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 몽크의 「비트겐슈타인 평전: 천재의 의무」

Rey Monk, Ludwig Wittgenstein: Duty of Genius

철학자의 전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흡입력을 가졌던 이유는 단순히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잘 써놓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모습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나는 놀라울 정도로 닮은 구석이 많다. 그의 철학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에도 묘한 끌림을 느꼈던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그의 말들은 마치 내 입가에서만 하루 종일 맴돌던 울림을 명쾌하게 풀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내가 그와 닮았다는 말이 ‘나도 그처럼 천재다’, 내지는 ‘나도 그와 같은 천재가 될 자질이 있다’는 말로 곡해되지 않으리라 믿는다. 누군가와 닮았다는 것이 그 사람과 같은 수준의 성취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안다. (그리고 내가 천재라면 이미 그 사실이 만방에 알려졌어야 하는 나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 닮았냐고 물어본다면 표현하기가 힘들지만 대체로 중간이 없다는 점, 절충이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자신의 신념과 사회적 요구가 출동할 때, 스스로에게 얼마나 진실할 수 있는지를 집요하게 묻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그 진실함을 위해서 가족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불필요하게 말을 중화시켜서 뭉뚱그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한 이도 저도 아닌 태도에 분개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위선적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지만, 대신에 위악을 한다는 보기 드문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완벽함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기를 늘 갈망한다. 스스로와 세계에 대한 태도뿐만 아니라 사소하게는 끼니를 대충 때운다거나 새를 좋아하는 것도 닮았다!

“진정으로 위대한 일을 하든지,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138

물론 스스로에게 진실하려는 투쟁에서 나와 비트겐슈타인은 애초에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감이 있다. 그의 자기방어는 스스로를 노르웨이와 아일랜드의 오지에 감금하는 수준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랑이 자신의 창조력을 잠식할까봐 멀리서 그리워하며 안부만 주고받는 것에 만족했다. 주류 철학계에서 자신을 떠받들고 가르침을 얻으려 매달릴수록 철학 자체에 대한 스스로의 공헌이 사라질 것을 염려하며 회피하려했다. 자신의 저술에 스스로 만족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곁에 두려 하지 않았다. 그 만족의 수준이란 철학의 모든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수준이어야 했으니 그가 생전에 공식적으로 내 놓은 저서가 한 권 뿐이라는 것도 이해가 간다.

나는 예전에 「논고」에 대한 리뷰에서, 도대체 이렇게 경험론의 끝에 가 있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떤 일상적 언어를 구상했는지 궁금했다고 기술한바 있다. 의미(실체)가 없는 말, 혹은 서로 상이한 것들을 품는 하나의 말을 극도로 혐오 했던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쓰는 언어는 무엇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주고받은 방대한 편지와 그 자신의 일기를 통해서 대부분의 내용을 채운 이 전기를 읽으면 그 의문이 어느 정도 풀린다. 그와 우리의 언어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도 우리처럼 사랑의 설렘을 기록하고, 신의 은총을 갈구하고, 친구와 가족에게 애정 어린 조언을 남기고, 때로는 혹독한 글쓰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되돌아 봤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침묵 속에서 지나쳐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 자신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그는 다만 철학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하여 말할 뿐, 일상적 삶의 모든 실천이 철학의 실천과 완전히 맞닿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철학적 이론보다 실천이 중요함을 누차 강조하였지만 그의 실천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하는 형태가 아니라 그저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면서 스스로에게 부여한 도덕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철학은 필요가 없으며 다만 행위만이 필요할 뿐”

그런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삶은 모순덩어리일지도 모른다. 어떠한 기성 종교의 교리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단호히 거부하면서도 나름대로의 종교적 신념은 죽는 그 순간까지 깊이 간직했다. 의도치 않게 논리적 실증주의자들의 수장이 되었으면서도 동시에 신비주의자, 혹은 예언자라는 인상을 주었다. 윤리학은 철학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면서도 삶 속에서 윤리적 실천에 대하여 끊임없이 고민했으며, 스스로의 윤리성에 대한 회의로 죽기 직전까지도 괴로워했다. 궁극적으로, 철학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졌음에도 철학 자체, 혹은 철학 제도를 파문하고 싶어 했다. 청년 시절 촉망받는 공학도였지만 그의 철학자로서의 경력 대부분은 과학에 대한 맹신으로부터 대중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열정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서 그의 삶을 돌이켜보면 역시나 일관성에 대한 기대는 범인들의 세계에서나 통용될 뿐이라는 점이 다시 한 번 명료해 진다. 우리는 이 같은 결론을 우리보다 먼저 발견한 오스카 와일드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내야 한다.

