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 스미스의 「컨템포러리 아트란 무엇인가」

Terry Smith, What is Contemporary Art

역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이나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인물에 가까울수록 더욱 흥미롭게 느껴지는데 사실 흥미를 느끼는 것은 우리뿐이다.

야콥 부르크하르트

동시대 미술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우리뿐일지 모른다. 이 지면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리가 공히 동시대에 귀속되어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며, 특정한 시공간의 조건 속에서 실시간으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미술이 인간의 의도적인 구성물이고, 그것이 인간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거나 인간을 변화시키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공공연한 상식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동시대 미술에 대하여 알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는 동시대적 삶의 조건을 이해하고, 그것에 개입하고, 결과야 어찌될지 몰라도 어쨌든 그것이 전보다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동시대 미술을 바라본다. 스스로, 혹은 타자를 절망에 빠뜨리기 위하여 미술을 향유하는 사람은 없다. 설령 그것을 바란다고 공공연히 언명하는 자라도 그 자의 안구 너머 깊숙한 곳에 자리한 촉촉이 젖은 대뇌는 더 높은 정상을 보고 있다.

다시 말해 동시대 미술에 대한 우리의 지대한 관심은 우리가 거기에 속해 있거나, 시간적 기준을 넓게 잡아도 그것이 우리와 가깝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데, 이러한 관심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 더 언급할 가치도 없다. 부모 보다 조부모에 대한 관심이 덜하고, 조부모 보다 증조부모에 대한 관심이 덜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대목에서 역시 관건은, 부모와 조부모에 대한 비유가 암시하듯, 우리가 동시대 미술에 대해서 얼마나 균형 잡히고도 풍성한 역사적·비평적 담론을 써내려갈 수 있는가에 있다. 가까운 존재에 대하여 객관적일 수는 없다. 지금 우리가 동시대적 삶의 조건들이라고 생각하는 요소들이 100년쯤 지나면 한낱 소립자로 치부될 수도 있고, 반대로 지금 우리 발에 채인 먼지가 후대의 역사가들이 손꼽는 인류사적 변곡점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여기서 ‘나’를 본다는 것은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활동이면서도 그간의 성과만 놓고 본다면 인류역사상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숭고한 과업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가 놓여 있다. 테리 스미스(Terry Smith)의 「컨템포러리 아트란 무엇인가」는 동시대 미술을 규정하고 그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종합하면서 ‘진정한’ 컨템포러리 미술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동시대 미술제도의 올림푸스 신전인 미술관과 전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그것이 여전히 모더니즘의 족쇄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고발한다. 그들은 여전히 19세기말의 아방가르드적 혁신의 궤적 위에 동시대 미술을 올려놓고 꼬리표를 달고 있다. 지역재생의 일환으로 등장한 랜드마크적 미술관의 외관과 블록버스터급 대표작들이 추구하는 말초적 스펙타클도 여전히 반동적이다. 동시대라는 통제변수 속에서 시야를 넓혀 전 지구적인 움직임으로 나아가면, 여기서는 대안적 담론의 장으로서 수많은 페어와 비엔날레들이 시간, 공간, 이주, 역사, 계층, 젠더라는 주제를 들고서 기존의 폭력적이고 단선적인 세계화에 탈식민적으로 저항하고 있다. 이제는 왕좌를 뒤흔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헤겔을 연상케 하는 ‘정(리모더니즘)-반(탈식민성)-합(연결과 균형)’의 투쟁 속에서 동시대 미술이 결국 옳은 길을 찾을 것으로 기대 섞인 예견을 내놓는다. 여기서 스미스가 추구하는 동시대 미술의 조건이 판명난다. 그것은 리모더니즘, 퇴행성-선정주의, 스펙타클 아트의 반대편에 서는 예술이다. 정치적이고, 지역적이며, 역사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방관자적 다원주의를 넘어 적극적 상대주의로 삶과 역사에 개입하는 작품이다.

미술관이 되거나, 현대적이 될 순 있지만, 둘 다 될 순 없다.

커트루드 스타인

저자의 모든 주장은 현장의 땀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품 사례들 위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신뢰를 더한다. 스미스는 한 번도 본적 없는 작품을 손에 잡힐 듯 장황하게 묘사하고 한 공간에 있는 여러 작품들을 개념적으로 연관 짓는 능력이 탁월하다. 반복되는 칭찬과 조롱 속에서 자신이 균형 잡힌 감각으로 비판해 나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독자들을 자신과 같은 방향으로 은연중에 끌고 간다. 우리는 저자만큼 작품을 열심히 보고 사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해석에 대해 반론을 꺼내기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컨템포러리 아트라는, 태생적으로 모호할 수밖에 없는 대상에 얽혀 있는 딜레마가 무엇인지 정도는 대충이나마 알아차릴 수 있다. 이 딜레마는 동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실상 19세기 중반 이후로 한 번도 잊혀진 적 없었던 하나의 질문으로 압축할 수 있다. 즉, 유미주의와 역사주의는 어떻게 양립할 수 있겠는가?

