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대를 넘어서,
변월룡이라는 이름이 오늘날 우리 미술사에서 점유하는 무게감은 크게 두 관점을 포섭하는데, 하나는 한반도 디아스포라이며, 또 다른 하나는 남북관계이다. 물론 이 두 가지 관점은 우리 민족이 겪은 근현대사의 아픔이라는 레토릭 안에서 상호 교차한다. 변월룡은 19세기 조선 왕조의 붕괴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디아스포라의 후손이었다. 그는 한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이 강했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놓치지 않았으며, 그러한 정체성은 이후 짧게나마 북한으로 건너가 미술계의 지도자격 인물로 활동하는 계기가 된다. 고려인이면서 동시에 북한미술의 지도자였던 그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복잡미묘할 수밖에 없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의 「백년의 신화: 한국근대미술 거장」 展과 제주도립미술관의 「고국의 품에 안긴 거장, 변월룡」 展이 열린 2016년을 기점으로 그는 우리 미술사의 중요한 줄기로 ‘공식’ 승인/편입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도들은 역사적 저변을 시공간적으로 확장하려는 학계의 요구와 과오를 씻기 원하는 관官의 필요가 맞아 떨어진 결과일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간과된 영역을 계속 새롭게 발굴하여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고 독자적인 입지를 굳히기 원하는 학자들의 열망이 인류의 지식탐구 전 역사에 걸쳐 유구한 계보를 이룬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서 학계가 성공적으로 확장된 것은 분명해 보이며, 변월룡이라는 이름 자체는 앞으로 이어질 러시아,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전역에 걸친 한반도 디아스포라 연구의 모범답안 내지는 기폭제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어떠한 성향의 정권이 들어서느냐에 따라 다소간 차이가 있겠지만, 왕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과거 정권이 저지른 잘못을 참회하면서 잊혀져간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미술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나아가 현재의 미술제도를 정당화하려는 작업도 이어지리라 본다. 이 작업에서 역시나 가장 중요한 관건은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폭넓은 시간의 궤적 속에서 북한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국내 학계 및 일반의 보편적 공감대가 어떠한 모양새를 띠는지에 달려 있다.
학고재에서 열린 이번 「변월룡: 우리가 되찾은 천재 화가」 展을 둘러보면 알 수 있듯, 그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북한 미술의 지도자격 역할을 맡기 원했고, 행정적 역할을 수용했고, 짧은 기간이나마 성공적으로 임무들을 수행했다. 그 임무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지향하는 바로 그 목표, 즉 공산당과 공산주의 체제를 찬양하고, 프롤레타리아의 노동 정신을 고취하고,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대한 칼날을 드러내는 목표들에 완전히 결속되어 있다. 물론 그 임무들은 그가 러시아 최고 교육기관인 상트페테르부르크 레핀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할 때 수행했던 과업들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다수의 작품에서도 러시아와 북한의 체제를 찬양하는 노골적인 이미지와 문구를 확인할 수 있다.
분명히 대립하고 있는 체제 속에서 미술사가 변월룡을 우리의 일부로 전유하는 전략은 거대 구조 속에 귀속된 개인의 어쩔 수 없는 선택에 대해서는 비난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당연한 전략이다. 개인에게 부모, 가족, 국가는 선택할 수 없이 주어지는 것이며, 그 개인은 맥락 속에서 학습된 지식과 문화에 철저히 귀속된 의사결정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략에 대해서 우리가 공감한다면, 북한에서 활동했던, 그리고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 대다수를 우리 미술사에 전방위적으로 편입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 왜냐하면 법리적으로 볼 때, 지금 북한의 대다수 주민들은 국제법상 불법적 조직인 공산당 괴뢰정권에 볼모로 잡혀 있는 인질들이기 때문이다. (이 논의에서 공산당원이 된다는 것의 분명한 의미를 알고 그 사상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자와 타의로 공산당원이 된 자를 어떻게 구분할지에 대한 방법론적인 논쟁은 차치한다.) 결국 변월룡을 우리 미술사에 편입하는 작업은 원든 원하지 않든 북한 미술가 전원을 우리 미술사에 편입하는 일의 초석이 된다. 만약 전자에 찬성하면서 후자에 반대한다면, 왜 변월룡에게만 미술사적 특권이 주어져야 하는지 되물어야 한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 암시하듯 그가 희대의 ‘천재’이기 때문인가?
