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짜리 제주정신
제주도를 찾으면 일정이 촉박하더라도 제주도립미술관을 꼭 들른다. 안도 다다오 풍의 모던한 노출 콘크리트 외관을 즐기는 맛도 있지만 제주도 미술담론의 현 주소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가장 크고, 예산이 많고, 권위적인 하나의 제도권 기관이 그 지역의 미술담론을 대표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아무래도 개관 10주년을 맞는 제주도립미술관은 도내 미술담론에서 그 상징성이 크다. 뜨내기 관광객의 얄팍한 흥미에 소구하는 관광코스로서의 엔터테인먼트형 박물관들과 인근 주민조차 존재 여부를 모르는 군소 갤러리들로 양분되었던 척박한 제주도의 문화예술 토양을 감안할 때, 제주도립미술관의 개관에 걸었던 지역 미술인들의 기대는 그야말로 지대한 것이었다. 제주도립미술관이 선보이는 전시와 작품들이 그 모든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공공 재정으로 운용되는 기관으로서 최소한의 책임성은 담보할 필요가 있다. 미술가가 작품으로 말하듯, 미술관은 전시로 말한다. 그러니 전시를 보자.

이번 전시는 제주도에서 태어난, 혹은 제주도에서 활동한 작가 99명의 작품들로 채워졌다. 1층은 60년대부터 82년까지 출생한 젊은 동시대 작가들로, 2층은 59년생까지의 선배 원로작가들로 나뉘었다. 선배들을 2층으로 올린 것은 바람직한 선택이다. 선배들을 1층에서 보고 2층으로 올라갔다면, 우리는 부득이 그들이 오늘날 제주도 미술의 절대적 근간인 것처럼 착각하기 쉬웠으리라. 마치 백화점 1층에 견고하게 자리매김한 에르메스를 보고나서 그 위층 잡화 코너로 올라가면 모두 에르메스의 아류로 보이는 것처럼. 물론 2층 앞에 제주도미술사연표를 배치함으로써 원로 작가들을 미술사적 계보학의 중심에 놓는 작업을 시도하기는 하나, 1층에서 신선한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 이미 공감하며 올라간 이후인지라 그 미술사적 구속력은 다소 희석된다.

작가가 많은 만큼 ‘1작가 1작품 원칙’으로 단순 나열될 수밖에 없었고, 부득이 아트페어 같은 느낌을 준다. 다양한 표현과 감각을 한 자리에서 즐길 수 있는 아트페어형 구성이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아트페어형 큐레이션은 문제가 된다. 적어도 여기가 제주도 미술계에서 가장 목소리 큰 제도권 기구라면 말이다. 아트페어형 작품들이 아트페어형으로 벽에 달라붙은 전시를 굳이 도립미술관에서 기획할 필요는 없다.
이 전시를 아트페어라고 느껴지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은 당연히 출품된 작품들에 있다. 작품들은 아마도 누군가의 주도면밀한 기획과 유도에 의하여 제주도가 당면한 사회적 문제들과 철저히 괴리되었다. 제주도와 인연을 맺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답게 지역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향토적 정경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야말로 잘 팔릴 것 같은 작품들이다. 전시 서문은 “작가 99명을 초대하여 제주의 예술정신을 최대한 넓게 조망하고자 했”다고 밝혔는데, 이러한 탈이데올로기적인 풍경화와 풍속화 들만이 그 넓은 조망의 최종 결과물이라면 그야말로 그릇된 탐색이다. 제주도의 작가들은 그간 도민들이 직면한 사회/문화/정치적 문제들에 대하여 꿋꿋이 목소리를 내왔고, 그 목소리들은 예술 본연의 힘을 입어 남해를 건너 더 넓은 공동체로 퍼져나갔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우리는 강정마을 주민들과 4.3유족들에게 미술이 어떠한 독특한 공헌을 해왔는지 잘 알고 있다. 또 최근 부각되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 오버 투어리즘, 난개발, 그리고 환경문제에 투신하고 있는 이름 없는 작가들의 헌신에 대한 소식들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재작년에 바로 이 장소에서 열렸던 첫 번째 「제주비엔날레」도 이미 그 주제를 다루지 않았나?

전시명이 담고 있는 99라는 거의 꽉 찬 숫자가 암시하듯, 이 전시는 최대한 많은 작가들을 어거지로 퍼 올리다시피 미술제도의 가장 안락한 궤도에 밀어 넣었다. 이러한 접근은 제주도의 모든 미술경향을 아울렀다는 부당한 낙관주의를 선사하는데, 만약 제주도 미술의 진짜 폭넓은 결과물들을 미처 접해 보지도 못한 관람객들이 이것이 전부인 마냥 거짓 배부름을 안고 집으로 돌아간다면 그야말로 문제가 된다. 거짓 배부름은 진짜 영양가 있는 음식들을 먹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 그러니 나중에라도 각자 그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도록, 이 전시가 모두를 아우르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

나는 이 전시에서 선별/배제가 작동한 대상이 작가인지 작품인지 알지 못한다. 대체로 둘 다이겠지만, 작품 쪽에 더 긴밀하게 작용했으리라. 왜냐하면 사회적 현실을 이야기하는 작가를 다 배제했다가는 99명을 채우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80년대 후반부터 제주도의 역사적 현실에 대해서 기록했고, 「제주민중항쟁사」 展이라는 개인전을 열었으며, 4.3사건을 다룬 화집 <동백꽃 피다>를 발간한 강요배 화백은 <운광(2019)>을 출품했다. 저녁 어스름의 진녹색 어둠에 달빛을 받은 황금빛 구름이 춤추며 역동하는 아름다운 화면이다. 자연이 빚어내는 예술적 추상화의 한 장면을 섬세하게 포착한 관록이 느껴진다. 우리가 잘 알고 있던 강요배의 작품 세계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장식적인 그림이다. 그가 이 작품을 내기 원했는지, 아니면 누군가 추천 내지는 지목한 것인지 알 길 없지만, 이 아름다운 회화는 이번 전시가 추구하는 모더니즘 미학을 잘 대변해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모더니즘의 축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표상하는 방식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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