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이런 상투적인 수식어는 통상 가까이 있는 것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글자야말로 가깝고도 먼 존재일 수 있는데, 우리가 매일 같이 수용하고, 또 토해내면서도 정작 글자 자체를 사유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내가 폰트에 대해서 생각할 때라고는 발표용 PC와 호환되지 않는 PPT 자료를 굳이 들고 와서 진땀을 빼고 있는 발표자를 볼 때뿐이다. 굳이 왜 저 폰트에 집착해서 이 사단을 만드는 것일까? 한 가지 경우를 더 꼽자면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이름의 꼬불꼬불한 폰트를 자신의 스마트폰에 디폴트 폰트로 설정해 놓은 사람을 볼 때다. 아무래도 그 사람과는 도저히 친구가 될 수 없을 것 같다.
저자는 서구 인쇄혁명의 성지에서 유학한 활자 중독자인데, 단순히 글자의 형태에 대한 미학적 접근에서 그치지 않고 글자에 얽힌 인문학적 사유들과 최근의 과학적 발견들까지 끌고 들어와 버무린다. 거기에 글자와 세상을 바라보는 스스로의 감상까지 적절히 녹여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글자에 대한 학술연구서이면서 동시에 에세이이자 비평서이다. 세 정체성의 배합은 대략 50 : 20 : 30 쯤 된다.
시각 예술의 약간은 변두리에서, 지식과 사유의 중첩을 시도했던 비슷한 시도로 김겸의 「시간을 복원하는 남자」라는 에세이가 생각나는데, 두 책이 어느 정도 유사한 세계관을 공유한다. 저자 자신의 사적인 경험 속에 전문성을 녹여냈다는 점에서 비슷한 기획이다. 우리가 이런 책에 끌리는 이유는 무슨 대단한 지식을 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분야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진한 땀 냄새를 느끼고 싶어서다.
저자는 글자 문화 전반에 걸쳐 지식 확산, 국제 사회에서 보편성과 개별성의 균형, 자연스러움, 다양성, 범용성 등을 지향한다. 「글자 풍경」에 실린 27개의 에세이가 관통하는 이러한 주제의식은 딱히 흥미로운 견해는 아니나 모나지도 않았다. 오늘날 우리의 시각 세계를 구성하는 활자의 아름다움에 기여한 이름 없는 헌신에 보내는 따뜻한 격려로 가득하다.
글자를 매개로 예술, 인문학, 과학을 넘나드는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매번 수강신청이 폭발하는 인기절정의 교양 강의를 수강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마도 이 과목의 강사는 겉으로 보이는 친절함에 대비되는 매우 짠 학점을 줄 것이 분명하다. 그 강의가 끝나고 빈 강의실에 홀로 남아 있는 강사에게 조용히 다가가 질문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는데, 한글 폰트를 제작할 때 왜 수만 자를 일일이 디자인해야 하나? AI 시대에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 일종의 디자인 플랫폼을 만들어서 초성, 중성, 종성에 들어가는 각각의 모음과 자음이 조합되는 경우의 수를 앉힌 후, 수만 개의 개별 활자들은 자동으로 생성되도록 설계하면 안 되나? 물론 특정 자음에 따라서 모음의 모양이 바뀌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의 “ㅏ”와 “하”의 “ㅏ”를 미묘하게 다르게 만들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의 수도 아주 단순한 알고리즘으로 얼마든지 통제 가능하지 않나? 설마 낱글자 하나하나를 일일이 디자인 하는 것만이 타이포그래피스트의 장인정신이고, 글자에 대한 정신성의 반영이기 때문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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