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난지 교수 제자 17인의 「키워드로 읽는 한국 현대미술」

작년에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한 미술사학자 윤난지 교수의 제자들이 쓴 논문들을 재탕삼탕으로 엮은 책이다. 윤난지 교수의 제자들로 구성된 현대미술포럼이라는 사조직에서, 지도교수의 정년퇴임을 기념하면서 헌정하기 위하여 각자 이런저런 글들을 제출했다. 시장영합적인 제목에 혹해 내용을 자세히 보지 않고 구입했는데, 기존에 발표된 논문이나 에세이를 주제별로 짜깁기한 책이라 다소 당황스러웠다. 물론 각자 독특한 학습배경과 논지를 지닌 연구자들이 나름대로 고심 끝에 선별한 주제와 글쓰기이니만큼 하나씩 뜯어보면 배울 점은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의미 있는 앤솔로지로 지도교수의 퇴임을 기념하기 원했다면, ‘윤난지 외’라는 저자명이 부끄럽지 않게 지도교수에게도 모종의 압박을 가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챕터별로 윤난지 교수가 서문을 쓰면서 큰 그림을 개관한다던가, 하다못해 전체 서문이라도 맡아주어서 제자들의 연구 성과를 더욱 정교하게 맥락화 했어야 한다. 이를 통해 각 연구가 한국현대미술을 조망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미술사적, 혹은 비평적으로 기여하는지를 보여줬어야 한다. 수천수만 건의 학술정보에 클릭 몇 번이면 무제한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오늘날, 17개의 논문을 다섯 개의 키워드로 나누어 최고급 인쇄용지로 반들반들하게 찍어낸들 거기서 무슨 새로운 통찰이 튀어나오겠는가?

한국 현대미술의 독특한 전개를 살펴보기 위한 다섯 개의 관점을 제시하였는데, 하나같이 거의 국제표준에 해당하는 닳고 닳은 키워드이다. 그래도 개별 연구 수준에서는 의미 있는 대목들이 꽤 있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추상미술이 전개된 흐름을 살펴본 권영진의 연구가 그러한 예인데, 여기서는 국전이 사실주의적 아카데미즘의 축제였다는 기존 견해를 정정하면서 추상미술이 간과되지 않았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아예 아카데미즘적 기반이 없던 우리 미술계에서 추상미술을 적극 권장했던 풍토를 강조하며, 이는 서구권에서 볼 수 없는 국가주도형 아방가르드의 면모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흥미로운 견해를 내놓았다. 이러한 분석은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독자적인 발전면모 중 하나로 눈여겨 볼만하다. 또한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추상미술이 출품된 현황을 시계열적 통계로 제시하였는데, 이처럼 기술통계적 접근을 통해 미술사를 서술하는 방식은 앞으로 새로운 방법론으로서 적극적으로 실험해야할 영역이라고 본다. 나아가 사회과학적/계량경제학적 연구방법론을 적용한 미술사 서술도 충분히 가능하며, 이러한 시도들이 ‘미술사의 과학화’를 비약적으로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품게 된다.

정찬승이나 최욱경 같이 다소 간과되었던 경계인들의 삶과 예술을 조명한 부분도 의미 있었다. 정찬승은 제4집단을 주도하며 한국 미술에서 퍼포먼스의 확립에 기여했고, 체제에 저항하는 실천적 예술인이었으며, 회화에서부터 정크 아트까지 온갖 매체를 실험한 선구자였다. 이제라도 그의 국내외 행적들을 소상히 밝히는 연구와 전시가 이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최욱경은 추상표현주의자, 여성, 유학파, 작가, 교육자, 이론가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로지르며 독특한 행보를 보였다. 동시대의 여명기에 표현, 젠더, 국경의 이슈를 살펴보기 좋은 열쇠가 될 것이다. 양혜규의 작품세계를 뒤라스의 여성적 글쓰기와 연계시킨 전유신의 논문도 페미니즘 관점에서 신선한 주제였는데, 사실 여성의 고유한 특징이나 성질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여기서 지지하고 있는 여성적 글쓰기는 결국 차이의 페미니즘이라는 한 갈레의 길이며, 균형 잡힌 조망을 위해서 놓치지 말아야 할 지점이다.

한 스승을 중심으로 모인 학맥인지라 관점은 어느 정도 동질하다. 그래서 특별히 튀는 구석은 없다. 하지만 여러 저자가 써 모은 글들이 대게 그렇듯, 실력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곤 한다. 현영란이 서울시 창작공간에 대하여 쓴 글은 구성과 논리가 형편없다. 일반론과 사례가 뒤섞여 있고, 정책적 대안은 이상주의로 귀결된다. 저자는 창작공간 지원이 목표하고 있는 지역재생이 현장에서 상충하면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지적하며, 보다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지원을 갖출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예술인 다수를 위한 보편적이고도 안정적인 지원도 중요하지만 정책적 목표도 중요하다. 창작지원에 참여하는 예술인들이 창작지원의 목표인 지역재생을 원치 않는다면, 애초에 그런 지원 프로그램에 지원하지 말았어야 한다. 정책 취지에 공감하면서 참여작가로 선정되었다면, 정책적 목표에 부합하는 실천과 성과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지역재생이라는 상위 정책 목표에 동의하지 않고, 실천도 하고 싶지 않다면 창작공간 지원도 안 받는 것이 옳다. 물론 지역재생과 창작공간 지원이라는 정책 목표가 상충한다면 일차적인 책임은 정부에 있다. 애초에 정책 설계가 부족했거나 실행 과정에서 지원 대상 및 프로그램을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았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참여 작가들에게 면죄부를 주면서 그들의 수요에만 맞춰서 정책을 설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공적 재정이 투입되는 예술지원사업은 어쩔 수 없이 공공의 목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예술가들이 그것을 몰랐다면 무식이요, 알았는데 피했다면 기만이다.

공공미술제도에 대한 지적은 박소현의 논의가 더 설득력이 있다. 박소현은 미술제도에 공권력이 깊숙이 개입되면서 미술제도가 어렵게 쌓아 온 자체의 논리가 부서지고, 예술가의 권리가 박탈되고, 급기야 검열과 통제가 횡횡하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정확히 지적했다. 원작자로서 작품의 진위를 감정하는데 있어서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 천경자와 이우환의 사례는 동시대 미술계의 가장 큰 비극이며 블랙코미디다. 여기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조영남 대작 논란’이 보여주었듯, 미술계의 문제를 미술계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서 법정으로 끌고 들어가는 상황은 다시금 미술제도 전반의 존립을 위태롭게 만든다. 미술사와 미술비평사가 쌓아온 지혜는 그렇게 얕거나 불비하지 않다. 미술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들은 그 지혜로 극복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을 제 멋대로 해석하고 자기중심적으로 갖다 붙이는 개인 또는 이해집단이 늘 문제가 된다. 그들 때문에 미술제도는 테두리 바깥에 있는 법정을 찾을 수 밖에 없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완벽한 미술제도란 없지만, 그래도 미술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지 여부는 성숙한 공동체와 그렇지 않은 공동체를 구분하는 최소한의 잣대가 될 수 있다.

끝으로, 이지언의 글은 논지와 구성은 물론이거니와 문장 하나하나가 형편없다. 최선을 다한 결과라면, 절필을 권한다.

진짜 끝으로, 맨 끝에 수록된 윤난지 교수의 에세이는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볼만 하다. 책값 3만원이 없으면 서점에서 이 부분만 발췌해서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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