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 동시대 미술과 역사의 울타리」

Athur C. Danto(1997), After the End of Art: Contemporary Art and the Pale of History

“단토 선생님, 열등감은 아니길 바라요”


1. 개관

철학자에서 미술비평가로 활동반경을 넓힌 아서 단토(Authur C. Danto)가 동시대 미술의 변화를 바라보며 남긴 유명한 테제를 담은 책이다. 그 테제란 ‘예술의 종말’이다. 여기서 예술의 종말이란, 예술의 제작과 그것에 대한 열광이 끝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미술사의 거대 서사가 종결되었음을 의미한다. 미술사가 마땅히 흘러가야 할 방향, 당위적인 명분 따위가 사라지면서 역사의 굴레에 속박되었던 모든 것들이 가능해지는 시대가 도래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지금 속한 ‘컨템포러리’는 이른바 탈역사적 시기이다.

단토는 이미 1984년에 예술의 종말을 선언하였는데, 그 선언의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앤디 워홀(Andy Warhol)이 마련해 주었다. 1962년에 혜성같이 주류 화단에 등장했던 워홀은 2년 만에 <브릴로 상자(Brillo Box(Soap Pads))>라는 역사적인 작품을 내놓았다. 미술관에 놓인 <브릴로 상자>가 예술작품으로 받아들여진다면, 그것과 동일한 외관을 지닌 슈퍼마켓의 ‘진짜’ 브릴로 상자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미술의 재현적 기능과 본질적인 정의, 그리고 미술제도의 역할과 같은 단토의 숙고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 내용을 짧게나마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미술이 특정한 대상을 아름답게 재현한 무언가라는 일반적인 이해는 폐기되어야 하며, 그것은 절대로 예술의 정의가 될 수 없다. 서구사회에서 예술이 재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관념은 플라톤이 재현적인 예술의 가치를 격하시켰던 사실로 알 수 있을 만큼 오래된 생각이다.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즉, 대체로 ‘잘 확립된’ 예술 개념이 15세기에 시작되었다고 간주할 때, 재현을 예술의 본질과 동일시하는 관념은 약 500년간 견고한 생명력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외관이 동일한 두 대상 중에서 어느 하나는 예술작품으로 추앙을 받고, 다른 하나는 슈퍼마켓에서 짐짝처럼 취급된다면 예술을 결정하는 것은 외관이 아닌 무언가라는 결론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재현의 압박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무수한 시도가 횡행하였지만, 한갓 사물과 구별되지 않는 무언가를 미술관에 안치한 뒤샹(Henri Robert Marcel Duchamp)과 워홀로부터 예술의 본질에 대한 재검토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 대목에서 단토는 곰브리치(E. H. Gombrich)의 역작 「예술과 환영」을 꺼내어 이 대선배가 반쪽만 보고 있음을 강조한다. 즉, 곰브리치가 ‘만들기’와 ‘맞추기’로 강조한 시각성 및 표현기술의 역사는 오직 회화적 재현에만 초점을 맞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회화가 아닌 것, 재현이 아닌 것이 배제되는 까닭에 미술사의 내러티브가 종결된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반쪽짜리라는 것이 단토의 견해다.

