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버트 리드의 「현대회화의 역사」

Herbert Read, A Concise History of Modern Painting (초1959, 개1968, 개1974, 번1990)

꼴 같지 않게 미학, 비평, 예술철학 같은 묵직한 책들만 읽어대다가 오랜만에 미술사 책을 펼쳤더니 그야말로 술술 읽힌다. 마치 모래주머니를 차고 뛰다가 벗어던진 기분이다(물론 실제로 모래주머니를 차고 뛴 적이 있을 리 만무하고 비유 상 그렇다는 것). 하나의 미술 양식이 새로운 경향을 만나서 변해가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경제학적 변화상을 살펴보는 일은 언제나 흥미진진하다. 다만, 이 책은 미술 양식 내부의 영향관계와 파급효과에 대해서만 온전히 집중하는 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겸손하고, 또 다른 의미에서는 태만하나, 세잔으로부터 68혁명 이후까지를 폭넓게 포섭하기 위한 선택과 집중이라고 이해하자.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관해서만 제한적으로 사회적 예술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는데, 그가 아방가르드적 모더니즘의 적통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이러니하다.

우리는 하나의 새로운 작품에 영향을 미치는 지배적이고도 단일한 요인을 찾는 일이 사태를 지나치게 단순화할 가능성을 늘 상기해야 한다. 또한,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시계열적 계보를 구축하려는 욕망도 자제해야 한다. 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한 사람의 예술가는 자기 이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는 다가올 몇 세기에 걸친 시대에 오직 자신의 작품만을 헌정한다. 그는 자기 자신만의 보증인일 뿐이다. 그는 후사 없이 죽는다. 그는 자기 자신의 왕이자 사제이며 신이었다(보들레르, 19p).” 그러니 적어도 예술에서만큼은 계보의 실선이란 존재할 수 없고, 기껏 해봐야 흐리멍덩한 점선만 그어질 뿐이다. “현대 회화의 국가적 경계선들을 설정하기란 불가능하다(269-270p).”

덧붙여, 하나의 미적 경향에 있어서 그 “수단은 계산되어야 하지만 효과는 계산될 수 없는데, 효과는 인간 감성의 모든 무한한 영역에 작용하기 때문이다(28p).” 다시 말해서 하나의 미학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예술가의 헌신은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으나, 그 효과를 계량적으로 표시할 수는 없다. 해석은 어디까지나 각자의 마음속에 있다. 한 사람이 작품과 마주한 순간, 그 인지체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화학적 반응이 효과이며, 그 효과의 총체가 작품의 존재 목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작품이 그 목적을 다 한 경우란 없다. 이러한 예술의 특징은 오늘날 예술에 대한 담론이 여기저기서 분출하는 현상과 관련 있다. 답이 하나라면, 그렇게 많은 말이 오갈 이유가 없다.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을 이유도 없다.

허버트 리드(Herbert Read)는 그가 주제로 삼은 현대회화(Modern Painting)에서 현대성의 본질이 추상화 경향과 거의 일치한다고 본다. 즉, “정확함이 진실은 아니다(마티스, 44p).” 자연에서 얻은 상을 내면에서 재구성하거나, 오로지 내면의 목소리에만 집중하여 시각적으로 표현해내는 것이 추상화라면, 그것은 시각적 재현과 역사적/종교적 서사가 중심이 되는 18세기까지의 아카데미즘과 확연히 구별되는 현대성의 총아가 맞다. 그리고 이러한 논지에서 세잔으로부터 시작되는 계보학은 설득력이 충분하다. 하지만 우리는 추상화의 거센 풍랑 속에서도 꿋꿋이 재현을 고집하면서 나름의 감수성과 지각적 확장을 꾀한 예술가들을 잘 알고 있고, 그들이 현대성의 울타리에서 배제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결국, 미술사의 서술은 기준과 선택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은 이 유사과학의 영원한 도전이자 매력이 될 것이다. 참고로 그가 배제한 첫 번째 그룹은 단순 소박성을 강조한 화가들이고(앙리 루소, 모리스 허쉬필드, 이반 제네랄리치, 조셉 픽케트 등), 둘째는 사실주의의 수호자들이다(에드워드 호퍼, 발튀스, 크리스티앙 베라스 등).

