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va Vaidhyanathan, The Googlization of Everything
미학의 구글화를 생각한다.
한국어판 제목에 대한 저자의 답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관점에서 각각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구글이 지닌 막대한 자원과 평판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하고 있는 비즈니스 영역에 있어서 공공정책이 개입될 여지 자체를 말소해버린다. 둘째, 구글이 지금은 ‘악해지지 말자’는 모토아래 (표면상으로는)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그들이 미래에도 변치 않고 그러리라는 것을 보장할 수는 없다.
더 자세히 들어가 보자. 저자가 현재적 관점에서 우려하는 것은 ‘공공기능의 실패(public failure)’다. 이는 민간 영역에서 너무나 강력하고 효율적인 주체가 등장하여 공적인 임무를 자처하게 되면서 정부가 거기에 개입할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하거나 필요성을 느끼더라도 민간 주체에 비하여 미미한 수준의 정책 효과성만을 달성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면서 결국에는 발을 빼버리고 마는 현상이다. 이렇게 되면 대다수 보편적인 시민들을 위하여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게 봉사해야 하는 하나의 공적 기능이 민간 주체의 손에 들려지는 결과가 초래된다. 저자가 우려하는 바는 구글이 구글북스나 구글스칼라를 통해 공공 도서관의 기능을 자처하게 될 때, 인류의 소중한 지적 자산을 노출하고 배급하는 막중한 책무가 사기업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복잡미묘한 저작권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이 대목에서 문헌정보학적 전문성 부족과 노출의 기준 및 공정성 문제가 대두된다. 구글은 나름대로 공정하고 합리적인 기준에 의한 검색결과 제공을 공언하지만, 서버 깊숙한 곳에 심겨진 알고리즘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길이 없다. 기본적으로 사적 주체는 공적 기구의 손아귀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인류에게 정말로 가치 있는 영역에서의 권한 위임은 그 파급효과에 대한 철저한 고민을 수반해야 한다. 극단적인 예로, 어느 날 삼성그룹이 사회공헌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던 차에 ‘자, 이제부터 국방은 전적으로 우리 그룹이 담당할 태니 국가는 그 재정을 아껴 복지에 지출하십시오’라고 한다면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는가? 민간이 담당하는 치안의 총부리는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 반대방향으로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을 누구라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문헌정보의 영역에서 수많은 대중과 학자들은 물론, 심지어 공공도서관장들조차 그러한 우려를 품지 않은 것은 활자가 즉각적이고도 물리적인 역류의 도구가 될지 모를 가능성이 총만큼 가시적이지는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 세상 모든 책과 논문이 구글의 독점적인 손아귀에 들어간 50년 후 어느 날, 우리는 구글의 비리를 폭로하거나 하다못해 네트워크 기술의 위험성을 고발하는 절절한 비판의 목소리를 손쉽게 찾아 읽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책의 원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인 ‘모든 것의 구글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구글아트 프로젝트 때문이다. 1960년대 이후 미술의 개념화와 비물질화가 급속도로 진전되면서 미술제도를 둘러싼 관심의 초점은 수집과 보존에서 아카이브와 접근성으로 점차 옮겨 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디지털 기술의 발달에 따라 가상 및 증강 현실을 구체화하는 기술들이 속속 등장함에 따라 더욱 탄력을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디지털 정보를 모으고, 분석하고, 인터페이스를 제공하는데 있어서 가장 강력한 주체인 구글이 미술에 대하여 어떠한 입장을 취할지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구글이 미술에 접근하는 방식은 디지털 시대의 이정표가 되지는 못할지언정 최소한의 암시는 될 수 있다. 즉, ‘미술에 관한 정보’나 ‘정보화된 미술’이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한 시그널로서 구글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의 사유하는 방식은 구글의 그것을 닮고 있고 이러한 경향이 다시 아날로그 시대의 방식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그 어떠한 조짐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글은 구글아트 프로젝트를 통해 세계 유수의 미술관 및 갤러리와 손을 잡고 미술 아카이빙에 나서고 있다. 구글북스가 했던 방법과 동일하다. 실제 세계에서 신뢰할만한 공인된 기관의 데이터를 자신들의 서버에 집어넣고 접속자들을 대상으로 그것을 보고 즐기게 만든다. 모든 정보의 집적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단일 인터페이스가 되고자 하는 구글의 열망이 시각 예술의 세계에 발을 뻗은 것이다. 지금의 구글아트 프로젝트는 구글북스나 구글스칼라처럼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허술한 빈틈이 군데군데 엿보인다. 하지만 훗날, 구글이 인터넷 세상에서 미술에 관한 공인된 아카이브를 제공하는 유일한 주체로 떠오를 가능성은 낮지 않다. 구글에게는 돈, 노하우, 기술, 인재가 있고 무엇보다도 강력한 제국주의적 의지가 있다.
