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작가상 2019 展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코끝이 매콤한 가을이 오면 올해는 ‘올해의 작가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그렇게 올해도 서울관을 찾았다. 올해의 작가상이 어떤 의미인지는 2018년에 이미 주저리주저리 다 썼으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올해의 ‘올해의 작가상’은 조금 남다른 구석이 있는데, 첫째로, 이 전시가 막이 오르기 직전에 ‘작년의 작가상’ 유력 후보 중 하나가 자살했다. 나는 2018년의 리뷰에서 그들이 내 취향과는 달리 결국 상을 받지 않을까, 하고 예상했었다. 그만큼 그들의 작품은 미술의 ‘사회적 책무’가 유달리 강조되는 현시류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사인(死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고 있지만, 죽은 자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말을 아끼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진실은 가려져 있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들을 대상으로 헌신한 작가가 죽었다면, 생활고 탓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추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지난날의 비슷한 실례들과 아픈 추억들은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이러한 추정은 문화예술에 대한 적극적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한 정책 당국을 탓하는 성토로 이어지기도 한다(관련 기사). 이 맥락에서, 그들이 올해의 작가상 후보였다는 사실이 너무나 드라마틱한 캐치프레이즈를 제시한다. 이런 식이다: ‘올해의 작가상 후보마저 이렇게 세상을 등진다면 나머지 예술가들의 현실은 어떠하겠는가?’

하지만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듯, 과거에 누군가가 그랬다고 해서 이번에도 그랬으리라는 법은 없다. 독립적인 사건들을 억지로 연결하려는 순간에 진실은 계속 파묻힌다.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문제의 진짜 원인을 정확히 짚어내고 방지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성숙한 시민사회의 모습이다. 나는 진짜 원인에 대해서 들었지만, 그 정보의 출처도 공신력 있는 기관의 공식적 설명이 아니므로 밝힐 수는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사태의 원인을 제도적 구조보다는 일탈의 주체인 개인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잘못된 근거를 가져다가 지원을 요청하게 되면, 오히려 그동안 지원하고 있었던 항목 중에 잘못된 것이 없었는가를 철저하게 되짚어보면서 그마저도 없애버리는 것이 공적 기관의 생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두 번째로 남다른 구석은 후보 작가 전원이 ‘개인-여성 작가’라는 점이다. 작년의 작가상 수상자가 여성 국극에 대한 연구에 커리어를 바친 정은영이었다는 점과 묘하게 맞물린다. 요즘 세상에 이런 부분을 굳이 짚고 넘어가면 그 자체로 돌을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결과적 평등에 대한 기대치가 만연하다는 점에서, 이렇게 중요한 연례행사에서 왜 우리에게 익숙한 ‘젠더쿼터제’가 도입되지 않았는지 의아해할 사람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했던 젠더쿼터제의 모습은 어떤 기준에 의하여 수상할 사람들을 줄을 세운 뒤, 그 최종 모습이 양성평등 관점에 위배 되는 것처럼 보인다면, ‘젠더 다양성 및 평등’ 관점에서 최종 수정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남자들만 쭉 열거되는 수상자 목록에서 여성이 몇 명 보인다면, 대놓고 말은 하지 않지만 ‘아, 젠더쿼터제를 도입했군’이라는 삐딱한 생각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주요 영화제의 여우주연상과 남우주연상이 분화한 것은 아마도 그런 쿼터제를 계산하는 산식이 너무 복잡해져서가 아닐까. 영화사 초기에 대부분의 영화는 남성서사였고, 주연도 당연히 남성인지라, 남자배우들에게만 주연상이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여우주연상을 신설해서 특별히 여성 배우를 기릴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올해의 작가상은 개인-여성 예술가 네 명만을 후보로 올렸다. 당연히 이 대목에서 남성을 차별한다는 둥 시대착오적인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미대 입학자 성비만 보더라도 이게 정상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생경한 것은 사실이다. 남성쿼터제를 고려했을 법도 한데 왜…?