저자가 추상화의 유형을 다시 두 분파로 나누어 설명하는 대목은 이 저술의 가장 큰 성취로 볼 수 있는데, 사실 여기서 가장 큰 오해의 소지도 존재한다. 논지를 단편적으로 요약하자면, 본질을 찾으려는 시각성의 노력이 세잔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경향은 점차 자연을 등지면서 내면으로 침잠하는 형식으로 구체화 되었다. 여기서 미끄러져 나온 하나의 분파는 내면의 자유로운 분출에 초점을 맞추었고, 또 다른 분파는 절대적이고도 보편적인 상을 엄정한 논리에 따라 구성하고자 하였다. 광의적인 차원에서 첫 번째 부류는 표현주의로, 두 번째 부류는 구성주의로 정리할 수 있다. 표현주의의 계보에는 (말 그대로) 표현주의, 분리파, 신즉물주의, 신주관주의, 뉴욕화파 등이 있었고, 구성주의의 계보에는 (말 그대로) 구성주의, 데 스틸, 절대주의, 바우하우스, 종합주의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그 분화에 앞서서 전조로서의 입체파, 미래주의, 다다, 초현실주의가 나타났고, 모든 경향을 아울렀던 천재로 피카소, 칸딘스키, 클레가 있었다. 이렇게 리드는 양식적 분화 이전의 종합적 변화 단계를 구분하면서 자신의 분류기준에서 제기될 수 있는 자의성에 대한 도피처를 마련해 놓았다.

내게 개인적으로 의미 있었던 대목은, 첫째, 북유럽에 표현주의적 전통이 짙게 배어 있음은 그들이 처한 기후적 환경의 영향이며, 그것을 지적한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뤼네발트, 뒤러, 고흐에게서 떠올릴 수 있듯, 고딕적 그로테스크함과 낭만주의적 전율은 유독 북유럽 화단에서 더 확연히 눈에 띄는데, 이는 보링거가 이미 「추상과 감정이입(1908)」, 「고딕의 형식 문제(1912)」에서 논증한바, 북유럽인들이 “비유기적인 것에 생명을 불어넣을 때 수반되는 저 무시무시한 파토스(52p)”를 염두에 두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놀데, 키르히너, 페히슈타인 등 독일 표현주의자들은 “중세의 북유럽 표현주의 화가들과 양식상으로는 별차이가 없었다(62p).” 또한, 뒤러의 회화 이론서, 고흐의 편지, 칸딘스키의 이론서, 뭉크의 시들에서 알 수 있듯, 표현주의자들은 단순히 회화적 표현에 그치지 않고 치열하게 글을 쓴다. 표현의 열망은 어떤 형태로든 분출구를 찾는데, 그것이 시각적 이미지에 국한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성에 차지 않게 마련이다.

둘째, 돌이켜보면 20세기 초 모더니즘적 양식의 발작기는 선언문 시대였는데, 우리는 이미 개념미술의 시대에 진입했기 때문에 그 수많은 배타적 선언들이 얼마나 편협한 것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회고적 진실일 뿐, 당시에 선언문을 눌러쓰던 혁신가들은 삶, 정치, 대중문화, 국제화의 위기 속에서 각기 절박한 심정을 분출했다. 상식과 달리, 다원주의라는 거대한 숙명 때문에 필연적으로 선언의 종식이 도래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우리가 너무 편한 세상에 들어선 나머지, 열정을 다 바쳐 무언가를 지켜낼 의지가 사라진 것은 아닐까? 선언의 배타성이 아닌, 그 열정이 그리운 것일 수도…

셋째, 내게는 낯선 이름인, 앙트완 페브스너와 나움 가보 형제가 흥미로웠다. 형 페브스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에서 수련하고 파리에서 경험을 쌓았다. 이후 러시아와 파리를 오가며 입체파와 미래주의를 두루 경험하였다. 동생 가보는 뮌헨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나 미술사로 빠졌고, 이후 본격적인 실기로 들어섰다. 이들은 자신들의 복잡한 경험을 녹여내 구성주의에 투신하였는데, 특히 나움은 “재료나 형태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 방식을 제공(206p)”하였다. 구성주의는 그야말로 쓸모 있는 작품의 기능에 대하여 일깨우면서 절대적이고 균형 잡힌 아름다움을 일깨웠던 운동인데, 여기에 나움의 물리학적/의과학적 지식이 융합되었으니 그 화학반응은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융합적인 접근은 내가 관심이 있는 주제인 ‘Art and Science’에 부합하므로 좀 더 자세히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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