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세 개의 전시를 보았고, 이 전시가 세 번째 였기 때문에 대충 훑기만 했다. 물론 시간과 체력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나는 미술관에서 동영상을 퇴출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데, 이 전시는 디지털 리터러시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는 까닭에 역시 동영상이 주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작품들을 갈지자로 회피했다. 하지만 당일 서울관에서 가장 붐비는, 특히나 어린 친구들이 가장 복작거리는 전시가 이 전시였다. 확실히 매체의 무게 중심은 옮겨가고 있다.
전시장을 가득 메운 주제 의식, 즉 디지털 변혁 속에서 정보의 무기화와 인간 소외 문제는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기에 딱 한 작품에 대해서만 기록한다.
차오 페이(Cao Fei)의 <룸바 01 & 02>는 높이와 더비가 다른 두 개의 직육면체 좌대 위에 로봇청소기 두 대를 올린 매우 단순한 작품이다. 작품의 작명도 매우 단순해서, 미국 아이로봇 社의 로봇청소기 브랜드명을 그대로 차용했다. 예술로 재탄생한 이 로봇청소기 두 대가 선보이는 움직임은 우리가 그런 종류의 제품에게 기대하는 바로 그 움직임과 정확히 일치한다. 즉, 경계 그어진 영역 안에서 불규칙한 동선의 항속운동을 지속하는데, 그 과정에서 몇 가닥의 척수를 날름거리며 어딘가 마뜩잖게 바닥을 휘젓고 돌아다니는 행위를 동반한다.

이 작품은 미술의 탈물질화와 개념화를 끝까지 밀어 붙인 오늘날에 ‘예술하기’가 얼마나 복잡한지를 잘 보여준다. 기성품에 아무런 가공도 하지 않고 새로운 개념만을 덧입혀 미술관의 좌대 위에 올려 놓는 행위는 이미 100년 전에 뒤샹이 했던 일이지만, 이 기성품이 움직일 경우에는 새로운 의미의 층위가 생성된다. 물론 3차원의 공간을 점유한 작품이 움직이는 것도 100년 전에 뒤샹이 했던 일이다. 하지만 사람이나 자연이 움직임의 동력을 제공했던 최초의 키네틱 아트와 달리, 이 룸바 두 녀석은 베터리를 동력원으로 삼으며, 완전히 우연에 의지하거나 정해진 궤적을 따르지 않는다. 어느 정도는 학습된 (혹은 주입된) 동선을 따르며, 나름대로 제한적인 조건에 반응하며 그 동선을 수정한다. 일종의 ‘알고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학습-반응 체계는 언젠가 인간과 동일한, 심지어 그 이상의 수준으로 발전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이 초보적인 수준의 룸바는 아직 갈길이 멀어 보인다. 하얗고 성스러운 좌대 위에서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발걸음을 계속하지만, 결국은 낭떠러지에 맞닥드리며 계속 좌절하는 모습만 보여줄 따름이다.
룸바가 마주한 경계는 그것을 넘을 때 한 존재를 산산조각 낼 수 있는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다. 룸바가 속한 세상, 그리고 룸바가 판단하고 반응할 수 있는 조건은 너무나 제한적인 것이어서 경계와 마주한 존재의 무력감이 더욱 극명하게 부각된다. 아마도 많은 관람객들은 룸바의 도전적인 몸부림과 이내 이어지는 좌절 속에서 헛웃음을 짓게 될 터인데, 그 헛웃음 속에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을 억지로 마주 했을 때 느꼈던 당혹감이 배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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