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전시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최고의 큐레이터들이 답하다」(폴라 마린콜라 엮음)

What Makes A Great Exhibition? Edited by Paula Marincola

폴라 마린콜라(Paula Marincola)가 주도하는 필라델피아 전시지원계획(Philadelphia Exhibitions Initiative)의 일환으로 좋은 전시의 조건에 관한 질문이 던져졌고, 13명의 전문가가 이에 응답했다. 전문가들은 나름대로의 경험과 지식에 의거하여 본질, 장소, 구조, 배치 측면에서 위대한 전시에 관한 생각을 나눴다.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는 와중에 위대함과는 정반대에 놓인 전시를 보게 되었다. 그 결과, 책장을 덮을 때쯤에는 내가 전시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견해들이 옳았다는 사실을 더 확신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물론 확증편향의 위험성을 내포한다. 하지만 어차피 예술을 논하는 것은 객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자연과학과 달리 편향된 아름다움을 논증하는 과정에 가깝다. 그러니 좋은 전시에 대한 생각은 누구나 가질 수 있고,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이 사회의 미적 풍요로움을 위해 적극 권장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두 가지를 제안한다.

1. 교육의 강박을 버려라.

전시는 예술과 삶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풍성한 담론을 이끌어내는 대화의 장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작가, 기획자, 관람객이 예술을 매개로 자아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을 창출해내는데 주력해야 한다. 총체로서 경험은 텍스트를 타고 스며드는 정보의 흐름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다. 예술은 우리의 육체와 정신이 평상시에 작동하던 굴레를 확장하거나 무너뜨릴 수 있다. 쳇바퀴 도는 일상 속에서 사실상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자연과 예술뿐이다.

앞선 글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우리는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의 이성중심적 합리주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고, 사회계급의 상층부로 진입하기 위한 도구적 지식을 신봉하는 경향이 만연해졌다. ‘아는 것이 힘’이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보편적인 믿음은 미술 담론에서도 역시 팽배하며, 반복적으로 재생산된다. 하지만 관람객을 가르치려 드는 전시는 우발적인 경험의 가능성들을 말살한다. 관람객의 발걸음과 사고를 단일한 방향으로 흐르게 하며, 다른 감각과 대안들을 검토하지 못하게 만든다.

교육에 대한 강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전시 도구가 월텍스트와 오디오가이드다. 이 책의 마지막 에세이에서 잉그리드 샤프너(Ingrid Schaffner)는 월텍스트의 역사와 기능에 대하여 잘 정리했다. 텍스트는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훌륭한 보조자료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작품을 압도하려 드는 순간, 작품은 역사의 거대 서사에 귀속된 하나의 도판 내지는 사료로 전락한다. 월텍스트는 답을 내리는 법관이 되기보다 차라리 의미 있는 질문 하나를 던지는 역할에 그쳐야 한다.

오디오가이드는 그것이 떠드는 작품과 입을 다무는 작품이 분리된다는 점에서 부당한 위계의 구조를 창출한다. 또한 우리의 지각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청각을 독점함으로써 작품과 나 사이의 온전한 교감을 흐트러뜨린다. 마치 눈치코치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소개팅 주선자와 같다. “오디오가이드는 관람자가 눈을 사용해야 할 때 귀에 단어를 집어넣음으로써 관람자의 집중을 점유하는 불공평한 경쟁을 이끌었으며 이로 인하여 전시회의 독이 되어 왔다.”는 로버트 스토(Robert Storr)의 과장법을 가슴에 새기자(31p).

물론 작품을 둘러싼 지적인 정보들을 원하는 관람객들이 있다. 모든 전시가 그들의 기대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니 정보제공이 예술적 경험을 창출하는 과정을 퇴색하지 않을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대다수의 (큰) 전시들은 이미 지적인 관람객들을 위해서 둔기에 가까운 육중한 도록을 준비하고 있고, 정보제공은 사실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 문제는 그 도록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 소장가치가 있는 기존의 도록과 알찬 정보만을 엑기스로 축약한 문고판 도록을 동시에 내놓는 방법은 어떨까? 그렇다면 관람객들의 지적 욕구는 물론이거니와 수집욕구와 지갑사정까지도 배려할 수 있다(미술관의 지갑사정은 일단 차치하고). 하지만 그보다 더 지적인 관람객에게는 사실 도록조차도 필요 없다. 그들에게는 이 전시에서 어느 작품을 보았으며, 그것이 자신에게 어떠한 생각과 감각을 상기시켰는지가 중요하다. 생명력 없는 비평용어와 일관성 없는 찬사로 점철된 도록 같은 것은 애초에 필요치 않다. 무슨 작품이 있었는지만 기억하면 족하다. 그렇기에 제안하건데, 기본으로 제공하는 마케팅용 브로셔 외에 전체 전시 작품 리스트가 추가되어야 한다. 내가 일본에서 관람한 대부분의 규모 있는 전시에서는 A4 용지 한 장에 전체 작품 리스트를 제공하고 있었고, 그 자료는 추후 개인적인 탐색과 학습 과정에서 엄청나게 유용했다. 왜 그런 간단한 자료조차 제공하지 않으면서 전시장 벽면에는 온갖 텍스트로 똥칠을 해대는가? 작품 리스트 하나만 제대로 쥐어주어도 궁금한 정보는 관람객이 나중에 얼마든지 스스로 찾아 볼 수 있다.

2. 미술관에서 영상을 퇴출해야 한다.

