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브 히키의 「보이지 않는 용: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데이브 히키의 전복적 시선」

Dave Hickey, The Invisible Dragon

아름다움은 죄가 없다.

“아름다운 작품은 미덕 없이도 살아남는다. 아름다움 없이 미덕만 있는 작품은 그러지 못한다.”

155p

1. 앵? 반 고흐? ㅎㅎㅎ^^;;

얼마 전 한 작가의 개인전 오프닝을 관람하고 뒷풀이에 참석했다. 아무래도 작가들이 모이면 작품과 작업 이야기가 오가게 마련이다. 대화가 이어지다가 ‘예술가들이 좋아하는 예술가’라는 흥미로운 주제에 이르러 모두가 ‘빵터지는’ 순간이 있었다. 이야기인즉, 어느 날 예술가들이 모여서 각자가 좋아하는 예술가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고흐(Vincent van Gogh)를 거론하는 바람에 ‘갑분싸’가 되었다는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는 누구나 알다시피, 강렬한 색과 일렁이는 선으로 인간 내면의 불안함과 외로움을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표현했던 화가다. 그러한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표현력에 비범한 개인사가 덧입혀져 오늘날 온갖 설문조사에서 대중이 가장 사랑하는 예술가로 수위에 오르는 인물이 되었다. 이런 전설적인 화가가 예술가 공동체에서 언급되었을 때 왜 비웃음이 유발되었는가? 참고로 이 이야기를 전한 작가와 그 동료들은 모두 동시대 미술계에서 공인된 상위 수준의 교육을 받은 작가들이었다.

‘예술가가 좋아하는 예술가’라는 타이틀에서 우리 모두가 막연히 갖게 되는 공공연한 기대에 대하여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 정도의 과분한 찬사를 얻기 위해서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야 할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가 떠오른다. 아무래도 누구나 쉽게 그 매력을 알아 볼 수 있는 소위 대중취향 보다는 최첨단을 달리는 예술가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비범한 무언가가 그에게 있어야만 할 것이라고 여겨진다. 예컨대 오늘날이 개념미술의 시대라면, 남들처럼 단순히 예술 개념을 해체하는 수준에서 그쳐선 안 되고 거의 찢어발기는 수준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아니면 정 반대로 그러한 대다수의 경향에 맞서,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 마냥 회화의 본령을 사수하려는 구도자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렇게 최정점에 대한 기대로 가득한 공간에서, 무수한 대중이 들고 다니는 상투적인 아트북 표지에나 어울릴법한 반 고흐가 툭 튀어나오면, 구체적인 이유를 듣기에 앞서 반사적으로 코웃음이 튀어나오게 된다.

오늘날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점유하는 이미지가 위 사례에서 등장하는 고흐의 이름과 묘하게 겹쳐진다.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체가 휩쓸고 간 자리에 다원주의의 요란한 광풍마저 잠잠해진 현 시점에서,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실로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는 디드로(Denis Diderot)가 살롱전에서 거들먹거리며 취미판단하던 시절에 이미 끝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외형적 아름다움을 가지고 왈가왈부 하는 사람들은 아름답지 못한 모든 이미지들을 탄압하는 폭군처럼 여겨지기 시작했고, 모든 기호에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는 기치 아래 추마저도 미의 하위 범주로 편입되었다. 이러한 공식적 담론 하에서, 개인의 미감을 주창하는 비평은 일찌감치 대기권 바깥으로 퇴출된 바, 우리는 오늘날 그것이 어디에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래도 분명히 어딘가 있으리라는 것만 짐작하고 있다. 그러한 짐작의 전제는 각자의 머리속에 아직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취미판단이다. 인간 본연의 보편성을 전제하는 존재론적 추정은 그 효용성이 끝없이 공격받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만큼 믿음직스러운 것이 없다.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2. 치료기관의 등장

데이브 히키(Dave Hickey)의 「보이지 않는 용」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아름다움을 되찾아 구원하려는 야심찬 기획이다. 히키는 새로운 시대의 미술과 관련한 어느 공개 토론회에서 무심코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꺼냈다가 된통 비웃음을 사고 난 후, 왜 이 시대에 아름다움의 가치가 격하되어 버렸는지를 추적하기로 했다. 그 결심에 기름을 부은 것은 메이플소프(Robert Mapplethorpe)의 파격적인 사진들이 야기한 당대의 검열 논쟁이었다.

히키는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이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을 열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히키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무엇을 아름답다고 여기는지에 대하여 대략적인 윤곽이 드러난다. 히키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그 어떤 중재 없이도 의미에 도달하게 하는 이미지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보고 싶어 하고 거기서 의미를 발견한다. 이미지가 충분히 아름답다면 거기에는 그 어떤 해석도 필요하지 않다. 거기서 받은 감동, 그리고 연이어 파생되는 사고가 우리의 시야를 확장하고 무수한 이야기의 가능성들을 만들어낸다. 반면, 아름답지 않은 이미지에는 해석이 필요하다. 그것들은 표면 아래에 보이지 않는 의미들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하고, 보이는 것보다는 잠재된 의미들이 훨씬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의미에 닿을 수 없다. 그래서 중재자를 필요로 한다. 그로 인해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에 공공연한 권력구조가 형성된다. 이 대목에서 아름답지 않은 이미지로부터 가장 큰 이득을 취하고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 분명해진다. 그들은 ‘치료기관’과 ‘마취기관’이다.