일관성은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들의 마지막 도피처다.

오스카 와일드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지인들이 작성한 편지와 일기에 대부분의 지면을 빚지고 있는 이 책을 보면서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한다. 한 순간의 감정, 생각, 느낌은 기록하지 않으면 흘러가 버린다. 오늘 우리가 비트겐슈타인의 발자취를 차근차근 되짚으며 그의 사상과 철학을 교차시킬 수 있었던 까닭은 그 많은 기록들이 남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마도 중학교 때까지 착실히 일기를 썼던 것 같은데, 스스로를 체계적으로 아카이빙 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나는 일기와 학교에서 받은 상장들을 책장 한 편에 소중히 모아놓곤 했는데, 그 행위의 저변에는 나 스스로가 언젠가 위인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도사리고 있었다. 내가 성장했던 환경 속에서 가장 쉽게 손에 들 수 있었던 책은 어디선가 물려받은 조악한 어린이용 위인전집 따위였는데, 그 책들을 보며 당돌하게도 나도 언젠가 이러한 위인전기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스스로를 아카이빙 했던 이유는 내 위인전기를 쓰게 될 누군가를 위한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지만, 그런 기록에 대한 열망과 뻔뻔한 자의식마저 비트겐슈타인의 삶 속에서 오버랩 되는 지점들이 있다. 물론 그의 아카이빙은 잦은 이사 속에서 하나둘 사라져 버린 나의 그것과는 달리 인류에게 좋은 선물이었음이 확실하다.

무언가를 기록하려는 욕망은 어느 정도는 외로움에 빚을 지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열심히 편지나 단평을 남겼던 때는 시골학교, 전쟁, 노르웨이, 아일랜드 시기였다. 공통적으로 그가 스스로를 가장 고립시켰던 때이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었던 시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때는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 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이야기에 대한 열망과 총량이 정해져 있고, 그것의 형식이 어떻든지 간에 한 방향으로 해소가 되면 다른 방향은 막히게 마련이다. 비트겐슈타인에게 그 외로움들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굴레였겠지만 우리에게는 선물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저술이나 논문을 거의 남기지 않았던 그의 깊은 생각들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역시 대부분의 위대한 성취는 혼자 있는 시간동안 만들어진다. 한 사람의 고통이 남겨진 모든 이들에게 축복이 된다는 점은 예술과 철학을 막론하고 되풀이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다.

“만일 어느 누구이건 어렵다는 이유로 자신 속으로 깊이 내려갈 의향이 없다면, 그는 피상적인 글만 쓸 것이다.”

기록에 대한 생각들은 성취에 뒤따르는 책임감에 대한 숙고로 이어진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알 권리가 주어져있나? 비트겐슈타인이 가장 사랑했던 데이비드 핀센트에게 보낸 편지들은 발신자 자신에 의해서 회수되어 모두 소각되었다. 아마 거기에는 너무나도 진솔한 사랑의 고백들이 담겨 있었을 것이나, 지금 우리로서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없다. 사랑이, 특히나 거기에 수반되는 육욕이 위대한 성취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던 비트겐슈타인으로서는 그 기록들을 유고 관리자들에게 차마 넘길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신 우리에게는 그의 사사로운 단평들과 일기가 있다. 거기에는 부족하나마 비트겐슈타인이 느꼈던 사랑의 감정들과 육욕의 실체가 담겨져 있다. 그것을 읽다보면 위대한 성취에 뒤따르는 책임감의 범주가 어디까지인지 모호해진다. 가령 우리에게 비트겐슈타인이 자위를 하고 느꼈던 죄책감에 대하여 알 권리가 있나? 어떤 면에서는, 내가 위대해질 가능성이 없다는 점이 다행스럽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상주의자다. 현실과 전혀 타협할 줄 모르고 자신의 신념과 도덕적 의무에만 외골수처럼 매진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남들이 뭐라고 하던 스스로에게 떳떳한지가 가장 중요했던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일생은 도덕적 분투였다. 이 같은 이상주의자들의 특징 한 가지는 스스로에게 만족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그의 일생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는 출판을 망설이는 모습들에서 그 단적인 사례를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저술에서 펜을 놓는 그 즉시로 불만족스러워했고, 그것이 너무나 형편없어서 철학에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것을 출판할지 말지 갈등하는 과정에서 관여한 모든 사람들이 상처를 받거나 실질적인 피해를 입었을 정도이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나와 많이 다르다. 나는 그 보다는 훨씬 타협적인지라, 일단 세상에 내놓고 나서 여러 충돌을 거쳐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트겐슈타인의 가장 큰 성취는 무엇일까? 아마도 개별자들의 가치를 일깨운 것이 아닐까? 보편적인 설명, 그리고 인과율에 대한 맹신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거대 담론을 거절했고, 숲 보다는 나무 하나하나를 설명하면서 숲을 이해할 수 있게 하거나 아예 숲 자체가 없다는 것을 보이려 했다. 그것은 합리주의자들과 계몽주의자들이 하려고 했던 것,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과도 정반대의 사명이다. 세상은 이러한 균형과 대립 속에서 진리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계는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나의 한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세계를 바꾸려면 나를 바꿔야한다.

