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섭의 「내 곁의 키치: 궤도를 벗어난 사물의 일상」

키치의 인문학

어느 주말에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골목에 책 몇 권이 버려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춰보니 흥미로운 책들이었고,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내 곁의 키치」도 그중 한 권이다. 건국대학교 디자인과 교수님이 쓴 것이고, 건국대학교 인근 골목길에 버려져 있으니, 짐작컨대 디자인 분야의 교양과목 내지는 저학년 전공과목 교재로 활용되다가 당초 책 주인이었던 학생이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책만 버리고 갔으리라. 책 곳곳에 학습한 내용이나 수업 중 던져진 과제의 내용이 필기되어 있어 이 책이 한때 교재였음을 증명한다. 대학가 자취촌에서 책과 고양이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유기된다.

책에는 원 소유자였던 학생의 이름도 적혀 있다. 나의 탁월한 구글링 역량으로 그의 이름을 검색해보니, 그는 건국대학교 커뮤니케이션디자인학과를 2016학년도에 졸업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졸업작품은 꽤나 참신해 보인다. 좋은 책을 (의도치 않았겠지만) 넘겨줘서 고맙다.

저자 오창섭은 키치에 대하여 유별난 관심을 지닌 디자이너다. 그 관심은 「디자인과 키치」라는 제목으로 첫 결실을 맺었고, 15년 후 내놓은 개정판이 「내 곁의 키치」다. 아마도 그의 머리 속은 키치를 발견하고 즐기려는 욕망으로 가득한 것 같다. 키치는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지만, 누구라도 그것을 본다면 키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무언가다.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키치에 대한 가장 명쾌한 정의는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남겼다. 즉, 아방가르드가 예술의 과정을 모방한다면, 키치는 예술의 결과를 모방한다. 이러한 정의는 그린버그가 가지고 있던 이원론적인 사고방식, 즉 고급예술과 저열한 대중문화의 대비를 보여준다. 그가 이 말을 꺼낸 이유는 아방가르드 예술이 대중문화와 구별되게 순수하고 급진적인 형태를 추구하면서 회화적 평면성을 계속 지지해 나가는 방향으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의 정의는 새겨들을만하지만, 가치평가는 문제가 된다. 키치는 고급예술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저열하고 무가치한 것이 아니다. 키치는 대다수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왜 그것에 끌리는지를 설명하는 매우 유용한 지표다. 특정 시공간의 키치는 그 문화권의 보편적 욕망을 보여주는 창구가 된다. 그래서인지 키치를 그토록 깎아 내렸던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회화는 키치를 고급예술의 맥락에 전유했던 팝아트에 의하여 무너져 내렸다. 그의 생전에 벌어진 일이다.

키치는 대상의 본질에 관심이 없다. 오직 형태에서 표상되는 단편적인 느낌들에 철저히 소구한다. 키치는 삶의 맥락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나고 또한 삶에 미치는 효과들에 관심이 있다. 정신성이나 보편성에 대한 사유는 키치의 몫이 아니다. 지금 당장 눈길을 사로잡는 것, 주머니를 열게 하는 것, 거부하려 해도 시지각을 통해 미끄러져 들어오는 것이 바로 키치다. 키치는 예술의 외형을 끌어와 거기에 붙어 있는 권력과 차이화의 기의를 전유하려 애쓴다. 키치를 소유하는 행위는 그 외형에 깃들어 있는 관념을 전유하려는 행위이다. 이러한 작용은 팝아트가 대중매체의 기표를 끌어다가 고급예술의 맥락에 결부시켰던 것과 반대방향의 움직임이다.

