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예술에서 회화의 왕좌가 찬탈당한 역사는 어느덧 반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진부한 수사(rhetoric)가 됐다. 테리 스미스(Terry Smith)는 1970년경 이후로 어떤 경향도 시각예술에서 지배적 양식이 될 정도의 두각을 나타낸 적이 없다고 했는데, 여기서 ‘경향’을 ‘매체’로 바꿔 써도 이질감이 없다. 수많은 갤러리들과 경매장에서는 여전히 거래의 중심에 서 있지만, 보도지면을 장식하는 각종 비엔날레, 미술상, 블록버스터 전시에서 미디어와 개념미술을 걷어 내면 남는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다매체의 나열을 넘어 이종 매체의 횡종연합을 논하는 오늘날, 회화의 마지막 보루들은 그 견고한 뚝심을 칭송받는 시대가 됐다. 이러한 칭송에는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데, 추상표현주의의 거센 파도가 몰아친 20세기 중후반에 묵묵히 재현을 고집한 일부 예술가들도 비슷한 찬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 회화의 구도자들이 받는 찬사는 20세기 중반의 사실주의자들에게 헌정된 그것을 21세기 버전으로 복원한 것이다. 두 버전 모두 일견 공정성을 기하려는 시도 같지만, 그 이면에는 마치 계승자가 없는 무형문화재를 박제하려는 것 같은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기본적으로 박제란 생명력의 흔적을 기억하기 위하여 남은 생명력마저 말소하는 행위이다.
이채은이 송은아트큐브에서 선보인 13점의 작품은 회화의 가능성을 실험하면서 그 생명력을 이어가기 위한 시도이다. 만만치 않은 규모의 ‘그려진 콜라주’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여기서는 TV뉴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세계명작동화 삽화, 미술사 교과서급 명작 등 온갖 출처를 통해 스쳐간 이미지들이 두서없이 재배치됐다. 알레고리적 도상들은 추상적인 공간을 부유하다가 우연히 한 순간에 그곳에 정박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러한 우연성은 누구에게나 하나쯤 있게 마련인 묘한 경험을 상기시킨다. 그 경험이란 유년기에 우연히 뇌리에 박힌 이미지 하나가 오랫동안 장기기억 저편에서 동면을 취하다가 일상적 한 순간의 자극을 통해 밑도 끝도 없이 줄곧 소환되는 현상이다. 비례감도, 맥락도, 서사도 거세된 화면 속 개체들은 꿈속에서 본 풍경을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몽상으로의 도피보다는 우리가 속한 시공간에 단단히 결속되어 있다는 점이 점차 분명해진다. 사실 우연한 배치는 쉬울지 몰라도 우연을 가장한 배치란 절대 녹록지가 않은데, 이채은은 감독석에 똬리를 틀고 앉아 우연을 연기하는 배우들을 효과적으로 지휘한다. 모든 우연한 가능성을 한 순간에 고정시키고 그 전후 사정을 관람객에게 맡기는 것은 회화가 지금까지 잘 해온 일이며, 앞으로도 해내야 하는 일이다.

돌림판을 돌려서 지정된 색을 사지로 짚어내는 트위스터 게임, 고등학생들의 합창, 버려진 구도심과 역사적 기념비의 대치, 화염에 휩싸인 순교자, 키치로 가득한 유원지 등은 작가가 애착을 보이는 소재이다. 이 소재들은 공통적으로 잊혀진 것들에 대한 가치를 복기하고, 잠재된 목소리를 수면위로 증폭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평온한 풍경에 내재된 공포를 상기시키면서 역사의 흐름 속에 정당화된 자연스러움을 재검토하는 것이 대의명분이라면, 작가가 선택한 소재들은 그 핵심을 돌파하기 보다는 에둘러 빗겨가고 포위하는 전략적 도구들이다. 여기서 은유를 달성하기 위하여 전유하고 있는 인물상들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화폭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보인다는 점은 확실히 아이러니한 유희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직설적 화법의 은유다. 작가는 관객과 의미의 줄다리기를 제안했고, 도상들의 정치적 의도는 철저히 숨겨놓았다. 다만 어딘가 정치적일지 모른다는 심증만이 전시장을 감도는데, 그 정치학 교재의 세부 챕터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일지는 각자의 불만과 이상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결정될 것이다.

<합창(2019)>에는 강당에서 리허설을 하고 있는 고등학생들의 화기애애한 시간에 비밀스러운 존재들을 심어 놓았다. 얼굴을 가린, 혹은 가려진 인물의 의문스러운 행동이 일상에 스며든 공포를 암시한다. 나날이 위세를 더해가는 ‘디지털 판옵티콘’에 귀속된 우리가 무언가에 몰입한 모든 순간은 한편으로 우리 자신이 몰입의 대상이 될 여지를 남긴다. 응시는 주체와 권력의 문제에 긴밀히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대상화의 우려를 떨칠 수 있는 순간은 없다.

<거울 속의 거울(2019)>은 현대사회의 지리멸렬한 갈등과 대립이라는 식상함을 고전적 도상으로 희석시키고 있다. 카라바조(Caravaggio)의 <도마의 의심(1601-1602)>은 아무런 맥락도 없이 현대적 콜라주에 뒤섞였는데, 예수의 제자 중에는 우리와 닮은 동시대인도 새로 영입되어 있다. 도마는 예수의 부활에 관하여 콧방귀를 끼며 자신이 직접 그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찔린 상처를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며칠 후 예수는 제자들이 모인 다락방에 찾아와 도마로 하여금 그 상처에 직접 손을 넣어보게 한다. 그리고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요 20:29)”라는 명언을 남긴다. 오늘날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해보면, 보고서야 비로소 믿는 도마는 오히려 인간적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이 속아서, 혹은 그저 불편하다는 이유로 진실을 거부한다. 이 지점에서 화면 속 무지개도 연결된다. 일반적으로 퀴어를 은유하는 무지개는 폐허가 된 구도심에서부터 역사적 기념비까지 곳곳을 잠식했다. 무지개가 화면 밖으로 분출하고 공권력이 이를 애써 막아내고 있으나 역부족으로 보인다.
오른쪽의 초록색 옷을 입은 여성은 80년대 극장간판에서 튀어나온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 극장간판을 맡았던 ‘키치의 장인’들은 하나같이 나름대로 사실주의의 대가들이었는데, 멀티플렉스 시대의 도래와 맞물려 붓을 놓고 이름도 없이 사라져갔다. 이들이 모두 돌아가시기 전에 다시 발굴하여 동시대 미술에 맥락화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전시의 거의 마지막쯤에 <열린 상처(2019)>라는 소품이 자리하고 있다. 당연히 <도마의 의심>과 대구를 이루는 부분이다. 이제 상처는 도마가 아닌 우리를 향해 열려 있다. 손을 넣어볼지 여부는 우리에게 달렸다. 예수가 도마의 팔목을 붙잡아 상처로 가져갔던 것과 달리, 지금 이 순간 우리의 팔목을 붙잡는 손은 그 어디에도 없다. 진실에 다가서는 일은 그 진실의 일정 부분을 책임지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선택은 스스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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