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브제로서 인간

“너무 냉랭한 거리는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오브제가 눈앞에 보였다. 시간이 정지됐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열광시키는 오브제를 예술로 전화(轉化)한 모습을 통해 다시 한 번 경험한다.”

에드워드 호퍼(1928)

2019년의 미국도 모르는 내가 1926년의 미국에 대해서 알 턱은 없다. 하지만 그때, 거기에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는 사실은 안다. 아마도 그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외로운 그 남자의 눈빛은 경계로 가득하지만 우리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끌어당기고 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요구뿐이다. 하지만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단순히 청각신호를 지각하는 차원을 넘어서 그 사람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알기에,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가 시간을 할애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는 못이기는 척 쭈뼛쭈뼛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흙먼지를 엉성하게 두 번쯤 툭툭 털어내고 우리를 자신의 거처로 안내할 것이다. 그 거처에는 필시 미지근한 브랜디 한 병과 위태롭게 금이 간 유리잔 두 개가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이 남자를 ‘제이슨’이라고 부를 참이다. 이 이름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제이슨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아무리 다시 봐도 이를 능가할만한 다른 이름은 떠오르지 않는다. 제이슨은 지금 상점가 보도에 앉아 있다. 여기 보이는 호보컨(Hoboken)의 어느 길바닥 한 모퉁이는 그 흔한 난간 하나, 소화전 하나, 심지어 굴러다니는 쓰레기 하나도 없는 비현실적 풍경으로 우리를 마주한다. 이 풍경이 자아내는 공허함이 몇 년 후에 찾아올 대공황의 전조라고 한다면 물론 지나친 비약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곳은 실제로 사람이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마을이라기보다는 완공을 눈앞에 둔 영화 세트장 같다. 이 영화 세트장에서 단역으로 기용될 기회조차 거부된 것 같은 사내는 그야말로 우울하고, 지치고, 외로워 보인다. 상품은커녕 흔한 간판이나 광고문구 하나도 보이지 않는 상점의 전면부와 다소 과장된 크기의 건물은 소외된 인격체의 무기력함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비현실적 풍경 속에서 툭 튀어 나온 제이슨은 금방이라도 배경과 쉽게 분리될 듯 위태롭게 앉아 있다.

호퍼는 늘 제목을 매개로 우리와 숨바꼭질 한다.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호퍼의 이러한 장난기에 대하여, “한마디로, 호퍼는 고약한 사람이다. 만일 그가 고약하지 않았더라면 위대한 화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고 언급했다. <일요일>이라는 제목도 역시 얄궂다. 우리 인생의 아이러니는 타자로부터 반드시 행복해야만 하는 날이라고 강요받는 바로 그 날이 평소보다 더 우울한 날이라는데 있다. 보편적인 행복의 조건 속에서 괴리되었음을 느낄 때의 상대적 박탈감은 우리의 자존감을 교묘하게 잠식한다. 제이슨이 우울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무엇보다도 오늘이 일요일이기 때문에 우울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제이슨이 느끼는 감정에 대한 일말의 책임도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그림 앞에서 발을 쉽게 땔 수 없는 까닭은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제이슨과 모종의 연대의식을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연대의식은 사실상 제이슨의 몸에서 비롯되었다. 인류의 모든 유무형적 창작물에 관련한 담론에서 인간의 몸을 표현하고 감상하기 원하는 욕망은 그 무엇보다도 근원적이었으며, 또한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굳이 구태의연하게 선사미술의 손바닥 자국이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까지 소급해갈 필요는 없다. “몸의 재현이 표면에 부상하는 방식이야말로 시각 이미지와 오브제를 제작하고 지켜보는 우리 욕망의 배후에 자리한 가장 기초적인 동인이다(아멜리아 존스, 2003: 304).” 몸은 플라톤과 그의 계승자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단순히 정신을 담은 그릇에 국한되지 않는다. 또한 한 순간에 폭발했다가 이내 사그라지는 성 충동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지도 않는다. 몸은 ‘나’와 세계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interface)이며, 동시에 세계 그 자체이다. 몸과 그것을 담은 예술에 대한 우리의 끝없는 갈망은, 끝내 그것의 온전한 의미에 결코 다다를 수 없으리라는 아득한 한계와 단단히 결속되어 있다. 다시 말해, “몸과 예술 작품은 앎의 불가능성을 드러낸다(아멜리아 존스, 2003: 310).”

