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브라 J. 드위트 외 2인의 「게이트웨이 미술사」

학창시절에 새 교과서를 받으면 가장 먼저 정독했던 것이 미술교과서였다. 사회과부도도 나름 재미있었지만 역시나 아름다운 작품들이 컬러 도판으로 등장하는 미술교과서에는 비기지 못했다. 이 책은 그런 미술교과서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미술의 기본개념, 매체, 역사, 주제를 포괄하는 어른들의 미술교과서로 볼 수 있다. 몇몇 어려운 용어들은 별도의 용어해설 란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교과서라는 평가가 합당하다는 느낌이다.

원제는 「게이트웨이 미술(Gateways to Art: Understanding the Visual Arts)」인데 태평양을 건너오면서 ‘미술사’가 되었다. 물론 미술에 관한 모든 담론은 역사의 일부로 간주할 수 있지만, 이 책에서 협의의 미술사, 즉 미술의 역사는 네 개 챕터 중 하나에 불과하다. 따라서 624페이지에 달하는 이 거대한 책이 오롯이 미술의 역사적 계보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1부 기본개념에서는 미술의 구성 원리와 용어부터 차근차근 정리해 나간다. 2부에서는 여러 매체의 제작방법과 특징을 알려주는데, 이러한 기초지식들은 미술 담론의 전제조건이 된다. 매체는 결국 선택의 문제이고, 모든 선택에는 의도가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내게는 판화와 관련된 상세한 세부 분류와 방법들이 특히 유용했는데, 아마추어 미술사 연구회를 2년 넘게 이끌고 있으면서도 몇몇 작품에 대한 대화에서 ‘그냥 판화’라고 뭉뚱그렸던 시간들이 다소 부끄러워졌다.

‘3부 역사’에서는 선사시대 최초의 미술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민족의 미술이 변화해온 양상을 훑고 지나간다. 여기에는 서양뿐만 아니라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 기존 미술사에서 간과되었던 입장들도 거론되지만 우리나라는 없다. 역사 챕터가 1/4인데, 거기에 다양한 문화권을 포괄하려는 노력이 결부되었으니 세부 내용은 빈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특정 사조나 계보의 대표 사례 작품 한두 개를 짚고 넘어가는 수준에 그친다. 이런 점에 비춰볼 때 ‘미술사’라는 제목에 끌려 이 묵직한 책을 집어 든 독자는 뒤통수를 맞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마지막 ‘4부 주제’가 사실상 이 책의 백미다. 이 파트에서는 다양한 시대와 문화권을 초월하여 미술에 빈번히 결부되었던 주제의식들을 드러내고 대표적인 사례들을 꼽는다. 미술은 그동안 어떠한 일들을 해왔나? 미술은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공통적인 생각이나 가치를 드러낸다. 미술은 종교적 신념을 표현하거나 강화하고 심지어 파괴한다. 미술은 권력자를 칭송하는 선전도구였거나 반역의 무기였다. 미술은 전쟁을 기록했다. 미술은 젠더의 성역을 구축하는데 힘써왔고 이제는 그 견고한 성이 무너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미술의 주제를 들여다보는 일은 인간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은 그러한 미술의 주제들을 최대한 폭넓게 아울렀고, 시공간을 초월하는 사례들을 발굴하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주제별 서술의 말미에 토론할만한 질문이 따라붙는 것도 참신했다. 미술의 주제에 대한 사례와 이론을 더욱 심화하는 별도의 연구서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도판만 865개에 달하는 이 방대한 책에서 우리나라의 미술은 배제되었고, 개인으로서 한국인은 딱 세 명 등장한다. 물론 그 중에 당연히 백남준이 포함되고, 그 밖에 김효인의 한복, 니키리(Nikki Lee)의 퍼포먼스가 사례로 언급되었다. 문화적 다양성을 포용하려고 노력한 책이지만 아무래도 미국 미술과 작가들에 상당부분 초점을 맞추고 있다. 동아시아의 일부가 아닌 우리만의 무언가를 어떻게 찾고 표명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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