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가 고대 그리스라고 일컫는 대상은 하나의 단일문화권이 아니라 에게해를 연하여 살아온 이질적인 지역과 민족을 아우른 것이다. 트로이, 미케네, 크레타로 대표되는 이들 지역에서는 기원전 3천년 경부터 각종 건축물과 조각들로 그 뚜렷한 흔적을 남겨왔다. 그 후손들은 로마 제국에게 패권을 넘겨주기 전까지 수많은 전쟁과 이합집산을 거쳐 그리스 문명의 황금기를 일궜다.
이번 전시는 야심차게도 그 최초의 흔적들에서부터 알렌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제국 정복에 이르기까지 6천년의 시간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방대한 지역과 시대를 대상으로 하는 만큼 하나의 주제에서 몇 개의 대표적 사례만을 겉핥기식으로 느끼고 지나갈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 사례들은 대체로 왕과 지배계층의 무덤에서 출토한 부장품들과 궁전 및 신전에서 발견된 기념비적 조각들에 국한되는 탓에 민중들의 생생한 생활상 같은 것은 개입될 여지가 없다. 이렇듯 그 어떤 시대와 민족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생활인들의 흔적은 오랫동안 보존되기가 힘들다. 그것들은 중요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탓에 보존에 소요되는 온갖 집념어린 노력의 손길이 닿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과거를 기억할 수 있는 통로는 언제나 기념비들로만 국한된다. 기념비로 기억하는 과거도 물론 의미 있지만, 그 기념비가 그 시대의 온전한 대변자가 아니라는 의식을 갖는 것은 더 큰 의미가 있다.

이 전시에서 그나마 민중의 생활상과 관련한 작품은 <아크로티리의 소년 벽화>이다. 몇 안 되는 회화이기도 하다. 한 소년이 두 덩이의 생선 꾸러미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서 있는데, 소년의 몸은 고전적 공식에 의하여 도식화된 가운데 약간의 유려한 곡선이 가미되었다. 생선을 보면 주둥이, 지느러미, 꼬리의 세부적인 묘사가 기원전 17세기에 그려졌다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사실적이고 정성스럽다. 이러한 사실성은 도식적인 공식을 따르는 소년의 몸과 대비되어 무엇이 이 작품의 주인공인지를 보여준다. 물론 도식을 따른다는 것은 그 대상이 그 문화권에서 그만큼 중요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소년은 중요하다. 그럼에도 정성스럽고 사실적인 생선의 묘사에는 소년의 재현에서 볼 수 없는 일종의 염원 같은 것들이 깃들어 있다. 그것은 매일같이 양손 가득 생선 꾸러미를 들고 옮기는 누군가를 보고 싶은 염원이다. 그 염원은 진실하고 명징하게 모든 계층의 마음속에 얽혀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에게해에서의 어업활동은 생명을 이어가는 신성한 활동이었고, 이 생선이 귀족의 입으로 들어가건 노예의 입으로 들어가건 결국 그 말단에 어부들의 목숨을 건 분투가 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업이 잘 돼야 모두가 배부르고, 근심 걱정이 없고, 전쟁에서 이기고, 왕실이 평안하고, 신전에 봉헌물이 넘칠 수 있다. 유려한 곡선을 지닌 소년은 그 모든 염원을 양손 가득 움켜쥐고 의기양양하게 걸어간다.
나는 3년 전에도 이 작품을 만났었다. 당시 도쿄국립박물관에서 「그리스 문명전」이 한창이었고 거기에도 이 작품이 선을 보였다. 하나의 작품을 여러 경로로 다시 만나는 일은 언제나 반가움과 보람을 불러일으킨다. 오늘 많은 작품을 보아두어야 하는 이유를 하나 꼽자면, 그래야만 나중에 다시 만날 작품의 수를 늘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작품을 다시 만나면 작품과 내가 서로 떨어져 있던 시간 동안 내 마음속에 어떠한 생각의 조각들이 쌓이게 되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 조각들은 심연에 소리 없이 쌓여 있다가 재회의 순간에 새로운 의미로 돌아온다.

기원전 2700~2400년경의 키클라데스 조각상을 보면 추상화(abstractization)를 19세기 모더니스트들의 위대한 발명품쯤으로 여기는 사고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여인은 팔짱을 낀 특유의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는데, 엄정한 비례감에 의하여 신적 권위를 부여받았다. 말도 없이 외박을 하고 새벽에 조용히 집에 들어온 사내가 이 자세로 앉아 있는 아내를 본다면 아마 저절로 무릎이 꿇어질 것이다. 이 조각상에서 눈, 입, 손가락, 발가락 등 세부는 모두 축약되었지만 우리는 이미 그 모두를 본 것만 같다.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가 이 5천 년 전의 선배에 비하여 나은 것이라고는 자기 자신의 이름을 가졌다는 정도이다.

활과 사슴을 들고 있는 아르테미스(BC 480년경)
사실주의가 단순하게 선형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아르테미스 여신과 관련한 두 조각상에서도 엿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두 조각상은 상이한 제작 목적을 따라 전혀 다른 미감을 보여준다. 좌측의 소녀상은 2000년 후인 르네상스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를 보여준다. 이 조각은 분명 제작자 주변에서 발견한 특정한 소녀를 모델로 만들어졌다. 반면, 그 옆에 있는 아르테미스 조각상은 코레를 연상케 하는 이상화된 형태의 이콘이다. 도식화된 얼굴과 질서를 내포한 옷주름은 이 인물의 신성성과 영속성을 상징한다. 또한 사슴을 들고 있는 아르테미스는 어린 양을 안고 있는 예수의 도상과 겹쳐지며 서양미술사에서 종교적 이미지가 끊임없이 전용되었던 사례를 예증한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이 두 조각은 사실주의의 승리와 쇠락이 단순히 시간에만 얽매인 문제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사실주의는 현세적인 것과 영속적인 것의 대립 속에서 당대의 가치평가가 어떠했는가를 암시하는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다. 즉, 비슷한 시기에 충돌하는 두 양식은 제작자가 관심을 가졌던 대상이 이 땅에 속했던 것인지, 혹은 신들의 세상에 속했던 것인지를 암시하는 힌트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