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진실성
디지털 시대에 연필로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흑연심으로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쓰는 문장은 키보드로 후다닥 쓴 문장과 다른가? 단지 쓰는 속도가 느리다는 이유로, 그리고 ‘CTRL+Z’가 없다는 이유로 연필로 쓴 글이 더욱 신중하다거나 사색적이라고 포장할 수는 없다. 붓으로 쓴 글이라면 몰라도, 키보드와 연필은 그 정도로 멀지 않다.
저자가 제목에서 연필을 강조한 까닭은 ‘몸’에 대한 굳건한 믿음 때문이다. 이 산문집 전반에 걸쳐 몸은 가장 진실한 대상으로서 표상되고 있다. 몸은 합리주의와 이성중심적 사고방식이 가져온 온갖 병리적 문제들에 대한 대안이다. 윤색된 정신, 이론, 용어, 철학, 수사 따위와 다른 무언가다. 진실의 이정표이자 처방전이다. 김훈은 온 몸으로 오이지를 맛보고, 똥냄새를 맡고, 눈을 치우고, 철새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그 모든 감각의 시간들을 통해서 내면과 세계의 진실을 엿보고자 한다. 그가 발견한 진실은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로 제시된다. 연필을 견고하게 손에 쥐고, 쓱싹거리는 종이와의 마찰을 느끼며 써내려간 글은 물리적 움직임과 피드백이 극대화된 발언의 형태다. 연필은 김훈의 연장이고, “연장은 몸의 연장(延長)이다.”(308) 그러한 의미에서 김훈은 자신의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를, 뱃사공의 노를, 월드컵 경기장의 축구공을, 박재권 중사의 M1 소총을 닮기 원했다.
1부는 내면적 감상들에, 2부는 우리나라의 역사적·동시대적 이슈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 차이는 희미하다. 저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안타까운 희생에 대한 추모와 연민, 그리고 미처 풀지 못한 매듭들에 대한 회환으로 가득하다. 그는 계속 ‘알지 못한다’며 겸양의 자세를 내비치지만 반복하는 질문들을 통해 우리의 눈길이 한 곳에 가 닿기를 바라고 있다. 그곳에는 한반도라는 울타리 안에서 시공간을 초월한 연대의식, 역사 속에서 간과된 자들의 목소리, 상식이 통하는 세상, 위기의 전환, 무엇보다도 더 이상 그 누구도 피 흘리지 않는 세상이 있다. 작금의 세태를 보면 그런 세상이 속히 오리라고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모두 같은 마음이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또한 모두 알고 있다. 지리멸렬한 대립과 반목 가운데 몸과 자연에서 답을 찾으려는 저자의 노력은 온당해 보인다. 그것들은 예측할 수 없을지언정 배신하지는 않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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