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근의 「나의 로망, 로마: 여행자를 위한 인문학」

지적인 로마 여행을 꿈꾼다면,

내가 김상근 교수를 처음 본 것은 EBS에서 방영한 <세계테마기행: 이탈리아 르네상스 기행> 편에서였다. 이 여행 다큐멘터리에서 김상근 교수는 다른 배낭여행족들과 달리 깔끔한 차림새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핵심 거점들을 두루 다니며 인문학적 배경 지식들을 설파한다. 광장을 가득 메운 수많은 군중들의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팔을 휘적거리며 셰익스피어 연극톤으로 역사와 고전에 대하여 웅변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르네상스에 대하여 관심 있거나 이탈리아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찾아보시길!

EBS, <세계테마기행: 이탈리아 르네상스 기행>, 1/3편

그가 쓴 카라바조(Caravaggio)의 전기도 읽었다. 당시 카라바조는 내가 가장 매료되어 있던 화가였고, 김상근 교수가 쓴 전기는 사실상 우리나라에 출간된 유일한 카라바조의 전기다. 이 책은 카라바조의 드라마틱한 삶에서도 특히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넘나드는 복합적인 내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아마도 저자 자신의 인생관 자체를 관통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스스로가 신학박사이면서도 인문학에 그야말로 미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르네상스에 매료된 이유도 이러한 양가적인 내면의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그 시대는 정치와 문화 전반에 걸쳐 여전히 중세의 기독교적 전통이 견고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과학적, 인문학적 성찰에 의한 걷잡을 수 없는 균열이 가속화되던 격변기였다. 고대의 인문학적 성취들이 재평가되면서 인간 내면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종교, 인문, 과학, 역사, 철학 등의 횡종연합이 가속화되던 시점이었다. 그 르네상스 변혁의 중심에 로마가 있었다. 르네상스가 처음으로 눈을 뜬 고대는 이집트나 그리스가 아닌, 어디까지나 로마 제국을 통해 전해진 고대였고, 성과 속의 극명한 교차가 가장 두드러진 도시도 로마였기 때문이다. 카라바조를 키운, 그리고 그를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간 도시도 로마다. 저자가 로마를 로망으로 꼽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 책은 저자가 서두에서 약속한대로 로마의 역사와 인문학적 배경에 대하여 매우 쉬운 논조로 접근한다. 어려운 사상적 개념들을 늘어놓기 보다는 특정 지역에서 오늘날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지형지물들을 중심으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면서 과거의 역사적 배경들을 풀어나가는 형태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테르미니역(Stazione Termini) 지하의 맥도날드에 보존된 세르비우스(Servius Tullius) 성벽을 보고 로마 왕정의 대략적인 흐름을 알려준다. 판테온(Pantheon)과 트레비(Trevi) 분수를 건립한 아그리파(Marcus Vipsanius Agrippa)의 업적과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와의 우정을 설명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욕장과 카라칼라(Caracalla) 욕장은 쇠하는 정권이 포퓰리즘에 영합했던 증거였음을 보여준다.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개선문은 중세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는 점을 밝힌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에 국한되지 않고, 당대에 서술된 인문학적 고전들이 어떤 배경 속에서 탄생했으며 어떤 내용들을 담고 있는지 함께 보여주면서 ‘장소-역사-문학’의 연결지점들을 드러내 보이는데, 더 깊은 공부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길잡이가 될 듯하다.

저자는 역사와 인문학에 그치지 않고 로마에서만 만날 수 있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카라바조,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 등 거장들의 걸작들도 짚고 넘어가면서, 이성과 감성의 충족을 위한 로마 여행의 충실한 가이드 역할을 해낸다. 이 책 전반에 걸쳐 저자의 어조는 <세계테마기행>에서 우리가 만났던 그 어조와 너무도 흡사하기에, 이 책과 함께 로마 땅을 밟는다면 최고의 인문학 강사를 끼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문학 강사는 제 발로 걷는 반면, 이 책을 배낭에 넣고 다니는 일은 만만치 않다. 꽤 무겁다. 사람들이 비싼 돈 주고 현지 가이드를 고용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장소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에 서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여러 챕터에 분절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네카(Seneca), 네로,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 등 주요 인물들은 여러 장소에 흔적들을 남겨 놓았기 때문에 각 장소를 다룰 때 마다 소환되는데, 나처럼 로마사에 무지한 독자라면 그 이야기들을 시대의 흐름에 꿰어 맞추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동일한 인물 및 사건을 여러 페이지에서 다룰 때는 몇 페이지를 참고하라는 식으로 주석을 달아 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편집자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무지한 내 탓이다.

아쉬운 점을 하나만 더 꼽자면 미주 편집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4장의 마지막 주석이 24번에서 끝나는데, 주19부터 5장에 속하는 것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주석 뒤적거리다가 꽤나 헛갈렸다. 중대한 옥에 티이므로 증쇄할 때 수정이 시급하다. 이 대목에서는 편집자를 탓해야 한다.

이 책은 2019년 6월에 출간되었고, 나는 9월에 로마행이 결정된 상태였다. 내가 좋아하는 저자가, 내가 갈 도시의 인문학적 입문서를, 심지어 그곳에 가기 3개월 전에 내주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행운이었다. 좀처럼 같은 책을 두 번 읽지 않는 내가 로마에 가기 전에 한 번 읽고, 돌아와서 또 한 번 읽었다. 이 책 한 권으로 나의 얕은 지식이 비약적으로 풍성해지지는 않았지만, 생소한 고유명사들을 한 번이라도 훑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었다.

로마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뜨거웠고, 더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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