지금 논의한 문제들은 간단해 보이지만 매우 복잡한 미학적/정치적 이슈들을 함의하고 있다. 가능한 질문들은 이렇다. 우리와 대립하는 체제를 찬양한 미술가들을 어디까지 포용할 수 있는가? 그들의 찬양이 진심어린 것인지 강요에 의한 것인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그 체제에 대해서 진심어린 찬양을 한 미술가까지도 포섭할 수 있다면 이미지가 지니는 본원적인 힘─사람의 마음, 나아가 행동까지도 구속할 수 있는 힘─에 대해서 간과하는 것이 아닐까? 그 (진짜) 반체제적 미술가를 포용할 수 없다면 표현의 자유라는 미학적 가치를 훼손하는 것일까? 궁극적으로, 우리의 미술사적 승인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승인이기는 한가? 다시 말해 그 승인이 예술가, 작품, 나아가 우리에게 대관절 무슨 효익을 주었나?
이번 전시의 서문에서는 상기 2016년도의 두 전시회를 언급하며, “비록 육신은 타국에 묻혀있으되, 그의 영혼이랄 수 있는 예술 작품이 마침내 고국의 품에 안겼다. 특히 이 전시회는 북한에서 숙청시킨 화가를 남한에서 거두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서술은 북한과 우리가 실질적으로 같은 공동체이며, 북한이 아닌 우리가 변월룡을 대신 품더라도 그가 이를 반겼으리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과연 그럴까? 남한 체제의 굶주린 참상을 조롱조로 그렸던 그가 정말 반겼을까?
근현대사의 비극과 이데올로기의 상흔은 여전히 치유되지 않고 있고, 미래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 아직 우리 자신과 동일시 되는 이들의 이름 없는 헌신조차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는 와중에 변월룡이라는 참신한 이름이 새롭게 발굴되어 그 아픈 역사를 치유해줄 대안적 환영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 행보는 마치 우리가 변월룡을 품으면 디아스포라에 대한 원죄와 민족 분단의 반목을 한 큐에 해결할 수 있기라도 한냥 거침이 없다. 하지만 변월룡의 작품을 수집하고, 전시하고, 도록을 쓰고, 하다못해 카탈로그 레조네를 완성한다고 하더라도 더 본원적인 문제의식에 대한 철저한 사유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또 하나의 신화화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의 개인사는 신화화에 최적화된 요소들을 잘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 신화화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를 제공해 준다. 연해주 유랑촌에서 태어난 고려인 유복자, 조국에 대한 열망, 회화와 판화를 넘나드는 천부적인 기술, 러시아 최고 미술대학 수석졸업과 교수로의 임용, 평양미술대학 학장으로 취임 그리고 1년 3개월만의 숙청, 그 후에도 이어진 조국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등 그의 개인사적 연표는 부인할 수 없는 서양미술사의 영향 속에서 근대적/낭만적 천재의 스토리라인을 동경했던 우리의 입맛에 완벽하게 조응하며 미학적 환영을 만들어 낸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해야 하는 작업은 그의 천재성을 찬양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분쟁의 계보학 속에서 배제와 포용의 조건들을 세밀히 들여다보는, 이른바 ‘잊혀진 예술가들의 고고학’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이 작업은 변월룡이 시간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주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재고하는 과정 속에서 성립된다. 단순히 천재 하나를 우리의 역사라는 보석함에 채워 넣는데서 만족하지 말고 그와 비슷한 조건의 다른 예술가들을 어떻게 발굴하고, 평가하고, 어떤 기준으로 포용 또는 배제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포용 및 배제가 동시대 우리 미학에 어떠한 가치를 줄 수 있을 것인지 숙고해야 한다. 이를 통해 주류와 비주류 사이, 그리고 미술제도의 울타리 안과 밖을 잇는 풍성한 생태계를 구성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 작업은 더 많은 주체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미학적 열매를 나눠가질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마련한다는 상위 목표 하에서 의미를 지녀야 한다.
