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라이선스로 공연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브로드웨이에서의 변변치 못한 성과와 달리 우리나라에서 이 작품은 잊혀질만하면 우려내는 사골국과 같은 존재이지만 그때마다 흥행에 성공하며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특히 지킬역의 조승우는 이 작품으로 뮤지컬 업계를 넘어서 문화산업 전반의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조지킬’이라는 애칭 자체를 하나의 고유명사로 만들어버렸다. 지금 왕성하게 문화콘텐츠를 소비하는 3040세대, 특히 여성 관객 중에는 그가 연기한 지킬에 빠져서 아예 돌이킬 수 없는 뮤지컬마니아의 길로 접어든 경우가 많다. 그만큼 뮤지컬 배우 조승우의 커리어에서 지킬앤하이드는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며, 우리나라에서 이 작품이 사골국이 되도록 만든 장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괴기스러운 작품이 왜 우리나라에서 이토록 성공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일단은 조승우를 비롯하여 스타성과 실력을 두루 갖춘 주연 배우들이 양면성의 카리스마를 마음껏 뽐낼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이 크다. 우리나라 뮤지컬 산업은 소수의 스타 배우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데, 이 작품에는 문화콘텐츠 산업의 가장 중요한 고객층인 30대 여성 관객들을 강하게 매료시킬 수 있는 남성 주연 배우의 강렬한 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이 작품의 주역은 두 시간 내내 거의 쉴 세 없이 무대를 채워야 하는 체력적 한계를 경험하게 되며,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극단의 감정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최고 난이도의 연기를 보여주어야 한다. 배우로서는 인생을 건 도전이겠지만, 팬들에게는 그만큼 황홀한 종합선물세트가 된다.
두 번째 요인은 음악에서 찾을 수 있다.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Frank Wildhorn)은 대중적이면서도 서정적인 멜로디로 정평이 나있는데, 특히 이 작품에서 그의 음악적 기량이 폭발하였다. 지나치게 사랑받은 나머지 뮤지컬 오디션 금지곡으로 통하는 ‘지금 이 순간’을 비롯하여, 이 작품의 주요 넘버들은 서정적인 발라드를 즐겨 듣는 우리네 감성과 맞닿는 부분이 있다. 지킬앤하이드를 통해 한국과 강렬한 인연을 맺은 와일드혼은 천국의눈물, 데스노트, 마타하리 등과 같은 창작뮤지컬에도 관여하였으나 데뷔작인 지킬앤하이드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있다. 그의 재능은 사실상 첫 작품에 모두 쏟아 넣고 이내 휘발되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그의 역량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 어찌 보면 수많은 메가히트작을 보유하고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한 창조력을 뽐내고 있는 앤드류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 경 같은 분이 오히려 비정상에 가깝다.

나는 지킬앤하이드를 이번에 처음 보았다. 데이비드 핫셀호프가 출연했던 2001년 판 DVD 버전을 보았었고, 세종대에서 열렸던 내한 갈라 콘서트도 봤었으나, 정작 실제 뮤지컬 공연장에서는 본적이 없었다. 조승우가 다시 출연하는 이번 공연은 꼭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나이를 감안하면 앞으로 기회가 많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뮤지컬마니아라면 조지킬은 반드시 봐줘야 한다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얼마 전에 그가 독감에 걸려서 몇 차례 공연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걱정이 앞섰으나 프로는 프로였다.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깔끔하게 막중한 역할을 소화했다. 처음에는 성량이 크지 않아서 답답하게 느껴졌으나 이내 공연장 혹은 음향세팅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른 배우들의 목소리도 그다지 풍성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풍성하게 공연장을 가득 메우는 목소리에 파묻히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번 공연에서 배우들의 노래 실력에 감탄할만한 기회가 거의 없었다. 조승우의 노래는 그가 지킬일 때보다 하이드일 때가 훨씬 좋았다. 그래서 그가 계속 하이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광호로 볼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살짝 들었다. 아마도 내가 1층 중간에서 약간 뒤쪽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조승우의 내면연기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 탓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제 나는 분명히 내 갈 길을 정했다. 캐스팅 선택이 애매할 때는 무조건 노래, 그 중에서도 성량을 기준으로 정한다.

무대를 가로세로로 빈틈없이 가득 채우는 무대 연출은 볼만했다. 지킬의 응접실에서 연구실로 변환될 때, 좌우로 배치된 거울이 뒤돌아선 지킬의 표정을 잡고, 무대 정면에서 새어 들어오는 강한 빛이 형형색색의 용액들을 비추면서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도록 구성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천장 끝까지 실험실의 선반으로 가득 메운 모습에서 제작진의 정성(자본)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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