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 그 신화와 구조」

Jean Baudrillard, La Société de consommation: Ses mythes ses structures

알고 당할 것인가, 모르고 당할 것인가?

SBS에서 방영하고 있는 「맨 인 블랙박스」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블랙박스에서 촬영된 사고 영상들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처음에는 아침 교양 프로그램인 「모닝와이드」의 한 꼭지로 출발했는데, 점차 인기가 많아지면서 주말 황금시간대에 단독 편성으로 확대되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 정말이지 별의별 교통사고들이 도처에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충돌, 죽음, 실수, 분노, 악의 따위가 고속도로 위를 나뒹구는 찢겨진 타이어마냥 사방에 나뒹군다.

한 두 번 이 프로그램을 볼 때는 교통사고에 대한 경각심을 주기 위한 공익적 컨텐츠의 일환이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계속되는 파괴의 향연을 즐기다보면, 이내 그것은 제작진이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하나의 표면적인 명분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맨 인 블랙박스」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파괴의 미학, 충돌의 스펙터클이다. 육중한 기계장치가 심장이 팔딱팔딱 뛰는 인간을 태운 채 시속 120km로 달리다가 중앙 가드레인을 넘어 점프하기도 하고 인도를 덮치기도 한다. 사람들은 다리가 부러지거나, 죽거나, 최악의 경우 가족을 잃고 혼자 살아남는다. 여기서 우리가 표면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피해자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교통사고의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이지만, 그 심층에 조심스럽게 도사린 감정은 영화 「2012」나 「고질라」를 볼 때 느끼곤 하는 대량 파괴의 엑스터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블랙박스 영상 특유의 각종 수치 정보들과 너저분한 화질은 이 영상이 실제 상황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더 강한 자극과 몰입의 요인이 된다.

우리는 이미 너무나 많은 파괴의 이미지들에 노출되었고, 무뎌질 대로 무뎌졌다. 그 파괴의 미학 속에서 우리는 온전히 즐길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았었고, 그 외에 다른 맥락적 가능성은 없다. 동질화 내지 연민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등산 가방 안에서 뒤늦게 발견한 비스킷처럼 바스러진 건물들을 바라보며, ‘저 안에 내가 있다면’, 혹은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면’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일은 부질없다. 컴컴한 극장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그런 감정을 품을만한 에너지와 시간은 허락된 적이 없다. 물밀 듯이 휘몰아치는 파괴의 장면들은 철저한 분리를 강요하고, 우리의 시선은 주인공의 극적인 탈출에만 고정된다.

‘파괴 포르노’는 영화, 드라마, 광고, 뉴스의 형식으로 하루도 쉬지 않고 안방으로 찾아든다. 만약 어느 날 우리나라에서 파괴 포르노에 적합한 배우를 찾지 못한다면, 카메라의 초점은 아마도 미국 같은 나라(우리와 친하고, 영향력이 크며, 폭력이 일상인 나라)로 기꺼이 옮겨갈 것이다. 2017년을 기준으로 미국에서는 하루 평균 109명이 총에 맞아 죽기 때문에 어지간한 난사 사건이 아니면 우리나라까지 전파를 타기 힘들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자체적인 파괴 포르노를 결방할 수밖에 없는 날이면, 미국의 소소한 죽음도 우리나라에 송출될 확률이 높아진다.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오늘날 이처럼 폭력의 이미지가 범람하는 이유를 ‘소비사회’에서 찾았다. 이 시대를 정의하는 견고한 구조인 소비사회는 매스미디어를 충신으로 삼아 개개인의 정신과 행동 일체를 붙들어 맨다. 매스미디어는 시시각각으로 벌어지는 폭력을 눈앞에 배달하고 입체감 있게 묘사한다.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며 이내 불안해지지만, 이내 그 고통은 나와 관련 없는 것이라며 일축해버린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자리한 불안감은 새로운 사물들로 주위를 둘러싸면서 불안감을 떨쳐버리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불안을 조장하는 이유는 극한으로 추구해야 마땅한 안락함이라는 권리를 더욱 정당화하기 위함이다. 오늘날 쌍방향 디지털 기술의 눈부신 발달은 개인별 맞춤형 컨텐츠가 각광을 받으며 매스커뮤니케이션의 부작용을 치유하려고 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특정 방향으로의 편향에 가속도를 붙이며 새로운 부작용을 야기하고 있다. 하나의 부작용을 새로운 부작용으로 상쇄하는 것이다. 폭력의 이미지를 회피하기란 불가능하다.

