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수장고를 거닐며: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

아스팔트마저 녹아 버릴 것 같은 날에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을 찾았다. 미술관 자체는 지난해 12월에 개관했지만 주변은 여전히 공사 중이었다. 번듯한 주차장이 없기에 건물과 건물 사이 자그마한 자투리 공간에 마련한 임시주차장을 이용해야 했고, 그마저도 주차선 같은 것 없이 관람객들의 암묵적 룰로 운영되고 있었다. 관람객들은 건설자재 무더기를 위태롭게 지나 미술관으로 입장했다. 지게차와 포크레인 같은 중장비들이 육중한 재료들을 운반했고, 인부들은 온 몸이 새까맣게 그을린 채 비지땀을 흘렸다. 예술과 일상, 휴일과 근무, 여가와 분투가 극명하게 교차하는 풍경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는 많은 기대 속에 문을 열었다. 근현대 미술을 다루는 유일무이한 국립 기관인 국립현대미술관이 수도권을 넘어 지방으로 진출한 첫 사례이다. 연초제조창을 리모델링하여 ‘한국형 테이트’ 모델을 지향했다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무엇보다도 개방형 수장고를 표방하며 기존에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전시 형태가 기대를 모았다.

미술관의 핵심 기능이 수집, 보존, 연구, 전시라면,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의 ‘보이는 수장고’는 수집과 전시 기능의 통합을 의미한다. 또한 보존처리를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보존과학실을 대외적으로 공개함으로써 보존과 전시 기능을 통합하기도 했다. 왕과 귀족의 사적인 쿤스트캄머(Kunstkammer)로 출발한 근대적 미술관은 프랑스혁명 이후 공공성과 전문성이 강조되는 기능 분화의 시대로 빠르게 진입하였지만, 이제는 융합의 기치 아래 다시 하나의 공간으로 모여들고 있는 형국이다. 다시 통합된 기능들이 가져다주는 이점에 대한 결론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당초 보이는 수장고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작품을 보관하고 있는 ‘진짜’ 수장고 안을 거니는 장면을 상상했었다. 청주관에 직접 가보니 그것은 순진한 기대였음이 드러났다. 여기에는 진짜 수장고와 시뮬라크르적 수장고가 혼재해 있다.

지금 청주관에서는 두 건의 수장고形 전시가 열리고 있다. 1층 개방수장고는 주기적으로 작품이 교체되는 상설전 성격에 가깝고, 3층 개방수장고에서는 「나만의 보물을 찾아서」라는 타이틀로 미술은행 컬렉션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이 장소들은 ‘개방수장고’로 공식 명명되나, 체감상 진짜 수장고라기보다는 수장고 컨셉을 차용한 독특한 전시실로 느껴진다. 그 차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디자인 요소는 일반적으로 창고에서 쓰이는 목재 팔레트의 외형을 알루미늄으로 재현한 팔레트형 좌대이다. 사진 및 회화 작품들을 화이트큐브 공식에서 벗어나 살롱전 분위기 마냥 벽면에 촘촘히 걸어 놓은 것도 수장고 연출을 위한 디자인 요소이다. 또한 작품들은 철저히 매체를 기준으로 구획되었고, 일련의 서사와 주제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원래 창고에는 서사가 없다. 유려하고 짧은 문장이 쓰여 있는 캡션도 없다. 일반적인 미술관에서는 볼 수 없는 관리번호 같은 행정편의적 정보들만 담겨 있어 여기가 수장고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준다.

반면 진짜 수장고인 ‘보이는수장고’는 통유리로 그 안을 들여다 볼 수는 있지만, 우리가 그 안에 직접 들어갈 수는 없다. 작품과 나 사이는 명확한 구획으로 가로막혀 있고, 통유리로 일정부분을 엿볼 수 있을 따름이다. 국립병원을 방불케 하는 지극히 강박적인 모더니즘이 돋보이는 복도를 거닐며 통유리 너머의 작품들을 훔쳐보는 기분은 야릇하다. 이 구획과 관통 사이에서 묘한 관음증적 즐거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 자체로 이 미술관에 올만한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여기서는 관람객에 의한 그 어떤 개입도 일어날 수 없다. 수족관의 물고기들은 하다못해 유영이라도 하는데, 수장고 안의 작품들은 그저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을 따름이다. 쉽게 말해서 보이는수장고는 한번 정도 호기심에 둘러볼 만한 신선한 요소는 될 수 있으나, 독립적인 전시 콘텐츠로서 항구적인 즐거움을 약속하지는 못한다.

