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먹을 끽(喫)’자를 입에 올릴만한 용례라고는 ‘만끽’과 ‘끽연’, 사실상 이 두 단어뿐이다. 그나마도 ‘끽연’은 ‘흡연’에 밀려 이미 사장되고 있다. 아마도 끽 자에 교묘하게 묻어 있는 긍정적인 어감이 금연 캠페인과 충돌하며 반감을 산 듯하다. 이제는 일상적인 언어생활 속에서 된소리가 초성에 붙는 한자어를 접하는 상황 자체가 상당히 드물어졌는데, 돈선필 작가는 자신이 모아온 피규어들을 미술관에 진열해 놓고 끽 자를 끄집어내어 개념화를 시도했다. 이번 전시에 실제 전시된 작품이 주는 인상보다는 사장되어가는 한자 ‘끽’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 것이 더 신선했다.

작가는 ‘형태를 음미할 수 있는 상점’이라는 의미로 끽태점(喫態店)을 제안하였는데, 3개의 쇼케이스에 담긴 온갖 피규어들이 보여주는 자태가 실로 음미할만하긴 하다. 기본적으로는 2D 형태로 고안되었던 캐릭터들이 3차원의 공간 속에서 생명력을 얻고 찬란한 조명을 받으며 서있다. 고가의 일본 피규어를 볼 때마다 이토록 정교한 형태를 빚어내고 생동감 넘치는 색채를 부여하는 기술력에 놀라곤 하는데, 아마도 그 혁신을 뒷받침하는 것은 캐릭터들, 나아가 애니메이션 및 게임 산업 전반에 대한 폭넓은 마니아들의 전폭적인 애정이리라. 실용적인 가치가 전무한 이 물건들은 무엇인가를 몸으로 지각하면서 상호작용하려는 인간의 본원적인 욕망에 대하여 상기시킨다. 이 욕망은 피그말리온의 갈라테이아와 맞닿아 있으면서 동시에 오늘날 전 세계 모든 미술관에서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라는 경고 문구를 붙이게 된 원인이다.

작가는 피규어를 모은 후 자신만의 기준을 담아 전시장에 배치했다. 기존 피규어에 새롭게 채색을 가하여 고정적인 의미를 소거하기도 하고, 아예 새롭게 주조한 창작 피규어들을 기성품들 사이에 배치하여 결핍된 의미들을 매개하기도 하였다. 레진과 우레탄 폼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조형물들은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에서 상투적으로 묘사되는 폭발의 순간을 응고시켜 놓은 일종의 연기 덩어리 같은 형태를 띤다. 이 박제된 버섯구름은 우리가 스펙타클의 범람 속에서 어마어마한 대량살상의 순간을 마주할 때 얼마나 무덤덤해지는지를 일깨운다.

특히 <디버깅 스테이션, 2019>은 전설적인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의 한 장면을 1/6 스케일로 축조한 피규어에 (아깝게도) 단색의 스프레이를 떡칠해 놓은 작품인데, 단지 색조의 통제만으로도 시각 경험이 끝없이 단조로워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단조로움은 더 작은 세부에 더 쉽게 주목하도록 만든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의 일부 장면들을 클로즈업해보면 새로운 해석의 실마리들이 열린다. 거대한 에반게리온 기체나 사도뿐만 아니라 허둥지둥 뛰어가는 시민 한 사람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사람이 허망하게 건물 파편에 맞아 죽기 위해서 40여년의 세월을 하루하루 견뎌낸 것은 아니지 않은가?






통제된 방식을 거부할 때, 의미는 더욱 풍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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