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향한 분투
호크니(David Hockney)는 사실주의, 추상표현주의, 미니멀리즘, 팝아트, 초현실주의 등 회화에서 두드러졌던 모든 형식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버무려냈다. 그의 일생 자체가 사양미술사에서 시각성의 문제에 관한 모든 연구주제들의 집대성이었다. 호크니가 평생에 걸쳐 투신했던 문제는 인간이 세계를 보는 방식을 평면 회화 속에 가장 정확하게(=진실에 가깝게) 구현하는 것이었다.
사람은 단일 시점의 원근법으로 세계를 지각하지 않는다. 유동적인 초점의 파편들이 순식간에 지각체계를 타고 흘러 들어가 과거와 현재의 오만가지 단서들과 통합하여 입체적인 상을 구성한다. 이 역동하는 세계는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의 「회화론(1435)」에서 단일시점의 원근법으로 묘사되는 이상향이 아니며, 카메라가 포착한 찰나의 순간도 아니다. 인간의 시지각은 시공간적 유동성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 유동성은 사물과 인간이 뒤얽힌 역동적인 관계를 파생하며 풍부한 의미작용에 기여한다. 호크니가 수 십장의 폴라로이드 사진을 이어 붙여 하나의 입체적인 콜라주를 만들고, 드라이브 했던 꼬불꼬불한 도로를 한 화면 속에 우겨 넣고, 그랜드캐니언의 파노라마에 소실점을 해체하고, 원근법이 뒤섞인 공간들을 그렸던 이유는 그 풍부한 의미작용을 진실에 가깝게 표현하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위대한 생존 화가의 영상회고전 성격을 띠면서 철저하게 화가의 목소리를 따라간다. 여기에서 화가, 그리고 매우 친한 몇몇 지인들 외에 그 어떤 반론도 개입할 여지가 없으며, 주인공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만한 사소한 요소들마저도 마치 영상기록의 진실성을 담보하는 증거인 것처럼 철저하게 복무하는 방식으로 통제되었다.
호크니와 그 주변 사람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것들이 후대 미술사의 중요한 일부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부터 짐작한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이 많은 영상 기록물들을 이처럼 완벽한 상태로 보존할 수 있었겠는가? 호크니가 새롭게 리모델링한 집에서 의기양양하게 알몸으로 샤워하러 가는 장면, 또 그가 첫사랑의 상심으로 헨리(Henry Geldzahler)의 겨드랑이에 파묻혀 우는 장면, 심지어 고향으로 돌아온 호크니가 입에 담배를 물자 그의 아버지가 그것을 빼앗은 장면까지 말이다. 그때는 ‘브이로그’가 보편화된 시대도 아니었는데!
어쨌든 이 영화는 서구 회화의 모든 양식들을 음미한 뒤 자신만의 방식대로 재해석해 내놓은 호크니에 대한 찬가로서 제 기능을 다 한다. 그가 걸어간 길이 옳았다는 사실은 오늘날 무수한 전문가들과 대중의 열렬한 찬사로, 전시장을 찾는 발걸음들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이 번쩍 뜨일만한 경매가로 입증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평생에 걸쳐 발견한 방법들이 중국에서는 이미 1000년 전부터 널리 받아들여졌던 공공연한 교리였다는 점인데, 그 사실이 호크니의 성취를 폄훼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알다시피, “전통은 사람이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자신의 조상을 선택 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원할 때 집어 들 수 있는 한 가닥 실이 아니다(비트겐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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