에드워드 호퍼(1882-1967), <일요일Sunday(1926)>, 74×86, 캔버스에 유채, 필립스컬렉션, 워싱턴D.C.

몸에 대한 인류의 영원한 탐구 가운데서도 얼굴은 한층 더 특별한 층위에 서 있다. 오늘날 정보통신 네트워크와 사진 기술의 발달이 공해에 가까울 정도로 ‘얼굴 범람’의 시대를 야기하고 있으나, 여전히 궁극적인 오브제로서 얼굴의 의미는 렘브란트의 <자화상> 연작이 불러일으켰던 감흥의 언저리에 머무르고 있다. 오늘날 미술은 막강한 부와 권력을 찬미하던 제의(ritual) 가치를 벗어던지고 오직 개념의 매개체나 전시된 상품으로서만 복무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 기능적 양극단에서도 얼굴이 갖는 고유한 지위는 여전히 건재하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80여 년 전에 이미 이러한 얼굴의 특별한 의미를 정확히 지적했다.

제의 가치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다. 제의 가치는 마지막 참호로 후퇴하는데, 그 지점은 바로 인간의 얼굴 표정이다. 초상이 초기 사진의 중심을 이루었다는 점은 결코 우연히 비롯된 일이 아니다. 이미지의 제의 가치는 사랑하는 대상의 죽음이나 상실을 기리는 의식 속에서 자신의 마지막 피난처를 찾았다. 인간 얼굴의 순간적인 인상이 초기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아우라의 마지막 신호라고 할 수 있다.

발터 벤야민(1939: 594)

어쩌면 이 같은 설명은 ‘말쟁이’ 인문학자들에 의한 과도한 의미부여라는 비난을 살 수도 있다. 하지만 보다 과학적인 설명, 즉 시지각적 메카니즘이 규명한 사실들도 ‘말쟁이’들을 응원하고 있다는 점은 꽤나 흥미롭다. 사람의 뇌에는 여러 지각 부위가 세분화되어 있고, 개별 부위들은 각각의 지각 상황과 대상에 대응하는 분업화된 체계를 갖추고 있다. 여러 시각적 대상 중에서도 사람의 얼굴이 가장 궁극적인 정보처리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최근의 여러 뇌과학 연구가 공통적으로 발견한 사실이다(에릭 캔델, 2018: 50). 사람의 얼굴을 지각하는 ‘얼굴반’이라는 부위는 우리의 뇌에 총 여섯 개가 있는데, 각 부위가 분업하여 대상의 얼굴을 종합적으로 인식한다. 이를 통해 얼굴의 표정, 자세, 위치, 변화, 세부 모양 등을 빠른 시간에 기민하게 분석할 수 있다. 또한 얼굴반은 감정조절과 상황판단을 관장하는 아래관자엽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가 상대방의 얼굴을 인식함으로써 감정과 행동의 변화를 겪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시각적 대상으로서 얼굴은 우리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접근’과 ‘회피’의 기제를 선택하는 사실상 가장 독보적인 단서가 된다.