다시 개방수장고로 돌아와, 이 전시들이 수장고라는 형태를 차용함으로써 관람객에게 어떠한 새로운 가치를 줄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회의적인 결론이 나온다. 수장고 특유의 디자인 요소들은 첨단으로 치닫는 갤러리들 사이에서 독특한 미완의 미감을 선사하기는 하나, 우리가 오늘날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의 카페에 금세 익숙해져서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지극히 일시적인 자극에 머무른다. 반면 기획자들에게는 대단한 이점이 있다. 이 장소를 수장고라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에게 최대한의 태만을 용인할 수 있다. 여기서는 서문도, 도록도, 배치도, 동선도, 캡션도 필요 없다. 일반적으로 입장이 금지된 미술의 성역에 초대되는 특권을 선사하였으니, 그 이상의 특권을 기대하지 말라고 관람객에게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 여기는 애초에 그런 성역이었기에 그저 작품들을 매체별로 분류해서 모아놓기만 하면 된다. ‘여기에는 그 어떤 주제나 의도도 없기 때문에 여러분만의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 보세요’라고 말하면, 그 모든 태만은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수요자 중심적이라는 미명 하에 면죄부를 얻는다. 3층 개방수장고의 첫 전시 제목(「나만의 보물을 찾아서」!)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결국 수장고形 전시가 기존 전시와는 다른 독자적인 가치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수장고를 모방한 전시가 아닌 진짜 수장고를 열어젖힌 전시를 지향해야 한다. 작품 위에 켜켜이 쌓인 먼지와 화면을 뒤덮은 온갖 화학약품의 알싸한 독소가 망막을 찌를 것 같은 생동감을 전해주어야 한다. 작품이 안락한 둥지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가운데, 관람객이 그 휴식을 방해했다는 죄책감마저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선택받지 못한 하나의 작품을 둘러싼 불안감, 연민, 패배감이 대기를 감돌고, 궁극적으로 작품과 나 사이의 공진(共振)의 장이 형성되어야 한다.

물론 현실적 제약이 많다. 진짜 수장고를 개방해버리면 관람객들의 돌발행동 하나하나를 통제할 수 있는 인력과 시스템이 같이 들어와야 한다. 그때 진짜 수장고는 다시 시뮬라크르적 수장고가 되어 버린다. 설령 누군가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지 않더라도, 불특정 다수가 그 주변을 돌아다닌다는 사실만으로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온도, 습도, 진동 등이 모두 작품의 온전한 보관이라는 수장고의 본질적 기능과 충돌한다. 결국 수장고가 주는 생생한 현장감과 관리 효율성이 최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지점에서 현재의 청주관 개방수장고가 고안되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비록 아쉽지만, 앞으로 수장고만이 보여줄 수 있는 ‘날 것’의 매력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기획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구체적인 방법은 나도 모른다. 그건 미술로 밥 벌어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맡길 일이다.

개관전 「별 헤는 날: 나와 당신의 이야기」 展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동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일상적 주변인들과 관계에 관한 작품들을 출품하였는데, 일단 기획전시실이 너무 좁아서 놀랐다. 아무리 수장고가 중심이 되는 미술관이라지만 이 정도 규모로는 회화 50점정도도 빠듯해 보인다.

또 놀란 부분은 무료로 제공하는 브로셔의 수준이다. 두껍고, 풀컬러에, 내용도 충실하다. 도록도 필요 없을 정도다. 서울관이나 과천관에서는 이 정도 수준에 훨씬 못 미치던데… 개관 기념 푸쉬가 있지 않나 싶다. 어쨌든 관람객 입장에서는 좋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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