네 명의 여성 후보로만 구성된 올해의 작가상 계획을 보면서 이번 전시가 젠더 이슈로 쏠리지 않을까 하는 예상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런 이슈는 작품의 이면을 들춰보면 충분히 닿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 주제의식을 전면에 드러낸 작품은 사실상 없었다. 여성 예술가만 네 명을 모았지만, 여성 이야기는 하지 않는 전시. 여기에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담론과 역할의 확장으로서 큰 의미가 있다. 여성이 모이면 당연히 여성 이야기를 하리라고 기대하기 쉬운데, 그 판에 박힌 기대와 달리 사회, 예술, 정치, 문화 ‘일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이는 일반은 남성에게, 젠더라는 각론은 여성에게 맡기는 상투적인 도식을 전복하는 첫걸음으로 다가온다.

홍영인

이제 전시장으로 들어가자. 첫 번째 예술가는 홍영인이다. 그녀는 새에 꽂혔다. 전시장을 들어가면 우리는 사방이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새장으로 들어가는데, 거기에는 새가 없고 새소리만 요란하다. 새들이 앉아 쉬면서 노래를 불러야 할 나뭇가지는 텅 비어 있다. 새장 안쪽 벽에는 새의 그림자만이 비치면서 진짜 새의 부재함을 강조한다. 그것까지 발견하면 우리는 새가 갇힌 공간을 관람하러 온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새가 되어 관찰의 대상이 된 것인지 헛갈린다. 견고하고 촘촘한 철조망은 주체의 안락함을 보장하면서 죄의식 없이 누군가를 관음할 수 있는 보호장치였으나, 그곳에 있어야 할 관찰 대상이 사라짐으로써 오히려 주체를 옥죄는 장애물로 둔갑한다.

새장 속의 새는 사라졌나? 애초에 왜 새가 거기에 있었나? 지금 우리가 새를 보는 방식은 근대성의 산물이다. 농경사회에서 인간과 어우러져서 함께 농사를 짓고, 같은 공간을 점유하면서 운명공동체로 묶여 있던 동물들은 이제 순전히 그들만을 위해 허락된 몇 안 되는 공간만을 서성이게 되었다. 최고의 생산 효율성을 위하여 인간은 도시의 한 귀퉁이에 모여들었고, 이제 그곳에 동물을 위한 공간은 없다. 동물은 오직 교외에 둘러친 울타리로 내몰려 관찰 당하는 존재로 전락했는데, 거기에는 삶이 없다. 그저 자연을 모사한 시뮬라크르적 산물들에 뒤섞인 생명체 하나가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가쁜 숨만 허덕거리고 있다. 보는 자, 보여지는 자의 구분 속에서 우리는 어느덧 필요에 따라 어떤 생명체를 취하고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너무나 당연시하게 되었다. 이제 그 ‘어떤 생명체’의 범주에 인간을 집어넣는 것도 자연스러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동물에게 하는 짓은 언젠가 우리 스스로가 당할 짓이기도 한데, 다만 그때 가서 지금의 우리 역할을 누가 대신해낼지 모를 뿐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존 버거(John Berger)의 ‘사람은 왜 동물을 구경하는가?’를 참고하시오.

박혜수

박혜수는 심리/사회과학적 연구를 미적 표현에 접목하는 시도를 선보였는데, 이는 최근 들어 내가 가장 관심을 갖는 주제이기도 하다. 나는 엄정한 조사방법론을 적용한 미술사적/미학적/비평적 성취가 분명 가능하리라고 본다. 박혜수의 <당신의 ‘우리’는 누구인가(2019)> 시리즈는 중산층이 ‘우리’라는 관념에 대하여 갖는 심리학적 지평을 조사한 후, 그 조사결과와 과정을 드러내 보이는 작업이었다. ‘우리’라는 관념은 사람마다 제각각인데, 국제적인 맥락에서 보면 우리나라만큼 우리라는 단어를 남발하는 민족도 없다. 가장 독점적인 인간관계의 대상인 배우자마저도 ‘우리 마누라’라고 하는 민족이 아닌가? ‘우리’라는 관념처럼 주관성과 보편성의 격자가 첨예하게 교차하는 영역도 드물다.