재현 중심의 내러티브를 철학적으로 종결한 주인공은 칸트(Immanuel Kant)를 초대 모더니스트로 옹립한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였다. 그린버그 미학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특정 매체가 그 매체만이 할 수 있는 순수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회화가 평면이라는 본질을 벗어날 수 없다면, 그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야 함은 물론, 다른 매체들이 모방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 본질을 아름답게 표상해야 한다. 회화가 삼차원을 재현한들 조각에 미치지 못하며, 그 안에 거대 서사를 녹여낸들 소설이나 영화 같은 서사적 매체에 미치지 못함이 자명하므로 회화는 벗어날 수 없는 정체성인 평면성을 강조함이 마땅하다. 그린버그의 관점에서 그 평면성을 자각하고 당당하게 드러낸 최초의 아방가르드는 마네(Édouard Manet)였고, 그것을 완성한 것은 폴락(Jackson Pollock), 로스코(Mark Rothko) 같은 뉴욕 화파였다. 알다시피, 그린버그는 뉴욕에서 태어나고 뉴욕에서 죽었다.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회화론은 오래가지 못했다. 폴락이 「LIFE」 紙에서 ‘가장 위대한 생존 미국화가’로 언급된 해가 1949년이고, 워홀이 <브릴로 상자>를 내놓은 것은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후였다. 바사리(Giorgio Vasari)가 주창한 재현의 시대가 500년을 이어간 반면, 그린버그의 모너니즘 회화는 팝아트와 개념미술에 자리를 내주기까지 고작 20년 정도 활활 타오른 셈이다. 그린버그의 기준을 따라, 마네가 낙선전에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출품한 1863년부터 본격적인 모더니즘 회화가 시작되었다고 간주하더라도 그린버그의 시대는 딱 100년이다. 이 시대를 바사리 시대와 구분하는 것이 온당한가에 대한 논의는 둘째치고, 일단 우리가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현대적 관점의 예술이 시작되고 나서 총 세 개의 시대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곤충의 몸뚱이처럼 단순화하면, 재현의 완성이 중심이 되는 바사리 시대가 있었고, 그 후에 매체의 고유성이 드러나는 그린버그적 아방가르드-모더니스트 시대가 이어졌으며, 그 이후 역사가 종결된 ‘예술의 종말’ 시대가 열렸다. 예술의 종말은 모든 것이 가능한 마지막 시대이므로 그 후에 무언가가 더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은 불가능하다. “종말에 이른 것은 내러티브이지 그 내러티브의 주체는 아니다(42p).”

2. 예술 vs 철학

여기까지가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의 거의 전부이다. 예술의 종말이 무슨 뜻인가는 책의 전반부에 집중적으로 논의되어 있으므로 이 만만치 않은 책의 1/3만 읽어도 저자가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모두 받아들인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들고 있는 책은 중고로 구했는데, 공교롭게도 책의 전반부 1/3까지만 치열한 학습의 흔적이 있다….. 나머지 분량을 채우고 있는 것은 구체적인 사례들과 역사적/철학적 고찰인데, 그 내용의 대단함보다는 그렇게 포장해내는 저자의 대단함이 더욱 두드러지는 분량이다. 지금 와서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관념들이 ‘예술의 종말’이라는 거창한 테제로 포장되면서 철학적 의미가 부여되는 과정들을 살펴보자면, 확실히 철학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예술의 표현과 내용 측면에서 한계가 무너져내린 그 시점의 당연한 현상들에 대한 단토의 철학적 의미부여가 너무나 호들갑스럽고 과잉이라고 느꼈지만, 나 자신이 그때, 그 자리에서 미적 경험을 쌓지 못했기 때문에 단토의 주장이 제기된 당시를 기준으로 그 주장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이 책에 자주 인용된 뵐플린(Heinrich Wölfflin)의 말처럼, “모든 시대에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므로, 그 시대에 남들보다 한발 앞서서 의미 있는 해석을 내려놓은 것 자체는 존중할만하다. 그래도 무조건적인 ‘예스맨’이 되기에는 못내 아쉬우므로 예술의 종말이라는 테제에 대해서 더 깊이 살펴보자.

예술의 종말은 미술사의 당위적 서사가 모두 무너졌기 때문에 그 무엇도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동안 미술사에서는 미술인 것과 미술이 아닌 것에 대한 공고한 기준이 존재했고 그것은 역사의 경계(울타리)로 존재했다. 미술은 미의 성전에 안치되어 유구한 칭송을 받았으나 비미술은 차가운 경계 밖에서 신음했다. 예술의 종말이 도래함으로써 이제 경계 밖에 있었던 것들이 예술의 공민권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탈역사적 예술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예술의 종말은 정보의 혼란, 미적 엔트로피, 그리고 완전한 자유로 정리할 수 있다.

예술의 종말은 ‘왜 나는 예술작품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시작한다. 무언가가 예술작품이라면 그렇지 않은 대상과 차이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숙고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세상을 인식하는 주체라고 할 때, 첫 번째로 규정해야 하는 대상이 나 자신인 상황과 같다. 어떤 존재가, 독립된 인식 주체로서 인식할 수 있으려면 스스로를 지각하고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린버그가 모더니즘 회화론에서 ‘회화가 회화임을 자각하라’고 강조했던 것처럼, ‘예술이 예술임을 자각한다’면 그 예술을 예술답게 하기 위한 그 어떠한 역사적 당위성도 필요하지 않다. “철학에서의 검증주의는 미술이론에서의 모더니즘과 매우 유사하다(270p).”