정말 중요한 일은 과거의 빛나는 성취를 좌대 위에 올려놓으려는 노력의 지분을 조금이라도 떼어서, 지금 이 순간 음지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돌려주는 일이다. 조국에 대한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을지언정, 그래도 변월룡은 러시아 최고 미술대학의 교수로서 부귀영화를 누리지 않았던가? 반면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래서 더 많은 예술적 잠재력을 배태한 제2, 제3의 디아스포라들은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다.

여기까지는 전시 외적인 (주제넘은) 소견이었고, 이제는 작품들을 살펴보자. 위의 비판적인 소견과 전혀 상반되게 느껴지겠지만 변월룡의 그림은 내게 상당한 감흥을 주었는데, 특히 그의 인물화들에는 아주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어린 인간애가 느껴졌다. 혹자는 그것을 북한 어린이들과 민초들의 초상과 결부하면서 민족성을 운운하고 싶을 수 있겠지만, 사실상 그의 초상화 속 인간애는 예술가 경력 전반에 걸쳐 공통적으로 두드러지기에 딱히 특정 시기에 변별력을 갖는다고 보기 어렵다.

변월룡의 화풍 자체가 후기 인상파나 야수파의 임파스토를 적극 수용한 탓에 재료의 거친 물성을 매력적으로 활용하는데, 한 화폭의 표현 안에서도 재현 대상에 따라 그 밀도를 다르게 구성하여 그림의 입체감과 생동감을 강조하는 기량이 가히 탁월했다. 예를 들어 유화 초상화들을 살펴보면 인물의 얼굴은 짧고 굵은 붓질로 여러 차례 덧칠하면서 얼굴의 세밀한 주름, 근육의 뭉침, 빛의 흐름 따위를 정교하게 구획하고 입체감을 살리는데, 그 밖의 몸체 윤곽이나 옷 주름 등은 단 몇 차례의 붓질만으로 암시하듯 최대한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거기서 한 발 더 물러나 배경으로 들어서면, 거기에는 최소의 선과 대기만이 가득한 무한의 공간, 내지는 빛과 어두움만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변월룡의 초상화는 선 원근법을 거의 고려하지 않으면서도 마치 어둠 속에서 얼굴이 툭 튀어나와 관람객 눈 앞에 다가오는 듯 한 입체감과 생동감을 지닌다. 이 감각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의식의 영역이 아닌 시지각 이면의 저지대에서 조용한 울림으로 침전한다.


15세기 중반,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가 근대 서구 회화의 이론화를 최초로 시도한 이래, 소묘는 회화, 조각, 건축 등 모든 위대한 예술의 기초체력으로 이내 받아들여졌다. 그러한 관점에서 미켈란젤로에게 보내는 무수한 찬사의 태반은 그의 소묘 기량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사실 이 같은 견해는 이제 당연한 상식처럼 느껴져서 그간 내게 그 어떤 감흥을 주지 못했는데, 이번 「변월룡 전」을 보면서 또렷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나는 소묘나 판화 비중이 높은 전시를 은근하게 폄하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번 전시 수준의 출품작들이라면 폄하는 가당치도 않다. 그만큼 탁월한 수준의 소묘와 판화들이 출품되었고, 그 작품들이 보여주는 경이로울 정도의 세밀함, 정교함, 함축적 표현력이 회화의 절제미와 대비되면서 더욱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진정 변월룡의 소묘와 판화가 다다른 사실주의적 표현의 경지는 렘브란트나 뒤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준이었다. 전시장 벽에 다음과 같은 작가의 말을 인용한 것은 전혀 헛되지 않았다. 정말 천재는 천재다.
“입체인 조각이나 평면인 그림이나 그 근본은 같다. 위대한 조각 작품 뒤에는 그만한 데생력이 받쳐주었기에 그런 명작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올바른 기억에 의존한 데생은 미술가가 시각에 의한 기억을 오랫동안 끊임없이 연마한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그러한 연마의 결과로 미술가가 갖는 지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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