19세기 생산력 혁명이 20세기의 소비력 혁명으로 이어졌다. 생산의 영웅들은 소비의 영웅들로 대체되었다. 더 화끈하게, 더 폭발적으로 소비하는 인물들이 시대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화려하고 섹스어필하는 외모로 어마어마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아이돌들과 인플루언서들이 창출한 부는 생산성의 대리변수가 될 수 없다. 그들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과 존엄성, 그리고 그것들이 들러붙어 있는 육체를 철저하게 소비하고 있다. 포털사이트 뉴스 페이지의 첫 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가 순식간에 잊혀져버리는 셀럽들의 비참한 말로는 그 소비의 끝을 보여준다. 일견 행복한 말년을 보여주는 예외적인 사례들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타인이 소비하는 방식이 삶의 궤적을 견인하는 인생은 적자로 귀착될 확률이 더 높다.

“생산과 소비는 생산력과 그 통제의 확대재생산이라는 단 하나의 똑같은 거대한 과정이다.”

118p

오늘날 글로벌 경제상황은 뉴노멀(New Normal)로 정의될 정도로 만성화된 저성장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저성장의 기준은 과거와의 비교일 따름이지 미래와의 비교는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기록이 남아 있는) 과거뿐이다. 경제성장이 궁극적으로 모두에게 장밋빛 미래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경제학자들의 전망은 100년이 넘도록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으나, 여전히 그 이론적 근거가 견고하고 상호텍스트적인 인용을 거듭하고 있다. 사실상 인류 역사에서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없고, 그 점에 있어서 비약적인 경제성장은 아무런 죄가 없다. 즉, 성장은 불평등을 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불평등에 의존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가 승진에 목을 매고 급여를 한 푼이라도 더 주는 직장으로 이직하려고 하는 까닭은 그곳에 상위세계로 들어가는 열쇠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곳에 가면 최소한 더 이상 추락하지는 않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소비사회의 원칙에 우리가 자발적으로 조응하는 까닭은 상승의 갈망이라기보다는 추락으로부터의 구원을 얻기 위함이다. 소비사회는 계급사회를 견고히 만들고, 모든 사물과 인간을 차이화의 기호로 전환시키며, 모든 노동자로 하여금 계급상승이라는 허황된 마약을 맛보게 한다. 이 지점에서 타고난 결함 또는 구조적 불합리성 탓에 추락한 자들은 존엄할 권리를 부르짖지만, 어떤 권리가 강조되기 시작하는 시점은 그 권리가 누군가에게서 박탈된 때라는 역사적 사실이 우리를 씁쓸하게 한다. 소비 자체가 차이화의 과정이기에 간격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으며, 돌이킬 수도, 멈출 수도 없다.

“풍부함은 차별과 관련되어 있다. 풍부함이 어떻게 해서 차별의 교정책일 수 있는가?”

91p

한 사람이 어떤 사물을 소유하고자 할 때, 그것이 내면의 본질적이고도 고유한 욕구라는 점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겠는가?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이 밝혔듯,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내면과 세계라는 이분법은 형이상학으로부터 후기 구조주의에 이르는 케케묵은 논쟁이지만 그 누구도 명쾌한 답을 내어 놓은 적이 없다. 소비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세계로부터 무관한 자아의 본질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그 누구도 세계가 없던 시절의 그 본질을 자각하고 논증할 수는 없다. 소비사회로부터 무관한 자아를 찾기 위해 소위 ‘미개사회’로 들어가 본다고 한들, 더 이상 그런 사회는 지구상에 남아 있지도 않을뿐더러 그것을 관찰한 자 스스로가 서구사회의 색안경을 끼고 있기 때문에 관찰결과도 믿을 수 없다. 소비의 체계는 오로지 그 체계 스스로에게만 충성할 뿐 개인에게는 관심이 없다.

“체계는 자신의 욕구를 위해서만 생산하기 때문에, 그것은 개인의 욕구라는 알리바이 뒤로 더욱더 철저하게 숨어버리는 것이다.”

90p

보르리야르가 소비사회를 비판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그것으로 인하여 인간의 본성과 존엄성이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초에 소비사회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그 열매를 따먹고 자란 우리가 어찌 소비사회와 별개로 존재하는 인간의 본성을 논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것을 본적도 없고, 심지어 그것들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도 않다. 보드리야르 자신도 그 한계를 직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소비사회에서 소외된 인간의 근원적 가치와 본성에 대하여 몇 가지 힌트를 유추했다. 그 힌트는 저자 특유의 역발상의 논리로 암시되며, 이 논리들을 진지하게 성찰할 때 우리 생각의 지평도 확장된다.

