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설리번의 「동서미술교섭사」

Michael Sullivan, The Meeting of Eastern and Western Art: Revised and Expanded Edition

진정한 이해를 위한 첫 걸음

오늘날 교통통신의 발달은 세계화를 가장한 서구화를 향하여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가속화하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을 발로 뛰면서 면밀히 들여다보면 지역성을 일거에 말소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분명히 드러난다. 지역성은 대단히 모호한 관념이기 때문에 그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는데, 결국 지역성은 한 지역의 독특한 자연환경과 부모에게 보고 배운 것들이 결합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외국인을 만나서 긴밀히 교재하려는 단계에서 분명 그 사람의 이해할 수 없는 언행들이 거슬리기 시작할 텐데, 이때 그 사람이 성장한 자연환경과 문화적으로 학습한 것을 사려 깊게 들여다본다면 이해하지 못할 구석은 없다.

오늘날 한 지역의 미술은 고유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세계적으로 통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라는 모순된 기대를 동시에 업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과 상대방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동서양의 미술 교류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미술은 인간이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것을 시각적 대상물로 표현한 결과물이다. 또한 미술은 한 시대가 바라볼만한,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술을 통해서 그것을 제작한 한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탄생시키는데 기여한 하나의 문화 전체를 이해하는 단초를 얻으리라 믿고 있다. 그 믿음의 증표가 오늘날 대형 도서관의 한 구역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미술 관련 도서들이다. 결국 동서양의 미술 교류를 이해하는 것은 한 지역이 다른 지역을 어떻게 보고, 이해하고, 표현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만일 과거의 지역성이 오늘날에도 어느 정도 유효하다면, 과거에 서로가 서로를 이해했던 방식 또한 여전히 동시대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것이다. 마이클 설리번의 책은 그 영향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점을 일깨운다.

처음 이 책을 들었을 때 제목에 비하여 너무 얇고 가벼워서 놀랐다. 사실 이 야심찬 제목을 온전히 구현하기 위해서는 10권짜리 전집도 모자란다. 아마 그 중 한 권은 동양과 서양의 범위를 규정하는데 바쳐져야 할지 모른다. 원서의 제목은 그나마 솔직한 편인데, 그마저도 매우 큰 범위의 이야기다. 저자는 애초에 자신이 동양과 서양의 미술 교섭사를 한 권의 책으로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이 책이 다루는 범위는 시공간적으로 명확하게 한정되어 있다. 공간 측면에서 이 책이 다루는 서양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서양’이 맞지만, 동양은 오직 중국과 일본에 국한된다. 이슬람 제국, 몽골, 인도가 빠진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책이 얼마나 협의의 교류사를 다루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시간 측면에서는 16세기 이후부터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즉, 기독교 선교와 제국주의적 신민지 개척이 맞물린 대항해시대 이후의 미술 교류에 초점을 맞춘다. 장르면에서도 회화와 일부 조각에 한정된다.

일본에서 서양미술을 경험하기 시작한 때는 포르투갈 선교사가 상륙한 1549년부터이다. 초기에 서양미술은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는 전략적 매체로서 일본에 유입되기 시작했는데, 종교적 이미지의 힘이 백 마디 말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은 유구한 미술사 전체가 논증하는 바이다. 기독교와 함께 유입된 서양미술은 결국 정치적 지도자들이 기독교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따라 수용과 추방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다른 동양권 국가들에 비하여 일본이 이른 시기부터 서양미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분명하다. 선교사들은 나가사키 등 개방항을 중심으로 화실을 설치하여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거기서 배운 일본 화가들은 알게 모르게 그 화풍을 전역으로 퍼뜨렸다.

하시모토 가호, <백운홍수도>

중국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사유로 서양미술을 접하게 되었지만 그들의 반응은 일본과 사뭇 달랐다. 그들은 서양미술을 새롭고 진기한 무언가로 여겼지, 자신들의 양식에 차용하고 응용할만한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서양의 원근법과 사실주의는 그 어떤 사유나 철학도 없는 장인의 손기술에 지나지 않았다. 시서화를 아우르는 문인화의 전통은 그들에게 그만큼 견고한 것이었고, 사회주의 리얼리즘 이전까지는 그 견고한 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양식적 충격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외국의 문물을 중국에 봉사하게 하라”는 마오쩌둥의 명령은 그들이 당초에 지녔던 미술관을 최고 지도자가 다시 한 번 원칙적으로 천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장다첸, <장강만리도(1968)>