이미 디지털미디어, 영상, 설치,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결합된 무언가가 동시대 미술 담론을 지배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런 시대착오적인 주장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기본적으로 영상을 위한 공간적 틀이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이 책에서는 마크 내시(Mark Nash)가 ‘실행의 문제들’이라는 제목으로 영상 큐레이팅과 관련한 이슈들을 설명하고 있다. 영상을 전시하는 상황에서 붉어졌던 여러 가지 기술적 문제들과 그것을 극복했던 선도적인 사례들이 이어진다. 그런데 이 글을 다 읽고 나니 ‘미술관에서 영상을 퇴출해야 한다’는 나의 과격한 주장이 수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굳어진다. 이 모든 역경을 딛고 영상을 전시해야 할 이유가 대관절 무엇인가?

내가 말하는 미술관은 어디까지나 지금 우리가 기준으로 삼고 있는 근대적 미술관이다. 루브르가 그 초석을 마련하고, MoMA가 화이트큐브라는 모범을 제시하였으며, 이후 포스트모던을 거쳐 여러 가지 실험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도권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바로 그 미술관이다. 애초에 이 미술관은 영상을 위하여 설계되지 않았다. 이젤 회화와 조각, 그리고 제한적인 설치 작업을 염두에 두었으며, 이후 발전을 거쳐 낮은 수준의 인터랙티브 아트까지 수용할 수 있게 된 공간이다. 이 공간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영상이 계속적으로 침투했으며, 일부는 성공적인 평가를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영상은 여전히 이 공간의 중추로 들어오지 못하고 벽체와 기둥 사이에서 겉돈다. 그 분투의 과정은 내시의 에세이에 기록된 그대로다.

미술관에서 영상을 퇴출해야 하는 이유와 대안은 내가 <올해의 작가상 2018> 展의 리뷰에 남겼던 댓글로 갈음한다. 이후로도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이 전시는 영상이 오늘날 미술 담론을 지배하지만, 여전히 물리적 공간에서는 겉돌고 있다는 아이러니로 기억된다.

장황한 댓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즉, 여러 영상의 선형적 재생을 한 공간에 나열한 방식은 근대적 미술관의 시공간에 부합하지 않으며, 관람객의 자유로운 비평적 개입을 무력화시킨다. 가까운 미래에 영상 예술가들은 그들만의 안식처를 찾아야 하며, 아마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흘러갈 것이라 예측한다.

현재의 미술관은 이렇죠. 작품들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고 관람객은 그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합니다. 우리의 시각적 지각 능력은 놀라워서, ‘공간의 예술’을 거의 1초 만에 온전히 파악합니다. 거기 무엇이 있고, 어떻게 생겼고, 어떤 느낌을 주고,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직관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어떤 작품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반대로 어떤 작품에는 오랜 시간 동안 그 구성요소 하나하나까지 곱씹어볼 수 있죠. 그것이 우리가 그동안 근대적 미술관에서 누려온 일말의 권력이었습니다. 그 공간이 우리의 동선을 제아무리 호도할지라도 우리는 나름대로의 시지각적 역량으로 빠르게 탐색하고 나름대로 방향을 결정할 수 있었죠. 하지만 지금 미술관을 메우고 있는 ‘시간의 예술’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것의 재생, 정지, 되감기, 빨리감기, 다시보기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틀어준 대로 보는 것이고, 그 안에 어떤 아름다움이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전체 러닝타임 이상의 시간을 할애해야만 합니다. 하나의 영상을 완전히 다 보고 다음 영상으로 넘어간다고 한들 그 영상이 나를 기다렸다가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죠. 우리는 다시 첫 부분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리거나, 우리가 시작한 부분이 다시 반복될 때까지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시간의 예술’이 ‘공간의 예술’을 위해 설계된 세계로 침투함에 따라 겪어야 하는 불편이죠.

해석을 어떻게 하던지 간에 어쨌든 관람객 입장에서 ‘틀어준 대로 본다’는 한계에는 변함이 없죠. 게다가 보통의 관람객에게는 하나의 전시에 쓸 수 있는 시간이 대체로 정해져 있습니다. 간혹 어떤 전시는 영상물의 전체 러닝타임을 합하면 몇 시간을 훌쩍 넘기기도 하는데, 도대체 누가 하나의 전시에 그 정도 시간을 쓸 수 있단 말입니까? 누군가는 저에게 “보기 싫으면 중간에 일어서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보지도 않고 그 안에 어떠한 아름다움이나 사유의 가치도 없다고 절하하는 자는 비평의 자격도 없는 겁니다. 결국 비평가로서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보여주는 대로 보아야 하고, 건너뛰지 말아야하고,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관을 점거한 영상물들은 하나의 폭력으로 다가옵니다. 작품과 작품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던 영혼은 시간의 덫에 갇혀서 옴짝달싹 못하게 되어버렸죠. 어찌 비극이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영상이 오늘날 미술의 진정한 대안이며, 새로운 주류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그 대안을 위한 대안적 공간 설계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QR코드를 관람객에게 배부해서 해당 IP로만 접속할 수 있는 유튜브 URL을 주는 방식은 어떨까요? 아니면 좀 더 작고 개인화된 미디어를 제공해서 관람객이 스스로 재생 전반을 컨트롤 할 수 있게 해주던지요. 헤드마운트 디스플레이를 모두에게 배부할 수도 있겠죠. 재원만 받쳐준다면. 하여튼 언제 어디서나 HD영상을 마음대로 볼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꼭 근대적 미술관이라는 시대착오적인 공간에 갇혀서 오가는 관람객 사이에서 영상을 봐야하는 걸까요? 우리 모두가 함께 생각해 봐야할 문제이며, 영상이 주류 매체로 급부상하고 있는 지금, 매우 시의적절한 주제가 될 것입니다.

– 미술관에서 영상을 퇴출해야 하는 이유에 관한 댓글(2018.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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