 남는다. 그리고 가사가 적힌 종이 뒤편에도 남는다. 초록색은 점차 넓은 영역을 확보한다. 어느 순간 작가는 마스킹 테이프를 뜯고 그 위에 초록색 점을 찍기도 한다. 시종일관 부르는 노래는 강한 울림이 있지만 영혼이 없다. 노래가 계속될수록 가사도 함께 지워진다. 노동요 답게 후렴 가사(“영원한 봄”)가 반복되지만 그 누구와도 합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되돌아오지 않는 외로운 후렴구이다. 시간이 흐르며 벽은 점점 더 흥건해진다. 결국 가사는 아예 보이지 않게 되고 작가는 아무런 말 없이 자리를 뜬다.

되돌아오지 않는 노동요는 외롭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것은 그저 열량의 소모일 뿐이다. 작가가 실시간으로 그려낸 흔적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런 의미도, 서사도, 형태도 없다. 허망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부재는 존재에의 갈망을 증폭한다. 여기에 서 있었던 나를 포함한 열댓명 남짓한 관람객들은 그것을 느꼈을까? 되돌아 오지 않는 후렴 가사, “영원한 봄”을 함께 받아쳐줄 누군가가 필요했다는 것을, 그게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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