“예술은 우리를 지적 고찰로 초대하는 바, 그것은 예술을 다시 창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술이 무엇인지를 철학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이다.”

G. W. F. 헤겔

여기까지는 수긍 가는 대목이 많다. 하지만 단토가 자꾸 철학을 강조하면서 나의 심기는 불편해진다. 단토는 기본적으로 헤겔주의자이므로 종교가 예술로, 예술이 철학으로 나아가는 역사적 경로에 기초한 설명을 이어나간다. 그러면서 예술이 결국은 철학으로 진보할 것이고, 예술과 비예술을 판정하는 주체도 철학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예술의 종말을 불러온 것은 예술가들(혹은 워홀 한 사람)의 투쟁이었으나, 이제 예술이 종말을 맞은 이후 그 예술철학을 발전시켜 나갈 주체들은 철학자들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1960년대에 예술의 본질에 대한 자각이 예술가들 사이에서 서서히 부상했던 시기를 회상하며,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에 대해서 “철학적 사유를 할 수 있는 예외적인 예술가”라고 썼다(60p). 또한, <브릴로 상자>처럼 예술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순간에 도달하면, “예술이 자기 자신을 철학적으로 정의내리는 일에 이제 더 이상 책임을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95p). “그것은 이제 예술철학자들의 과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 관념에는 이미 예술가-철학자의 분리, 그리고 예술에서 철학으로의 진화라는 선형적 발전 경로가 예견되어 있다.

예술의 종말에 철학자들이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이 대관절 무엇이관데 단토는 예술계에서 자신의 지분을 형성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는 것일까? 그에 따르면, 예술은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자기 자신에 대한 타당한 정의를 점점 더 많이 발견하고자”하는데, 이것은 예술이 아닌 철학이 해야 할 일이다(257p). 그러면서 예술의 종말 이후 예술의 문제를 자신(철학자)이 넘겨받았다고 선언한다.

“예술의 문제에 대한 철학적 해결책의 토대는 이미 수립되었으며, 이제 이것은 더 이상 예술가들이 추구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마침내 철학자들의 손에 넘겨졌던 것이다.”

265p

자신이 예술의 철학적 과제를 넘겨받은 이유는 간단하다. 예술의 종말 이후의 “예술가들은 이 새로운 사고방식을 철학적으로 통제할 만한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272p). 그래서 그들은 모더니즘의 끝자락에서 한 줄기 빛처럼 쏟아져 내려온 ‘프랑스發-허무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의 조류에 쉽게 휩쓸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토가 볼 때 푸코( Michel Foucault), 데리다(Jacques Derrida),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등으로 대변되는 프랑스發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체는 모더니즘이 종결된 이후의 대안이나 핵심이 될 수 없었다. “해체론적 설명은 설령 맞다 하더라도 문제의 핵심─컨템포러리 미술사의 심층구조─에 육박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276p).” 그러면서, 해체가 아닌 대안적 다원주의로 향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다원주의는 단토가 예술의 본질적 정의를 꼽을 때 그 중심에 들어가는 항목이다. “다원주의가 실제로 역사적으로 실현되었건 않았건 간에, 예술상의 본질주의는 다원주의를 수반한다(358p).” 즉, 우리가 정설로 받아들이는 역사의 울타리에는 부당하게 예술의 범주에서 제외된 수많은 작품과 예술가가 존재함에도, 예술의 본질 자체가 다원주의를 함의하고, 또 표방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리하자면, 단토가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에 매달린 예술가들은 대안적 다원주의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허무주의적 해체에 매달린 것이고, 철학자인 자신은 바람직한 방향을 알고 있으므로, 예술철학을 통해 정도를 보여야 할 소임을 맡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예술의 개념적 혁명, 즉 ‘그냥 예술’에서 예술철학으로의 위대한 전환에 있어서 기념비적 첫걸음을 뗀 존재라는 자의식을 숨기지 않는다.