박혜수는 공들여 조사한 결과를 어지간한 시장조사 리포트 뺨칠 정도로 다차원적이면서 꼼꼼하게 보고했고, 또 조사 과정에서 파생된 결과물들을 마치 대단한 파피루스 유물이라도 되는 양 천연덕스럽게 내걸었다. 제도권 미술관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참신한 시도였다. 단순히 종이에 얽매이지 않고, 조사결과를 미학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시도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는 내 기대에 조금 못 미쳤다. 더 아름답고, 더 충격적으로 전달할 방법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우리’에 대한 탐색만으로도 신선했고 공간을 채우기에는 충분했는데, 그녀의 관심은 <후손들에게>라는 영상 작업을 통해 이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 가정이 파괴된 자들, 오직 주검으로만 말하는 자들에 대한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고독사’라는 단어는 유례없이 횡행하고 있지만, 사실 죽음은 원래 고독한 것이므로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동반자살’이라는 어불성설도 존재하지만, 함께 자살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상호 동의하에 손 꼭 잡고 하나, 둘, 셋에 뛰어내리지 않는 이상 동반자살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대부분은 ‘살해 후 자살’이 맞다.

어쨌든 죽음의 문제로 돌아와, 박혜수가 보여준 것은 생애 마지막 순간에 돌봄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증언이다. 그 증언은 골방에 처박힌 시신과 악취와 구더기로 구성된다. 예쁘장한 차림새로 미술관을 휘적거리며 주말을 만끽하고, 인증샷을 찍어 인스타에 올리고 있는 우리는 그러한 비참한 죽음의 주인공이 될 리 없다며 남일 보듯 측은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사실 우리의 말년이 그들과 다르다는 보장은 섣불리 입 밖에 꺼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그들도 한때는 산업역군이었고, 촉망받는 인재였고, 전쟁영웅이었고, 사랑받는 아들딸이었다. 그 실존성은 영상 오른쪽에 마련된 간이 빈소와 같은 참전용사의 유품이 증명한다. 주인은 사라지고 없지만, 유품만은 그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를 증명한다. 그러므로 한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다른 누군가를 챙기는 일은 결국 미래의 나, 또는 내 자식을 챙기는 일과 다르지 않다. 이 통찰에 도달하면서, 나는 개인적인 연례행사인 ‘나만의 올해의 작가상 선정하기’에서 박혜수에게 한 표를 던진다. 내가 표를 던진 예술가가 올해의 작가상에 최종 선정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이주요

이주요의 작품에 비하면 다른 작가들의 화두는 인류사적 거대서사처럼 보인다. 이주요는 그런 말들이 다 무슨 소용이냐는 듯 미술제도의 문제를 들고 나왔다. 예술가가 인류와 공동체에 꼭 필요한 존재라면 그들을 공적 자금으로 도와주어야 할 필요성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어떻게? 이 ‘어떻게’가 늘 문제가 된다. 우리의 자원은 항상 불충분하므로 선별의 자격과 기준은 늘 도마에 오른다. 이주요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열린 공간으로서 작품을 보관하고 연구할 창고를 제공하는 것이다. 예술가에 의해 자생적으로 돌아가는 이 아름다운 생태계는 작가 자신의 오래된 유토피아일진대, 그 배경에는 당연히 좁아터진 우리네 국토의 사정상, 작업하고 보관할 공간을 얻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현실적인 문제의식이 도사리고 있을 게다.

그와 비슷한 의미에서 나는 오래전부터 미국의 락앤롤 문화를 선망해왔다. 그들은 집들 사이의 간격도 넓고, 교외에 사는 중산층이라면 차고를 갖는 것도 어렵지 않은지라 거기다가 악기를 세팅해 놓고 친구들끼리 뚝딱거리다가 홀연히 세계적인 밴드로 성장하는 일도 다반사다. 오죽하면 garage band라는 단어가 있겠는가? 우리나라를 돌아보면 사실상 기타와 드럼을 마음먹고 칠 수 있는 곳이라고는 대형 교회밖에 없다. 우리나라 밴드 음악에서 저항성을 찾아보기 힘든 원인 중 하나가 거기 있을지 모른다. 십자가가 매달린 성스러운 단상 아래에서 처음으로 기타를 잡았는데 무슨 저항?