이제 다시 호퍼의 <일요일>로 돌아온다. 우리는 평면으로 치환된 기하학적 배경 속에서 제이슨을 쉽게 발견한다. 아니, 모든 배경은 제이슨과 특히 그의 얼굴을 도드라지게 만들기 위해 전적으로 구성된 것이나 다름없다. 차도와 인도를 구분 짓는 선명한 사선과 건물의 1층 윗선에서 떨어지는 또 하나의 사선은 함께 오른쪽으로 내달리며 화면 밖에서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그 움직임을 따라가던 우리의 시선을 단호하게 끊어내는 오브제로서 제이슨이 한 가운데에 앉아 있다. 또한 그의 얼굴은 액자의 귀퉁이에서 각각 반대편으로 그을 수 있는 가상의 X자 사선이 교차하는 지점 바로 아래에 있다. 이처럼 화면 속 모든 선의 움직임은 제이슨의 얼굴을 가리키고 있다.

에드워드 호퍼(1882-1967), <일요일Sunday(1926)>, 세부

우리는 DNA 속에 내재된 본능을 따라 그의 얼굴을 읽으려고 노력하지만, 그 시도는 허공을 가르는 공허한 손짓으로 귀결될 뿐이다. 눈동자가 없는 그 표정은 무엇도 암시하지 않는다. 심지어 눈동자가 보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상 이 착각은 우리의 욕망을 반영한다. 제이슨만큼이나 우리도 누군가와의 연결을 원하고 있다. 그렇기에 제이슨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숙고한다. 결국 “우리는 몸의 재현을 만들거나 바라보는데, 왜냐하면 어떤 층위에서 우리는 존재의 깊이를 간직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아멜리아 존스, 2003: 314).” 우리는 주체로서 몸에 귀속된 채 누군가의 몸을 갈망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몸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대상으로서 보일 수 있으며, 반대로 내가 주체로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다고 말하는 방식이다(Merleau-Ponty, 1945: 167).” 이제는 호퍼, 제이슨, 그리고 우리가 각각 자신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너무도 당연한 말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못 박을 수 있다. 이 ‘몸들’은 시공을 초월해 <일요일> 앞에 섰다. 어쩌면 서두에 인용한 호퍼의 이야기 속에서 시간을 정지시킬 정도로 강력한 오브제는 다름 아닌 제이슨의 몸 자체일지 모르며, 지금 이 순간 그밖에 다른 오브제들은 아예 떠오르지도 않는다.

❚ 참고문헌

  • Hopper, Edward(1928), “Charles Burchfield: American”, In the Arts 14 (July 1928), pp. 5-12; ‘롤프 귄터 레너(2005), 「에드워드 호퍼」, 정재곤 역, 파주: 마로니에북스’에서 재인용.
  • 에릭 캔델(2018), 「어쩐지 미술에서 뇌과학이 보인다: 환원주의의 매혹과 두 문화의 만남」, 이한음 역, 파주: 프시케의숲(원제: Kandel, Eric R. (2016), Reductionism in Art and Brain Science)
  • 발터 벤야민(1939),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제3판)”, 손부경 역, 도널드 프레지오시 편저(2013), 「꼭 읽어야 할 예술이론과 비평 40선」, 파주: 미진사, pp. 587-597.(원제: Benjamin, Walter(1939),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Its Technological Reproducibility”, Gesammelte Schriften, I, pp. 471-508, Translated by Zohn, H., and Jephcott, E.)
  • 아멜리아 존스(2003), “몸”, 홍지석 역, 로버트 S. 넬슨·리처드 시프 편저(2015), 「꼭 읽어야 할 예술 비평용어 31선」, 파주: 미진사, pp. 299-315.(원제: Jones, Amelia(2003), “Body”, in the Nelson, R. S., and Shiff, R.(eds.), Critical Terms for Art History, 2nd Edition,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 Merleau-Ponty, Maurice(1945), Phenomenology of Perception, Translated by Smith, C., New York: Routledge, 1995; ‘아멜리아 존스(2003)’에서 재인용

❚ 게재 정보

김주일(2019), “오브제로서 인간”, 「2019 모두의미술사 비평 선집: 파문, 수면에 이는 물결」, Vol.1, pp.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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