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Berger, Understanding a Photograph
“나는 내가 본 것들을 말로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181p
존 버거(John Berger)가 평생에 걸쳐 해온 일을 생각하면 이보다 더 적합한 자기소개는 없다. 그는 미술평론가라는 경직된 호칭보다는 그저 본 것을 말하는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꾼으로 남고 싶어 했고, 이 머나먼 땅에서도 그의 책들이 줄줄이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바람은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다. 나는 버거의 자기소개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남짓 흘렀을 뿐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세상은 그가 살았던 당시와 전혀 다른 모습인 듯하다. 모든 이미지가 유튜브가 빨아들인 동영상들로 재편되고, 모든 소통이 나르시즘적 인스타그램을 매개로 파생되는 동시대를 바라보며 존 버거가 어떠한 이야기를 전개할지 궁금해진다. 아마 그가 지금 살아 있더라도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 대한 소회를 밝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존 버거와 동시대의 격차는 벌어지고 있으며, 그의 생전에도 이미 그러하였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는 젊은, 새로운 존 버거가 필요하다. 섬세하고 따뜻한 눈과 아름다운 말들이 필요하다.
존 버거가 사진에 대하여 쓴 글 24편을 제프 다이어가 엮었다. 형식은 일반적인 에세이에서부터 인터뷰, 서신, 비평문, 전시 및 도록 서문 등 다채롭다. 몇몇 글들은 이미 한국에서 번역된 에세이집들에서도 소개 되었던 터라 이 책에서 다시 만난 셈이다. 역자는 이전에 출간된 번역서들과 상관없이 새로 번역했다고 밝혔는데, 내가 몇 권의 책을 비교해보니 이 책에서의 번역이 훨씬 낫다. 인터뷰와 서신이 가장 흥미를 끈다. 이 글들에는 존 버거의 정제되지 않은 생각들이 잘 담겨 있다. 평소 그의 글에서도 완결성 있는 짜임새 보다는 즉흥성과 파편성을 강조하기는 하나, 역시 직접적인 대화와 서신이 보여주는 열림의 정도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와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 답을 듣기 보다는 질문을 받고 싶다.
여러 글들을 읽다 보면 존 버거의 일관된 사진론이 서서히 떠오른다. 무엇보다도, 사진은 무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진은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장면이 의미 있을 것으로 판단한 사진가의 선택에 의하여 포착된다. 포착은 배제와 사실상 같은 말이다. 사진의 사각프레임에 담긴 이미지는 그 바깥 공간보다 중요한 무언가다. 선택된 무언가는 그것이 상대적으로 중요하고 주목할 만하다는 분명한 의도를 건넨다. 이러한 의도가 사진이라는 매체 고유의 특성과 결부될 때 큰 힘을 발휘한다. 사진은 대상에 반사된 빛을 찍어낸 이미지다. 사진은 특정한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장 정확히 담아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무리 재현적인 그림이라고 할지라도 그 이미지에는 부득이 붓을 쥔 사람의 해석이 결부되지만, 사진은 그 해석을 기계가 대신한다. “사진은 외양들을 번역하지 않는다. 사진은 외양들에서 인용한다(82).” 17세기에 시작되어 19세기에 찬란한 꽃을 피운 실증주의적인 사고방식은 기계의 해석이 사람보다 신뢰할만하다는 믿음을 강화한다. 이 믿음에 기대, 누군가는 사진을 자신의 목소리를 관철하려는 무기로 사용한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사진이라는 무기를 우리에게 겨냥한 자들의 구경거리가 되든가, 아니면 그 무기의 사용법을 제대로 익혀서 혁명의 도구로 활용하든가.
혁명의 도구로서 사진에 주목하는 존 버거의 관점은 상당히 노골적이다. “포토몽타주를 교훈적으로 활용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앞으로 대상의 신비를 벗겨내는 이 기술에 대해 더 깊이 실험해야 할 것(40)”이라는 버거의 확신은 분명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아우라를 되풀이 한 것이다. 누군가 고통을 겪고 있는 사진에 대한 우리의 통상적인 반응은 무감각하거나, 눈을 돌리거나, 아니면 선의를 발휘하여 개인적으로 도움을 베푸는 것일 터인데, 버거가 기대하는 혁명의 수준은 그 차원을 넘어선다. 그는 우리가 정치적으로 개입하기를 바라고 있다. 정치적 개입은 한 사람에게 손을 뻗는 수준이 아닌, 그 고통을 만든 구조에 접근하여 목소리를 내고 실효적인 대책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이름으로 발발한 전쟁에 효과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법적인 기회가 없다. 이점을 깨닫고 거기에 맞춰 행동하는 것만이 사진이 보여준 것에 대한 효과적인 반응일 것이다(47).”
존 버거가 선택한 또 다른 온건한 방법은 사적인 사진과 공적인 사진의 차이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사적인 사진은 개인의 삶의 맥락 속에 위치하지만, 공적인 사진은 단절된 정보들 위에 놓여진다. 만약 한 남자가 쓰러져 있는 모습을 공적인 사진에서 발견한다면, 거기에는 안타까움을 비롯한 몇 가지 인상들이 스치고 지나가겠지만, 그 이미지가 맥락과 괴리된 하나의 아이콘에 그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내 형제이거나 남편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사진은 나와 그 사람의 삶의 궤적이 오롯이 축적된 한 순간이고, 두 궤적의 교차점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무수한 시간에 상응하는 무수한 의미들이 축적되어 있다. 공적인 사진이 잊기 위해 기록하는 것과 달리, 사적인 사진은 영원히 지속될 연속성을 담는다. 따라서 공적인 사진에 사적인 맥락을 담아야 한다. 분절되지 않은 긴 시간의 의미를 담아야 한다. 찍고, 찍히고, 보는 사람들 각각의 삶에 여러 개의 교차점을 만들면서 생각을 이어가게 해야 한다. 사랑과 연대의 이미지를 지향해야 한다. ‘사랑과 연대의 마음으로(237)’
버거에게 사랑과 연대의 이미지로서 사진을 알게 해준 사람은 장 모르(Jean Mohr)였다. 그는 거의 독점적으로 존 버거를 찍었고, 버거와 함께 글과 사진이 어우러진 멋진 책들을 만들었다. 이 책에서 장 모르에게 바치는 에세이는 그야말로 진실한 친구에게 보낼 수 있는 가장 멋진 찬사다. 여기에는 모르의 인생, 사진, 기질 등 모든 것이 담겼다. 살면서 단 한번이라도 이런 찬사를 받을 수 있다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나도 성공하고 싶다.
“이제 예술가처럼 집중해서 다듬어낸 나의 의지력이, 나의 연약한 팔다리와 지쳐 버린 허파를 지탱해 줄 것입니다. 해내겠습니다.”
체 게바라
“나는 그림으로 그리고 싶지 않은 것을 사진으로 찍고, 사진으로 찍을 수 없는 것들을 그린다.”
만 레이
“사진은 바라보는 행위에서 나오는, 특정한 순간과 그 영원함을 잡아내는 자발적 충동이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영원의 반대는 덧없음이 아니라 잊혀짐이다.”
20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