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이 전시에 대해서 무엇인가 쓰려거든 제대로 ‘각’을 잡아야만 할 것 같다. 현역 최고령 화가의 개인전이라는 사실을 굳이 상기하지 않으려고 해도 뿌리 깊은 장유유서의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자란 내가 그 무게감을 수이 떨쳐 버릴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내가 103세가 되면 어떤 인물이 될지 생각해 본다. 몸 구석구석이 고장 났다는 사실 말고는 특별한 감흥이 없을 것 같다. 인간성도 본질적으로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쯤 되면 세상의 진리를 어느 정도 깨우치지 않을까하는 근거 없는 희망 따위는 품지 않는다. 핏덩이에서 35세에 이르는 동안 깨우치지 못하였는데, 그 시간만큼 두세 번 더 살아본들 달라질게 무어랴. 다만 육체에 철저히 귀속되곤 하는 정신이, 육체의 망가지는 속도에 비례하여 망가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나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미술사적 주제 중 하나는 한 화가의 젊음과 노년의 대비이다. 위험한 일반화이지만,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렘브란트, 드가, 르누아르 등 장수한 화가들의 화풍이 변해가는 궤적을 볼 때 어느 정도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었던 경향은 ‘힘을 뺀다’는 것이었다. 각 화가들이 속했던 시대, 화풍, 매체가 전혀 달랐으므로 힘을 뺀다는 말도 각각에 대응하는 상세한 부연을 필요로 하겠지만, 결국은 세부적인 표현의 정교함에서 한걸음 물러나 하나의 원형을 만들고자 하는 자세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이는 평생에 걸친 훈련을 통해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직관이 발달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단순하게 신체적으로 기력이 쇠하여 힘차고 집요한 표현이 불가능해지는 상황을 암시하기도 한다.

힘을 뺀다는 논리는 여러 대가들의 작품을 통해 귀납적으로 추론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가뜩이나 빈약한데, 표현의 중심점이 재현에서 개념으로 옮겨온 시대에는 더더욱 존립하기가 어렵다. 이번 김병기 展에서도 힘을 뺀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 2016년에 열린 100세 기념 전시 이후 3년간의 신작을 모았는데, 대체로 강한 조형성이 느껴지는 추상회화들이 주를 이루었다. 일부 정물화나 인물화는 윤곽선이 와해되면서 공간으로 스며들어가는데, 철근 같은 구조물 위에 위태롭게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 구조물과 물질을 검정색의 강한 사선이 꿰뚫는데, 이 사선은 일종의 자기장처럼 화면의 모든 구성요소들을 유기적으로 통합한다. 완전한 추상 작품에서도 이 사선은 두드러진다. 이들 작품에서는 수직성의 엄격한 구조물들이 무한에 가까운 공간에 투명하게 서있는데, 그 사이를 검고 메마른 에너지의 파장이 자유롭게 교차하면서 통합적인 공간을 창출한다. 요컨대 김병기의 회화는 힘을 빼기는커녕, 도리어 강한 힘으로 캔버스와 관람객 사이를 윽박지른다.

김병기는 1916년 평양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유학했고, 20세기 중반 북한과 한국에서 미술교육자 및 이론가로 활발히 활동했다. 20세기 후반에는 미국에 정착하여 외부자로 살았고, 2016년에 국적을 회복하여 다시금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지정학적으로는 한반도-일본-미국을, 시간상으로는 20세기 초반부터 100년의 세월을 모두 아우르는 김병기는 다층적인 지식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힘을 여전히 캔버스 위에 강하게 투영하고 있다. 그는 선線을 한국 고유의 추상적 구성요소로 보았고, 그렇기에 남들 보다 그것을 잘 다룰 수 있으리라고 자신했다. 김병기의 화폭에서 팽팽한 긴장감으로 추상과 구상을, 배경과 물질을 관통하는 검은 선들은 그 자신감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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