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의 「큐레이팅의 역사」

모든 역사의 시작, 사람

전설적인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t)가 또 다른 전설적인 큐레이터 11명을 인터뷰하고 그 전문을 실은 책이 어떻게 큐레이팅의 역사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의미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역사란 대단한 위인들의 기념비적 성취들을 쫒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저 사람들이 살아왔던 이야기들이다. 한 명의 소시민이라도 자신의 삶을 흔적으로 남기고, 그 흔적이 후대의 다른 누군가에게 일말의 의미라도 지닐 수 있다면 그 순간 역사가 시작된다. 역사는 시간과 장소의 그물망을 촘촘히 채우는데, 누구도 그 그물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거리를 두고 생각해 보면, 다만 눈에 쉽게 띄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공존할 뿐이다.

이 책이 단순한 인터뷰 녹취록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서라고 주장될 수 있었던 까닭은 그 인터뷰 대상이 현대 큐레이팅의 개념을 정립한 선구자들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누차 강조하듯, 현대 큐레이팅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산발적으로 태동하면서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하여 체계적인 기록을 갖추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그에 따라 본격적인 역사 서술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현대 큐레이팅의 선구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기록한 이 책이 그 자체로 역사서의 지위를 차지할 수는 없다. 여기에는 역사가의 관점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 큐레이팅의 역사에 관한 1차 자료가 전시와 관련한 문서, 사진자료, 회고록, 도록 등이라면, 이 책은 그 전시들을 사후에 반추하는 2차 자료에 가깝다. 진정한 의미에서 큐레이팅의 역사를 기술하려면 1차 자료와 2차 자료를 엮는 역사가의 통찰과 철학이 필요하다. 그 역사가는 아직 오지 않았다.

“내가 깨달은 사실은 전시에 관한 문헌들이 별로 없다는 것, 그리고 또 전시의 역사에 대한 이상한 기억상실증이 있다는 것이에요. (중략) 전시와 관련한 이러한 극도의 기억 결핍 때문에 구술사 기록을 시작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한 거죠.”

293p

‘큐레이팅의 역사’라는 제목을 단 책이 선구적 인물 11명의 목소리를 그대로 풀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러한 방법론은 아직 본격적인 역사 기술이 부재하는 미시적인 한 분야에 대하여 통상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접근법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미술사를 예로 들면, 최초의 미술사가로 일컬어지는 인물은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인데, 그는 「미술가 열전」이라는 기념비적 저술을 통해 ‘인물 중심 미술사’라는 접근법을 창안하였다. 바사리의 책은 수많은 오해와 편파성, 그리고 부적절한 사실관계들로 점철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사와 관련하여 그 누구도 그만한 성취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후 수많은 후대 연구자들이 여기에 빚을 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 빗대보면 「큐레이팅의 역사」는 아주 작은 규모의 ‘큐레이터 열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오브리스트는 인터뷰 대상자에게 큐레이터 경력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묻고 거기서 파생되는 전시, 공간, 인물들을 중심으로 추가 질문을 이어가며 인터뷰를 진행한다. 인터뷰어 스스로가 전시계 돌아가는 소식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에, 마치 답을 다 알고서 물어본다는 느낌이 든다. 어쨌든 충분한 공감과 이해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인 것은 분명하다.

인터뷰에 응한 큐레이터 중 상당수가 30대에 관장의 역할을 맡았고 20여 년간 한 미술관에서 장기적으로 근무했던 경우도 많아서 놀랐다. 프란츠 마이어(Franz Meyer),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 장 레링(Jean Leering) 등이 그런 사례이다. 2~3년 마다 국공립 미술관의 관장이 바뀌고, 그때마다 온갖 지저분한 풍문이 떠도는 우리네 미술관들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한 명의 리더가 관장으로서 장기재직 한다는 것은 그만큼 예측가능한 컬렉션 관리와 전시 운용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한편으로 장기재직은 편협한 안목과 매너리즘으로 인한 위기를 야기할 수도 있다. 결국 장기재직 여건이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긍정적인 평가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전시뿐만 아니라 경영리더십 측면에서도 최고 수준의 리더십이 발휘되어야 한다. 우리네 미술관을 바라볼 때 슬픔을 느끼는 까닭이 장기재직 여건의 불비함 때문인지, 아니면 역량과 리더십의 빈곤 때문인지 모르겠다.

인터뷰를 읽다보면 자기방어적으로 지역과 인명을 줄줄이 나열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면 읽는 재미가 없다. 특정 전시와 관련한, 혹은 자신이 영향을 받은 큐레이터들을 열거하는 대목에서는 소외감을 느낀다. 미술가들도 잘 모르는 와중에 그런 큐레이터들에 대하여는 더더욱 들어봤을 턱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진실하게 자신의 신념을 이야기 하는 목소리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세스 시겔라우브(Seth Siegelaub)는 10년 내지 15년마다 커리어를 옮겨가면서 계속되는 자기혁신을 이어가는 것이 스스로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반복해서 설명하였다. 그의 경력은 견고한 구조를 타파하거나 빗겨가면서 탈신화화하는데 온전히 바쳐졌고, 그 와중에도 예술가의 권익을 신장할 대안들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앤 다르농쿠르(Anne d’Harnoncourt)는 전설적인 큐레이터였던 아버지에게 받은 암묵적인 영향들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그것이 오늘날 자신이 있게 만든 값진 유산이었음을 자각한다. 위대한 작품과 예술가들에 둘러싸인 성장배경은 그것을 엮어낼 자질을 타고난 사람에게 더 할 나위 없이 큰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 인터뷰이인 루시 리파드(Lucy Lippard)는 그 명성에 걸 맞는 풍성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페미니스트이자 좌파인 자신의 정체성을 자랑스러워했던 리파드는 신념을 공유하는 예술가들에게 실천적인 큐레이팅으로 굳건한 터전을 선사했고, 형식주의자들의 최후의 발악에도 콧방귀로 응수하는 배짱을 보여주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리파드의 친구에게 “루시 리파드 같은 이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요즘 미술계는 그렇게 나빠졌다”고 말했다는데, 이 말을 건네 들었을 리파드가 당시에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자신을 뒤에서 씹어댔다고 분노했을까? 마냥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아마 흘러간 시대의 거물이 자신을 거론해 준 것 자체에 묘한 쾌감을 느꼈을 것 같다. ‘오, 좀 더 분발해야겠는데?’ 라며.

리파드의 인터뷰는 특히나 큐레이팅과 비평을 막론하고 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결국은 예술가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운다. 오늘날, 그리고 앞으로의 미술에 대하여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예술가들과 어울리는 것이다.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미술제도가 아무리 고도화되고 상업주의가 판을 쳐도 오늘의 예술가가 내일의 예술을 만든다는 사실은 기초적인 진리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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