대상의 절대적 성질이 기치와 고급예술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칸트(Immanuel Kant)의 미학에서 무관심적 관조에 의한 취미판단은 인간의 보편성을 전제로 할 때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가능할 것으로 여겨졌지만, 실상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경험과 학습에 의지하여 세상을 바라본다. 지금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인간 본연의 선험적인 형식인지, 사회구조에 의하여 학습된 결과물인지 알 길이 없다. 구조에 속해 있는 인간은 구조를 벗어난 사고를 할 수 없다. “아무런 입장도 갖지 않은 주체란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무입장적인 이해란 것도 있을 수 없다(리차드 팔머_Richard E. Palmer).” 이러한 상황에서 특정한 대상 자체에 깃들어 있는 절대적 기준을 토대로 키치를 판명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루벤스(Peter Paul Rubens)의 명작이라도 아부다비에 사는 거부가 자신의 대저택 엘리베이터에 걸어 놓는다면, 그 순간 키치가 된다. 키치는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삶의 결핍과 필요가 키치를 만든다. 우리네 삶은 복잡하고 혼종적이고 예측불가능하다. 키치가 삶의 맥락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만큼, 키치 또한 복잡하고 혼종적이고 예측불가능하다.

키치는 인간 본연의 심리에서 기인하여 그 결핍을 채워주는 것이므로, 키치를 분석한다는 것은 동시대 인류의 결핍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분석하는 과제가 된다. 키치는 무엇을 하는가? 첫째, 키치는 흘러간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채워준다. 우리는 현재의 어려움에 직면할 때 과거를 미화하면서 동경한다. 키치는 우리 내면에서 좋았던 시절로 포장된 그 시간에 닿을 수 있도록 손을 뻗는다.

둘째, 키치는 과시의 표현이다. 현대는 완연한 소비사회로 접어들었고, 모든 사물과 인간의 육체마저 상품이 되어 차이화의 기호로 소비되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상위 계층의 부와 권력을 욕망하는 계층에게 키치는 그것의 외형을 손쉽게 전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재용 회장의 롤스로이스는 그저 자동차에 불과하지만, 연봉 5천만원을 받는 직장인에게 BMW 5시리즈는 키치가 된다.

셋째, 키치는 유희적 인간의 표상이다. 논다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은 시간을 보낼 능력이 있다는 의미이다. 소비사회에서는 생산을 해야만 먹고살 수 있는데, 노는 시간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산업사회의 톱니바퀴들 사이에서 차이화의 기호를 하나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인스타그램에 일하는 시간이 아닌 노는 시간들을 업로드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노는 시간은 (아직까지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노는 시간은 규범에 얽매인 일상으로부터 탈피하여 디오니소스적 광기를 불러들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 광기는 나 자신이 오직 생산을 위하여 존재하는 부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아무런 쓰잘머리 없는 장식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물건은 그것의 소유자가 미처 실현하지 못한 유희적 인간으로서 욕망을 대신 분출하며 대리만족을 준다.

오창섭의 저서는 이러한 키치의 본질에 대하여 폭넓은 인문학적 성찰과 다양한 사례로 접근한 독특한 책이다. 하지만 똑같은 논지가 책 전반에 걸쳐 계속 반복된다는 점은 지적할 필요가 있다. 키치와 고급예술을 구분하는 기준이 대상 자체에 존재하지 않고 삶의 맥락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을 여러 차례 풀어서 전개하기 때문에 금세 지겨워진다. 또한 키치가 가지고 있는 순기능에 대해서도 여러 장에 걸쳐 반복한다. 반복하는 말이 사실은 같은 말이다. 그러니 차라리 키치의 본질에 대한 고찰은 1장(삶에서 디자인 보기)과 5장(키치 소비에 내재한 심리)에 있는 내용으로 모두 갈음하고 나머지는 더욱 풍부한 사례들로 채웠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사례 하나하나 여러 방향으로 곱씹어보다 보면 충분히 더 많은 의미들을 전할 수 있을 터인데 던져주기 식으로 끝나니 아쉽다. 나는 저자가 제시한 90년대 키치의 사례들에 상당히 매료되었고, 일부에 대해서는 더 많은 정보들을 검색해보기도 했는데ㅡ예를 들어 롤라이(Rollei) 시계가 삼성그룹의 야심작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한국에 밥 로스(Bob Ross) 관련 사업을 추진하는 공식 지사가 전국에 퍼져있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ㅡ, 레트로 열풍이 최근 5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90년대 키치 사례의 아카이브 구축은 시각문화 연구의 혁신을 위하여 시급한 과제라고 사료된다. 그 연구에는 미래에 키치로 인식될 지금의 산물들을 예측하는 작업도 포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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