일본이 중국이나 한국과 달리 적극적으로 서양미술을 수용한데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제한된 지리적 공간에서 자신들의 존립 기반을 확보하기 위하여 우수해 보이는 기술은 그 출처를 막론하고 일단 받아들이고 보는 학습열망이 크게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저자는 이 같은 열망을 “외부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으로 가득찬 분위기(37p)”라고 설명했는데, 사실 한 민족이 이러한 호기심을 갖기 위해서는 외부 세계로부터 침략을 받은 역사가 없어야 한다. 일본 영토가 공식적으로 외침을 당한 것이라고는 두 번 뿐이다. 13세기에 몽골군이 송과 고려의 군사를 동원해서 북규슈에 침입했다가 기상악화로 패퇴하였고,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에게 폭격을 당했다(출처). 이러한 일본의 역사와 대비해보면 생소한 서양선박이 눈에 보일 때마다 일단 문부터 걸어 잠궜던 우리 민족의 대응이 이해가 간다. 혹자는 이러한 대응에 대하여 미래를 내다볼 줄 몰랐던 한 사람의 쇄국정책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지정학적 요충지에 터를 닦고 살아야만 했던 우리 민족의 역사 전반을 포괄적으로 본다면, 그 당시 우리에게 외부 세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의심이란 피할 수 없는 반응이라는 생각도 든다.

우리나라는 개항을 통해 독자적으로 서양미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일제강점기의 일본 유학파들이 서양의 미술 재료와 기법을 손에 쥔 1세대가 되었다. 그들이 보고 배운 것은 일본 화가들의 시선으로 1차적으로 각색된 서양미술이었다. 이것이 우리나라가 이 책에서 단 한 문단만 언급되는 이유이다(152p). 이 문단은 한국이 세계 미술의 조류에 늦은 것은 아니며, 앞으로 더욱 훌륭한 소통을 보일 것이 기대된다는 내용이다. 작가 중에서 이우환이 언급되기는 하나, 일본 모노하 운동의 선구자로서만 기록될뿐이다(160p).

동양이 받아들인 서양에 이어, 서양이 받아들인 동양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은 18세기 프랑스 궁정의 중국풍이나 19세기 인상주의자들의 자포니즘이지만, 저자는 그 닳고 닳은 이야기들을 길게 반복하지 않는다. 동양에 대한 화가들과 후원자들의 관심이 생각보다 일시적이었으며, 양식에 미친 효과도 미미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중국풍의 영향력에 대하여 과대평가하는 것을 특히 경계하는데, 서구인들이 중국미술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사유 체계에 대한 관심 없이 이국적이고 진기한 무언가로만 그것에 접근하고 소비했던 과정들을 비판적으로 본다.

사실 하나의 작품을 둘러싼 사유 체계 전반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조각상을 피카소의 작품에 영향을 준 이국적인 오브제로만 본다면 거기에 깃들어 있는 장인의 노고와 꿈은 영영 봉인되어 버린다. 스쳐 지나가는 외부인은 그것을 절대 이해할 수 없고, 다만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정도의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서양은 이제야 비로소 동양을 이해할만한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했고, 이 책을 비롯하여 몇몇 노력의 증거들이 나타난다. 아래 문단은 서구인이 동양의 예술을 바라볼 때 느끼는 모순된 감정을 정확히 짚고 있다.

“서양 사람들은 보수적이거나 흥미 없는 전통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중국의 화가들은 쉽게 잊어버리지만, 피카소나 클레의 영향이 감지되며 표절이라고 비난한다. 반면 서양화가들에게서 보이는 동양의 영향에 대해서는 극찬한다. 잭슨 폴록의 영향을 받은 자오우키에 대해서는 베꼈다고 말하고, 중국 서예의 영향을 받은 마크 토비는 얼마나 수용적인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185p

결국 동양과 서양의 화가들이 보여주었던 분명한 대비는 대상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동양의 화가들은 관념을 따랐고, 서양의 화가들은 형상을 따랐다. 각각의 역사 속에서 나름대로 형상과 관념의 투쟁이 반복되었으나 결국 양자를 비교할 때 그 차이는 분명하게 드러났다.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의 혁명 이전까지 서양 회화에서 그 어떠한 재현적 대상도 없이 화가의 정신을 표현한다는 것은 대단히 생소한 개념이었으나, 4세기의 중국 불교 철학자인 종병은 이미 다음과 같은 언설을 남기며 회화에서 정신적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였다.

“현자는 객관적 세계에 반응하지만 그 안의 도를 중시한다. 덕자는 재현된 대상을 감상하면서 그의 정신을 순화한다. 풍경화의 경우, 그들 모두 물리적 존재를 갖고 정신의 영역에 진입한다.”

종병, 235p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 속지 않으면서, 자기 스스로와 상대의 진면모를 이해하는 것은 엄청난 비용과 지적 분투를 필요로 하나, 위대한 창조의 순간을 맞이하려는 모든 예술가들에게는 숙명과도 같은 과업이다. 또한 이 과업은 예술을 넘어 삶과 정치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열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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