구글이 지금 미술관이 담당하는 주요 역할, 즉 수집, 보존, 전시, 연구 중에서 연구 빼고 모든 것을 직접 담당하게 될 훗날을 떠올리며 제기해야만 하는 우려는 구글북스 프로젝트 당시와 다르지 않다. 즉, 우리는 그들의 알고리즘과 기준을 모르고, 혹여 안다고 하더라도 그 기준이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것을 보장할 수 없다. 그리고 구글이 손대는 모든 영역에서 다른 주체가 개입할 수 없도록 적극적으로 손을 썼거나 암암리에 포기할 수밖에 없게끔 유도했던 전례 등을 고려할 때, 지금의 미술제도 및 권력구조가 현격하게 다른 변화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 저자는 지적 체계의 보존과 전달을 위한 공공프로젝트인 ‘인간 지식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쉽게 말해서 지금 구글북스와 구글스칼라가 하고 있는 일을 책임감 있고 선한 공적 주체가 더 유능하고 민주적으로 해결해 나감으로써 민간 권력의 비대화를 견제하자는 것이다. 마치 제2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건설하자는 것처럼 들려서 현실성은 떨어져 보이지만 지식 유산의 공적 책임을 강조한다는 면에서는 공론화의 가치가 있다. 물론 여기서 공적 기구가 얼마나 유능하고, 선하고, 무엇보다도 의욕적일 수 있겠는가라는 회의는 차치한다(나아가, 도대체 선한 것은 무엇인가?). 하지만 미술계로 시선을 돌려보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여기서는 허무맹랑한 주장조차도 전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그나마 참고할만한 논의: 정필주).
미술사와 비평사를 돌이켜 보면, 미학적 주도권은 신(을 업은 사람), 권력자, 후원자, 예술가, 비평가, 미술관, 컬렉터, 그리고 ‘머니머니해도 머니’ 사이의 권력투쟁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이 주도권이 어마어마한 서버 안의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넘어갈 수 있다. 무언가를 무대의 한 가운데 노출시키는 행위는 동시에 다른 무언가를 무대에서 끌어 내리는 행위와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운데에 놓인 현 상태를 바라볼 뿐, 그것에 거기에 어떻게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동적인 계보학을 작성하지 않고, 심지어 그 계보학을 읽지도 않는다. 하지만 들뢰즈가 강조했듯, “무언가의 가운데 선다는 것이 어떤 것의 중심이 될 수 없다.” 그것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구글이 미학적 주도권을 거머쥐게 될 때, 인류가 미적 정당화를 위하여 그동안 쌓아 올린 무수한 논리의 성벽은 하루아침에 먼지무덤이 될 수도 있다. 과거의 성벽은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적이며 회귀주의적인 것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적어도 그것은 하나의 평가에 대하여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를 우리에게 설명해주었고, 선택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해주었다.
물론 나는 구글이 미학과 비평을 잠식하는 날이 내 생전에 오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인간이 감각적 실체를 육체로 지각하려는 욕망은 과소평가되어왔으며, 로봇이 육체를 대신하는 날에도 여전히 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이 적기다. ‘미술에 관한 정보’와 ‘정보화된 미술’을 누가, 어떻게 수집하고 전시할 것인가? 미술계 안팎에 발을 걸친 모두가 이 질문에 대하여 자기만의 답을 내려야 하고, 그 답들은 공론장 구석구석을 나뒹굴어야 한다.

- 덧붙이는 말: 나는 이 책에서 저자가 지나치게 중립성을 의식한 나머지 신랄함이 떨어졌다는데 대해 대단히 실망했는데, 그 이유를 감사의 글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구글 현직자 7명이 저술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더 처절한 비판이 필요하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