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인류가 마주한 여러 문제들을 상기하는 영상 작업들이 폭넓게 전시되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미술관에서 영상을 퇴출시켜야 한다는 나의 견해에 따라 열심히 보지 않았다.
언급할만한 가치를 느낀 작품은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의 <Parallel IV(2014)>인데, 이 작품은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킨 비디오 게임 GTA(Grand Theft Auto)의 몇몇 구동 모습을 그저 녹화하고 편집했을 뿐이다. 얼핏 보면 게임 타이틀 매장 앞에서 무의미하게 상영되는 구동장면을 연상케 한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아무런 죄가 없는 행인이나 상점주인 등에게 총을 겨누고, 이후 공격 대상이 된 인물(NPC: nonplayer character)은 대체로 허둥지둥 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로 공격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저 겨눌 뿐이다. 하지만 겨누는 행동만으로도 관람객은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알다시피 GTA의 그래픽이 워낙 훌륭한 탓이다(최신 PC버전의 하드디스크 공간 요구사항은 90GB에 달한다). 단지 평판 화면에 갇힌 상황을 보고 있는데도 약간의 가슴 저림이 동반된다면, 가까운 미래, 즉 우리가 게임의 4차원 공간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게 될 시대의 몰입감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가질만하다.
특히 NPC들의 행동을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NPC답게 매우 무기력하고 아둔하며 현실감이 떨어지는 대응을 보인다. 같은 장소를 계속 우왕좌왕 한다거나, 총구를 관자놀이에 대고 있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하던 이야기를 마저 이어간다. 너무나 현실적인 배경 속에서 너무나 비현실적인 대응을 보이는 이들 때문에 이 작품은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마저 풍긴다.
어쩌면 마땅히 게임이어야 할 장면이 현실 속에서 이미 충분히 벌어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다소 먼 이야기지만, 학교 같은 공공장소에서 총기를 난사하는 미치광이들의 소식을 심심치 않게 듣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도 스케일은 다소 작을지라도 별다른 이유도 없이 이웃을 상해하는 ‘묻지마 범죄’가 종종 벌어지고 있다. 아무런 맥락도 없이 반복적으로 총을 빼들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기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게임 속 장면들을 조롱하며 비웃다보면 그 풍경이 바로 현실의 축소판임을 이내 알게 된다. 다정했던 친구가 갑자기 당신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댄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언젠가는 게임과 현실의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질까? 과거에도 그런 우려들은 있었으나, 게임은 여전히 가상의 영역에 묶여 있었고 앞으로도 당분간 그럴 예정이다. 하지만 오늘날 기술의 발달 속도를 보면, 게임과 현실을 구분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언제까지나 극히 일부의 문제로만 평가절하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가상세계가 현실보다 더 중요한 지위를 점하는 세상이 오기 전에, 도대체 가상과 현실이 무엇이 다르며, 왜 가상이 현실을 위하여 봉사하기만 해야 하는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가상을 품을 수 없다면, 가상에게 봉사를 강요할 수도, 가상이 돌연 적이 되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 그보다 앞선 질문은, ‘지금 여기가 가상이 아니기는 한가?’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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