  • 청교도적 윤리는 소비사회의 희망이나 대안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소비와 함께 움직이며 그것을 성장시켜왔다. 그것은 방만한 소비를 규제하는 듯 보이지만, 오히려 인간의 본원적인 쾌락추구와 충동을 억제하면서 생산력 향상에 기여하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 진정한 의미에서 개성은 없다. 단지 소비사회가 만들어 놓은 하나의 코드에서 다른 코드로 옮겨가는 차이화만이 있을 뿐이다. 현대 사회는 규제하거나 통합하지 않고 다만 차이를 만든다. 차이로 규제와 통합을 달성하는데, 그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기 때문에 우리는 무비판적으로 동조한다. “소비사회에서 개인의 자기도취는 독자성의 향유가 아니라 집단적 특성의 굴절된 모습이다.”(141)
  • 오늘날 상식처럼 자리 잡은 ‘육체의 해방’은 신성성의 파괴가 아니라 변형에 불과하다. 신학적 ‘영혼의 이데올로기’가 ‘기능적-개인주의적 이데올로기’로 대체된 것이다. 단지 신화화의 대상이 영혼에서 육체로 옮겨간 것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육체는 해방된 적이 없고, 검열은 더 교묘해졌다.
  • 여성에 대한 성적 해방의 강조는, 오히려 여성을 성적 영역에 국한시키고 영속적으로 옭아매 놓는 전략이다. 이러한 전략은 젊은이를 반항의 영역에 국한시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여성의 성적 해방은 여성이 모든 면에서 해방될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들을 최소화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대상화된 사물로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수세기 동안 당신들은 육체를 갖고 있지 않다고 설득시켜온 사람들(그렇지만 그들은 결코 진정으로 설득되지 않았다)이 이번에는 철두철미하게 여러분은 멋진 육체를 갖고 있다고 설득시키고 있다.”(209)
  • 청교도적 규제로부터 해방을 맞은 현대인들은 내부의 공격적 충동을 사회로 돌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육체로 돌린다. 그것이 다이어트다. 고열량의 식품은 더 싸고 풍부해지며, 먹은 흔적을 없애주는 상품과 서비스도 그에 비례하여 증가한다.
  • 현재 체계에서 시간 낭비란 불가능하다. 우리가 누리는 휴식은 사실상 생산을 위한 일시의 여백에 불과하다. 우리가 여가를 통해 확인하고 싶은 것은 낭비할 수 있는 시간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과거에 여가시간은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차이화의 기호였다. 하지만 여가가 보편화된 사회가 도래하면, 노동시간을 보유하는 것이 특권적 행위가 될 것이다.
  • 소비사회는 생명력을 잃은 배려, 미소, 친절, 서비스로 범람한다. 여기서 배려는 간청이라는 뜻을 내포하는데, 그 간청은 너무나 강압적이라서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 풍부한 소비사회로의 이행은 인류 역사의 발달과정상 당연히 도래하는 것처럼 가장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까지와 다른 사회 시스템이 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진보가 아닌 변화이다. 그러므로 그에 저항하는 폭력이 출현하는 것도 당연한데, 이 폭력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폄하한다면 오해하는 것이다. 오늘날 모든 저항은 소비사회의 구조에 포함되어 있다. 히피도 소비사회의 대안적 극단은 아니다. 이것은 소비사회가 부추긴 개인의 해방과 방종이라는 모형의 감성적 버전이다. 이들은 같은 구조에 속해 있다.
  • 우리는 견고한 기호질서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 조차도 자각할 수가 없다. 우리 앞에는 거울 대신에 쇼윈도가 놓여 있다. 나는 내가 만든 상(像)으로 인해 소외되는데, 그 소외의 출발점은 나 스스로 그것을 팔아버렸다는데 있다. 그러므로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쇼윈도를 들여다보는 것에 의해 끊임없는 변화에의 적응성과 사회에의 순응성을 테스트 받고 또 유도된 자기투영능력을 시험당한다.”(278)

그렇다면 소비사회로부터 벗어나 소외를 바로잡고, 인간의 본성과 존엄성을 회복할 길은 없나? 보드리야르는 그런 방법은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소비사회에서 태어났고, 대안적 구조를 본적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68혁명과 같은 변혁이 (이번에는 제대로) 일어나서 총체적으로 뒤엎지 않는 이상, 소비사회 이전의 인간성을 회복할 길은 없다는 것이다. 결국 보드리야르의 공헌은 대안을 모색하는데 있지 않았다. 구조를 직시하게 하는 것에서 그의 소명은 끝났다. 두 개의 선택지만 우리에게 남겨 놓은 셈이다. 이 책의 부제에 다시 부부제를 단다면, 이 선택지가 그것이 되어야 한다. 「소비의 사회: 그 신화와 구조: 알고 당할 것인가, 모르고 당할 것인가?」

“소외를 관념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좌절될 수밖에 없다. 소외의 극복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외는 악마와의 거래의 구조 그 자체, 상품사회의 구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32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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