다시 미술로 돌아와서, 우리나라에서는 화가들도 어지간한 중견 작가가 아니면 어엿한 스튜디오를 갖춘 경우를 찾기 힘들다. 일단은 예술적 생산물 자체가 임대료를 감내할 정도의 수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미적 작업에 수반되는 안료의 흔적이나 냄새를 이해해줄 집주인도 거의 없다. 그래서 형편이 나아진 중견 작가들은 양평이나 파주로 넘어가서 큰 주택이나 별채를 산 후 작업과 주거를 병행한다.

사람은 동물이고, 동물의 행동반경이란 철저히 공간에 귀속되는지라 예술가들에게 어떠한 공간을 제공할 수 있을지는 큰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예술가가 아니라서 그런지, 이주요의 구상은 그저 여러 가지 시설물들의 짜깁기에 지나지 않는 듯 보였고, 그 구성에서 무슨 새로운 창조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또한, 그 대안적 가능성과 별개로, 그 공간은 미술제도를 짓누르는 ‘선발의 딜레마’를 근본적으로 해소해 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숨통은 조금 더 트일지 몰라도.

김아영

끝으로, 김아영은 실사와 3D 그래픽을 합성한 단편 영화를 전면에 내걸었다.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2017)>의 후속작인 <다공성 계곡2: 트릭스터 플롯(2019)>이다. 여남은 개의 입방체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형상의 ‘페트라 제네트릭스’라는 존재가 불가항력적인 문제로 인하여 거주지에서 쫓겨나게 된 이야기를 담았다. 그는 원래 자신의 고향에서는 신성한 존재였으나, 공간적 맥락을 몇 단계 벗어나자 마치 입을 떠난 침처럼 천덕꾸러기로 전락해버린다. 그를 맞이하려는 새로운 행성의 키치적이면서도 가장된 친절함이 눈길을 끈다. 이 행성의 공공관리자와 대행업자들은 ‘안전’과 ‘편안함’을 늘상 입에 달고 살면서도, 언제든 문제가 발생하면 ‘격리’하고 ‘감금’할 수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이 친절함은 매우 익숙하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우리가 소비사회에서 이런 종류의 응대에 항시 둘러싸여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오직 이해관계로만 점철되어 있어, 받으면 받을수록 채워지지 않고 도리어 공허해지는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 영상 속 문제적 행성이 오늘날 우리 사회를 빗대고 있다는 것 또한 너무나 명백하다.

김아영은 첨예한 난민 이슈를 철저하게 학습하고 추적한 후에 놀라울 정도로 가볍게 풀어놓는다. 가볍게 접근한 사람이 진지하게 풀어놓는 일은 오히려 쉽고 그만큼 흔하다. 하지만 김아영처럼 반대로 접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접근한 일에 대하여 훨씬 더 진지하게 내놓고 싶어 하는데, 그래야만 자신의 진정성도 확보할 수 있고, 대상에 대한 예의도 지킬 수 있으며, 전달력도 높아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도한 진지함이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 현대인에게는 자신의 몸뚱이 이외의 것에 대하여 생각할 시간과 에너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보다 그 작품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가 더 중요할 때가 있는데, 김아영은 진지함과 전달력의 접점에서 적절한 균형감각을 유지한다. 동시대 대중문화와 적당히 타협할 줄 아는 것도 그러한 감각의 일환이다.

그래서 이 작품 속에 난민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이 있냐고? 답은 국회의사당이나 정부종합청사에 계신 분들이 내놓는 것이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찾을 수 있을 만한 성질의 것은 아니다. 예술가들은 그저 질문을 던질 뿐이고, 그것으로 자기 역할을 다 한 것이다.

올해의 작가상 2019 展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대한 답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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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주요 작가가 최종 선정됐다. 나의 예측(지지)은 박혜수, 김아영 순이었으나 올해도 어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매년 두 팀을 꼽고 있지만 단 한번도 그 작가가 선정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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