치료기관이라는 용어는 히키가 만들었다. 치료기관은 정부의 첫 번째 공식적 기능, 즉 안전의 기능에 충실한 공적 미술기관, 그리고 거기에 붙어먹고 사는 미술시장 및 미술제도 내 온갖 주체들을 통칭한다. 그들은 대중의 취미를 교화하고, 바로잡고, 의미에 주목하게 만들면서 궁극적으로 이 사회를 그들의 방식대로 안전하게 만든다. 의미에 형식이 귀속되는 세상을 꿈꾼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름다운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이미지에는 전복적인 힘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건넨다. 마음을 움직인다. 일단 마음이 움직이면 몸이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치료기관은 아름다운 이미지에 전복적인 힘이 들러붙는 것을 막고자 한다. 그렇기에 미술의 규준을 설정한다. 이미지에서 의미를 뽑아낸 후 독점한다. 치료기관이 통치하는 사회에서, 그들을 통하지 않고는 어디 가서 예술 좀 한다고 말도 꺼내지 못한다. 보아하니 하는 짓이 제법 익숙하다. 종교개혁이 왜 일어났는지를 생각해보자.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로마서 14:12)

“내용보다 아름다움(혹은 아름다움을 내용으로서)을 선택하는 것은 언제나 반란 행위이다.”

148p

3. 치료기관이 하는 짓

치료기관의 역사적 실례로는 나치정권의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 스탈린의 문화 담당 인민위원들, 그리고 알프레드 바(Alfred H. Barr Jr.)가 이끌었던 모마(MoMA)가 대표적이다. 괴벨스와 스탈린이 어떤 방식으로 형식을 내용에 굴복시켰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모마 쪽은 조금 더 미묘하다. 모마는 그들과 달리 어떤 강제력도 발휘하지 않고, 오직 자본과 논리의 힘만으로 치료기관의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미의 폭발적 분화가 일어나려던 시점에, 이를 효과적으로 통제해야 할 필요가 대두되었으므로 모마가 등장하게 되었다. 대단히 시의적절하고 의미심장하다.

모마는 모더니즘 회화에 남성적 힘을 부여했다. 젠더권력의 구조가 미술관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온 것이다. 르네상스의 여성적 회화가 화면 내부에 공간을 만들어서 관람자를 초대한다면, 남성적 회화는 무한히 열린 공간을 빠져나와 관람자의 세계로 침입하는 바로크의 전통을 따른다. 르네상스 회화에서 우리는 초대받은 구경꾼이었고, 아무런 죄의식 없이 두리번거릴 수 있었지만, 바로크 회화에서 우리는 그림 속 존재로부터 침입을 당한 일개 구경꺼리로 전락한다. 이제는 보호자가 필요하다.

모마는 화이트 큐브라 불리는 혁신적 배치의 기술을 통해 여성적 회화를 골방으로 옮겼고 그 자리를 웅비하는 남성적 회화로 대체하였다. 세잔(Paul Cézanne)으로부터 피카소를 경유하는 그 계보의 정점에 폴록(Jackson Pollock), 로스코(Mark Rothko), 뉴먼(Barnett Newman)을 위치시킨다. 그렇게 뉴욕 화파의 시대가 열렸다. 미술시장은 폭발했다. 이 과정은 남성 모더니스트들이 이성애자 비평가 및 후원자들과 손잡고 일궈낸 성취다. 이 과정에서 아름다움은 여성적인 것, 심지어는 남성동성애자들의 전유물로 몰려 화형 당했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지금도 남자가 분홍색 셔츠를 입으면 자연스럽게 게이로 간주하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한 사회가 몇몇 이미지들이 확정적으로 유해하다는 가정을 잠자코 받아들이면, 그 순간 그 사회는 어떤 이미지라도 유해한 것으로 규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44p

4. 新 감시와 처벌 (feat. 미술계)

미술계에는 수많은 주체들이 있는데, 그들을 무한한 공간에 펼쳐 놓으면 두 개의 상반된 극점이 보인다. 미술상(美術商)과 신생공간이다. 미술관, 학계, 작가, 비평가들은 이 양극단을 오가며 자신의 살 길을 찾는다. 미술상은 작품을 팔아서 이득을 취한다. 철저한 상업성의 논리로 작품에 접근한다. 이들에게는 형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트페어에 가서 한 바퀴 둘러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신생공간은 미술상과 전혀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미술상과 미술관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을 품는다. 이들은 세상과 예술을 구원할 수 있는 야심찬 의미들을 작품 속에서 발견하길 기대한다.