“헤겔은 항상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실제로는 같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나의 관심사는 똑같이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767

레이 몽크(Rey Monk)의 이 평전은 정말 잘 쓴 책이고, 아마 비트겐슈타인의 삶에 대해서 쓰고 싶었던 세상 모든 연구자들에게 기쁨과 좌절을 안겼을 것이다. 기쁨은 비트겐슈타인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좌절은 이 책을 뛰어넘는 저술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어린 시절에 읽은 책(바이닝거) 한권에서 발견한 도덕적 의무로부터 수많은 역경과 인연을 거쳐 독특한 사상이 어떻게 영글어 갔는지가 서서히 드러난다. 서사적인 재미도 놓치지 않고 있어서, 다음 단락에 나올 변화들을 살짝 언급하고 그 복선이 회수되는 과정에서 지속적인 호기심을 자아낸다. 한 철학자에 대한 900쪽짜리 책에서 이만한 재미와 유익함을 모두 갖추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 한권으로 비트겐슈타인을 모두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구나 그렇듯 한 인간은 소우주와 같지만, 그가 남긴 자료들과 그에 관한 진술들에는 여전히 많은 공백이 보인다. 하지만 끝내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동료들은 이제 세상에 남아있지 않고, 희미한 기억도 휘발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수많은 동료들의 증언과 편지를 통틀어도 가장 순수한 눈을 지닌 한 어린이의 통찰에는 미치지 못한다.

우리는 오후를 논쟁하면서 보냈다. 그는 못 말리는 사람이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아니, 아니, 그게 요점이 아니예요”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의 요점이 아닐지 모르지만 우리의 요점이다. 들어주기에는 피곤한 사람이다. 차를 마신 후에 나는 마당 주변을 안내했다. 그는 내게 비참한 어린아이들에게 친절하라고 부탁했다. 그는 반대쪽 극단으로 너무 가버린다. 엄마는 그들이 예의 바른 시민이 되기를 바라는데 반해 그는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케임브리지 물리학 석좌교수였던 존 라일의 아들 앤서니가 14살 때 비트겐슈타인과 생활하면서 남긴 일기 중

이 소년의 일기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본질이 드러난다. 그는 자신만의 요점을 찾아서 이야기했고, 그것은 남들과 많이 달랐다. 기존 형이상학의 틀에 전혀 얽매이지 않았다. 논리학에 있어서 규칙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지만 삶 속에서는 그보다 행복이 훨씬 관건인 사람이었다. 물론 그 자신은 도덕적 의무 때문에 그 행복을 내팽개쳤지만. 그의 후기 철학이 엄정한 논리의 틀을 깨고 언어가 삶 속에서 구사된 구체적 맥락들에 천착한 이유도 결국은 철학이 행복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만일 정적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면 달리면서 찾아라!” 633


“모든 위대한 예술에는 야생 동물이 있다. 길들여진 채로 말이다.” 351

“거장은 작품으로 알려져야 한다.” 408

“내가 철학은 정말로 시적인 글로 쓰여져야 한다고 말한 것은 철학에 대한 나의 태도를 요약한 것이라 생각한다.” 417

“만일 정적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면 달리면서 찾아라!” 633

“기쁜 희망과 공포는 가까운 사촌이다. 그 중 하나와 경계를 마주하지 않고 다른 하나를 가질 수 없다.”719

“전통은 사람이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자신의 조상을 선택 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원할 때 집어 들 수 있는 한 가닥 실이 아니다. 전통을 갖고 싶은데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불행하게 사랑에 빠진 사람과 같다.” 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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