“우리가 미술상에서의 개념적 혁명들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한, 그것은 미술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개념적 혁명들이 있을 수 있으려면 어떤 초역사적인 미술개념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초역사적 미술개념을 분석하는 것이 예술철학의 과제인데, 내가 생각하기에 이 과제의 몇몇 발걸음은 이미 내디뎌졌고 그 중 일부는 나 자신에 의해 내디뎌졌다고 본다.”

343p

책에 부록으로 붙어 있는 역자해설에는 단토가 예술을 철학으로 향하는 경로로 봤다는 점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술은 종국적으로는 철학에 의해 대체될 수밖에 없다. (혹은 예술가가 철학자가 됨으로써 예술이 철학이 될 것이다.) 이런 일이 발생할 때, 예술 자체는 종언을 고한다. 물론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겠지만 말이다. 단토의 헤겔적 가정은 예술과 예술창작은 완전한 철학적 자기인식을 향하는 과정상의 한 단계이다라는 것이다.”

420p

3. 맺음말

결국, 단토가 쓴 이 육중한 책은 예술과 철학의 분리와 위계화를 시도하고, 선정적인 용어로 관심을 끌면서 자기 자신의 브랜드를 강화하고, 거기에 지속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사회적 자본을 쌓으려고 노력하는 이론서로 정리할 수 있다. 예술의 종말이라는 테제는 충분히 관심을 끌만 하며, 즉각적인 비판을 끌어내기에도 더할 나위 없기에 그의 전략은 성공을 거두었다. 나부터도 지금 이렇게 보람없이 글을 써가며 비판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 철학자가 철학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미켈란젤로가 회화를 천시하고 조각을 옹호했다고 해서 누가 그를 편협하다 손가락질하겠는가? 다만, 예술과 철학의 선 긋기, 양자 간의 진화론적 계보 만들기, 새로운 테제에 대한 자신의 지분 강조하기 등을 계속 보고 있자면, 예술가를 꿈꿨으나 결국은 철학자가 되어버린 한 지식인의 열등감이 느껴져 마음이 불편해질 뿐이다.

내가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예술가들의 철학이 철학자들의 그것보다 낫다거나, 예술가의 철학적 과제를 철학자들에게 넘겨주는 것이 부당하다는 말이 아니다. 예술가들, 그리고 그들의 작품들이 없었다면 단토의 (예술과 관련한) 비평작업, 강연, 인세, 그리고 거기에 수반되는 명성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애초에 예술과 철학은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제작되고 숙고할 수 있을 따름이다.

미술에 대해서 펜대를 놀리는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어디에 기생하면서 먹고 사는지에 대해서 잊을 때가 있다. 예술의 조류를 바꾸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진 비평은 환영할만하지만, 선후(先後) 관계 자체를 착각하는 비평은 거북하다. 아무리 예술의 패러다임을 뒤흔들만한 위대한 예술철학이라 할지라도, 이미 창작된 실체에 주석달기로 시작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4. 덧붙여,

  • 책을 덮으며 궁금해진다. 예술의 종말이라 할 수 있는 이 전폭적인 다원주의가 정말 ‘최종 상태’라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어느 하나의 기준이 역사의 울타리를 형성하여 무언가를 몰아낼 순간이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 모든 질문을 떠나, 지금이 정말 모든 것이 가능한 상태이기는 한 것일까? 우리는 현재에 귀속되어 있으므로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없다. 그저 예언할 수 있을 따름이다.
  • 설문조사를 통해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그림을 구현했던 비탈리 고마르(Vitaly Komar)와 알렉산더 멜라미드(Alexander Melamid)의 프로젝트가 흥미로웠다.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미술사 연구에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하는 가능성에 사로잡혀 있다. 분명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넘치는 영역이라고 본다. 고마르와 멜라미드의 프로젝트는 이러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첫 사례인 듯하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에서도 알 수 있듯, 대중이 원하는 것을 조사해서 그린 그림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 감수성의 영역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다만 그것이 눈앞에 등장했을 때, ‘아, 저게 내가 원했던 바로 그거야!’라고 외칠 수 있을 따름이다. 친구에게 이상형의 조건 백 가지를 늘어놓고도 정작 결혼은 그와 정반대의 사람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애플社가 시장조사를 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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