이들의 명확한 대비는 푸코(Michel Foucault)가 「감시와 처벌」에서 제안한 두 개념과 연결된다. 왕은 죄인의 겉모습만을 본다. 죄인이 충분히 뉘우치는 것처럼 보이고,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모양새를 갖추면 그의 죄를 사한다. 그의 내면에 아직도 죄의 싹이 자라나고 있는지는 알 수도 없고 딱히 관심도 없다. 반대로 벤담(Jeremy Bentham)의 판옵티콘(Panopticon)은 죄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죄인은 감시자를 볼 수 없고, 오직 스스로가 언제 어디서든 감시당할 수 있다는 사실만을 인지할 따름이므로, 점차 신체는 물론 영혼까지 감시에 순응하게 된다.

왕의 처벌은 미술상에, 판옵티콘은 진보적 신생공간에 비교할 수 있다. 미술상은 팔아먹기 좋은 형식에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 방관 속에서 무수한 의미의 싹들이 자라날 수 있었다. 하지만 신생공간은 작품의 의미를 사회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에 맞추는데 관심이 있다. 그래서 형식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신뢰하지도 않는다. 형식만 보는 자를 공공연하게 폄훼하면서 스스로는 형식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검열한다. 우리가 만약 죄인(그것도 아주 판결이 까다로운 사상범)이라면 누구를 찾아가야겠는가? 이래도 미술상은 악(惡), 신생공간은 선(善)인가?

“미술시장의 신비는 매우 유용한 돈을 주고 별로 유용하지 않은 미술품을 소유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118p

5. 아름다움의 쓸모

아름다움에는 이로움이 많다. 무엇보다 그것은 오래 남는다. 지금 각 국가의 대표적인 국립미술관/박물관에 자랑스럽게 안치된 대표 컬렉션이 무엇인지 떠올려 보라. 아름다운 것은 누라 뭐래도 너나 할 것 없이 자발적으로 지켜준다. 아름다운 것에 문제가 생기면 가장 인색했던 사람조차 나서서 자발적으로 고쳐주기까지 한다. 조금 다른 예지만, 우리 의식주에 아무런 실용적 가치도 주지 못하는 고양이가 이토록 번성한 포유류가 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보고 싶어 할 뿐만 아니라 그것과,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 나누고 싶어 한다. 너무나 아름다운 얼굴을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할 때,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무진장 노력해보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던 기억을 떠올려 보라.

아름다움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투표로 이어진다. 그 투표를 파라고네(Paragone)라고 한다. 파라고네는 비슷한 것들끼리 비교하면서 우열을 가리는 것이다. 가장 뛰어난 수태고지 그림, 가장 뛰어난 다비드상, 가장 뛰어난 비너스 그림 같은 식이다. 파라고네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만한 방법이 없다. 지금도 우리는 비슷비슷한 인간들 사이에서 그나마 우리를 대표하는데 적합해 보이는 사람을 분간해서 한 표를 던지지 않나? 파라고네는 특정 시대, 특정 지역의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미감을 암시한다. 그것이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고 한들, 인류문화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열쇠가 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대번에 알아보고, 거기에 대다수의 의견이 모이며, 그것은 우리를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아름다움과 아름다움의 너그러운 허용,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아름다움이 알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회복과 구원을 주지 못한다.”

109p

“안전이 행복의 우위에 서며 언제나 정부가 이긴다. 여기서 희생되는 것은 언제나 아름다움이다.”

122p

아름다움을 보면 그것에 참여하고 싶다. 이 마음은 경험으로 이어진다. 경험은 피, 호흡, 근섬유 하나하나가 반응하는 것이다. 잡지에서 읽은 꿀팁을 연인과의 실전 잠자리에서는 거의 활용할 수 없듯이, 경험의 순간에 이성적 지식이나 판단은 중요하지 않다. 아름다움의 영토에서,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를 유영할 뿐이다. 치료기관이 미적 경험의 순간에 개입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중재되지 않은 미적 경험은 위험하다. 치료기관은 정제된 지식과 거스를 수 없는 정답에 대한 열망을 부추기고, 단일한 길을 지시한다. ‘등산로를 벗어나지 마시오’라는 경고 문구만이 미술관에 가득하다. 등산로를 벗어나면 생태계가 파괴되지만, 치료기관의 경고를 무시할 때 파괴되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는데도 말이다.

“치료기관이 수명을 다하는 것은 자금이 부족해서이지 의미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우리야말로 의미가 부족하면, 또한 기쁨이 부족하면 죽는다.”

109p

6. 고로, 아름다움은 죄가 없다.

보수적인 사회는 아름다움이 가져올 영향을 두려워하는 사회다. 그곳에서는 아름다움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행동하게 만들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여겨진다. 헬레네의 아름다운 용모 때문에 트로이 전쟁이 발발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금기를 마주할 때마다 이 금기로 인하여 누가 이득을 취하고 있는지를 되물어야 한다. 최소한 구경꾼들은 금기로부터 이득을 취한 적이 거의 없다.

“이미지의 효용은 비평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어야지 비평의 결과일 수 없으며, 비평의 주체여야지 비평의 객체일 수 없습니다.”

2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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