리모더니즘의 구역에서 불편하게 머무르는 미술, 그 그늘을 통과해서 지나가는 미술, 그 흡수/배제 작용을 거부하고, 그것을 내버려두며, 사뭇 다른 기준을 중시하여, 마침내는 그것을 잊어버리는 미술, 이러한 미술이야말로 동시대적이 될 기회를 갖는 것이다. 61

시간 속에서 존재함의 의미변화, 자리 잡기 혹은 이동하기의 의미변화, 매체화 속에서의 자유모색, 우리 주위에 가득한 파편화된 낯설음으로부터 자아에 대한 의식을 조각 맞추기. 좀 더 일반적이고, 번드르르하며, 수명이 짧게 되어 있는 “정치적 전환”보다도 바로 이것이야말로 동시대 작업의 핵심에 자리한다. 360

스미스가 정의하는 컨템포러리 아트란 이런 것이다. 소수만 누릴 수 있었던 소유물, 혹은 권력과 부의 상징물로서 미술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고, 모든 잊혀진 자들의 목소리를 무대 위에 올려 풍성한 미와 진리의 성찬을 맛보아야 한다는 저자의 진단은 옳다. 하지만 그 대안적 무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미술을 통해 향유하는 감각적이고도 즉물적인 즐거움과 오감의 확장을 정죄할 수 있는 근거 또한 희박하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저자가 지적했듯 개념미술의 도래 이후 지배적인 사조를 수립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무위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오늘날(373), 우리 눈앞에는 이미 인류 역사상 가장 풍성한 미적 스펙트럼이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 세계 10위권 변두리에 찰싹 붙어 있는 신자유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만, 그런 나라에서 동시대 예술을 폭넓게 향유할 수 있는 행운에 전 지구적 차원에서 적극적 상대주의의 주체라는 십자가까지 자동으로 수반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즐기는 자와 행동하는 자의 말로는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동시대 미술관과 갤러리에 들락거리는 무수한 사람들이 그 역사의 심판대에 올라서기도 전에 시각과 판단의 제약을 덧씌우는 일은 가능하지도 않고 해서도 안 된다.

미술제도의 울타리 안팎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는 사람들의 소명은 다양한 관점과 표현 및 거래 방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그 다양함이 각각 어떻게 미술관, 작업실, 연구실, 갤러리, 경매장에서 동시대 미술을 이끌어 가고 있는지를 밝히고, 그 저변의 이데올로기는 무엇인지를 사유하게 해야 한다. 저자는 그 소명으로서 한 가지를 했다. 즉, 리모더니즘이 어떻게 죽지도 않고 또 왔는지를 보여주면서, 한편으로 그 성역을 깨부수려는 노력이 어떻게 역류하고 있는지도 기록했다. 그러나 반대되는 목소리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무라카미 다카시나 제프 쿤스(Jeff Koons)가 지극히 개인적이고 정욕적인 B급 정서를 거대 스펙타클로 포장함으로써 구현하는 즉물적 생경함이 우리의 미감 확장에 기여하는 바도 기억해야 한다. 이는 저자가 경계하는 방관자적 다원주의로 비칠 수 있으나,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상대주의자들을 충분히 존경한다는 전제 하에서는 꼭 필요한 태도이기도 하다. 루이스 캄니처(Luis Camnitzer)의 언급처럼, 예술 위의 예술도 없거니와 삶 위의 삶도 없다(246). 미술제도를 둘러싼 모든 정치적 움직임 속에 이 절묘한 긴장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큐레이터들은 우리가 없을 때 작품들이 서로 나누고 있을지도 모르는 대화에 매료된다. 104

억압과 조작을 벗어난 해방을 향한, 부드럽고 완곡하지만 변함없는 끈기는 강력한 정신이며, 오늘날 매우 필요하다. 262

집단행동, 군중, 인류, 모든 사람 등등은 고대의 관념이 아니다. 그것들은 현대적인 관념이고 정확히 그것들이 가장 위험에 처한 듯 보이는 순간에 등장한다. 286

동시대성의 복합성으로부터 비롯된 작품은 스스로를 종료할 수 없다. 그것은 스스로를 열린 상태로 놔두어야 한다. 앞으로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든 간에. 290

정체성은 부여된 동일시의 문제일 경우가 너무도 잦다. 292

1970년경 이후로, 시각 예술에 관한 한 어떤 경향도 당대의 지배적 양식이 될 정도에 값할 만큼의 두각을 나타낸 바가 없다. 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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