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아일런드 & 마이클 제닝스의 「발터 벤야민 평전: 위기의 삶, 위기의 비평」

큰 집으로 이사를 하고서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은 책장 꾸미기였다. 별것 아닌 일이지만 그것을 해내는데 예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일단 그보다 앞서서 처리해야 하는 일이 산더미였고, 책장이 늦게 도착했고, 그중 하나는 파손되어 있었고, 그것을 돌려보내고 다시 받았다.

책장은 대체로 장르별, 주제별 정리를 따랐지만, 그 원칙을 깨는 공간도 마련해 두었다. 특정인에게 헌정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을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 & 존 버거(John Berger) 헌정 서고”라고 이름 붙였다. 내가 지금 논하려고 하는 「발터 벤야민 평전」을 읽기 한 참 전부터 내 인식체계 속에서 이 두 사람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포개졌다. 서로 살아간 시대도, 공간도, 문화도 달랐던 두 사람이지만,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아주 사소한 단서도 놓치지 않는 섬세한 눈과 그 모든 것에 대하여 한참이고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위대한 창조자들과 현재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이 서고에서 아마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책이 하워드 아일런드(Howard Eiland)와 마이클 제닝스(Michael W. Jennings)의 「발터 벤야민 평전」이다. 독해는 물론이거니와 해독도 불가능할 정도로 시대를 앞서갔던 한 지성의 모든 것을 담아내기 위한 두 저자의 피땀이 어린 책이다. 저자들은 발터 벤야민에게 인생을 건 사람들처럼 단순히 한 사상가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인생의 국면에 따라 어떠한 배경에서 벤야민의 사상이 변화해왔는지를 열어 보이며, 문헌의 진짜 저의가 무엇인지를 온갖 1차 자료를 동원하며 설명해준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벤야민 해석에 있어서 이 책은 아마도 가장 유용한 시발점이 될 것이다. 어지간한 사상가의 평전에서는 기대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학술적 깊이를 자랑하는데, 특히 벤야민이 하나의 글을 작성하면서 참고했을 법한 문헌들을 각주로 달아놓는 대목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범신론”이라는 용어를 벤야민이 어떠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228페이지의 주석이나, 편지에서 지나가듯 언급한 책들의 제목을 모조리 열거해 놓는 대목에서는 무서울 정도의 집요함이 느껴진다(549p). 남들보다 조금 더 영민하고 앞서 나간 사람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자신에 관한 모든 흔적이 후대에 낱낱이 까발려진 것을 벤야민 스스로가 뒤늦게 알게 된다면 적잖이 당황할 듯하다.

934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을 달달 외우더라도 벤야민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 살더라도 그 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와 마찬가지다. 애초에 인간은 복잡하고 변화무쌍하며 불완전하고 일관성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존재인데, 우리는 그 사실을 줄곧 망각하거나 무시해버리는 탓에 끝없는 내적/외적 갈등에 직면하곤 한다. 하물며 벤야민 같은 섬세한 영혼과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일관성은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들의 마지막 도피처”라고 지적했던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빌리자면, 벤야민에게 일관성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어불성설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나아가 이 집요한 평전을 덮고 나면, 일관성 없는 창조적 지성의 갈피를 잃은 발걸음이 인류 전체에게는 얼마나 값진 지적 유산으로 남는가를 되새기게 된다. 그는 베를린 부르주아 집안 출신으로 자신의 계급에 부여된 문화예술을 마음껏 향유하면서도 사회주의적 이상향에 대한 신념을 오랫동안 견지했다. 누군가를 동경하고 또 지독한 외로움에 몸서리치더라도 누군가가 인격적 경계선을 넘어오는 것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독립적이면서도 부친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기 위해 온갖 묘수를 짜내었다. “자기를 감추고, 그러면서 자기를 보라고 요구하는 사람이다(120p).” 무일푼으로 전락했을 때조차도 도박과 희귀 장서 수집은 멈추지 않았다. 현실정치에 대한 희망과 관심을 완전히 끊은 후에야 정치학을 썼다. 알레고리적 물신을 파괴하면서 역사철학적 진리성분을 끌어내는 것이 비평가로서 자신의 사명이었지만, 실제 삶의 영역에서 그는 철저한 물신숭배자였다. 그가 끝내 타자기를 사지 않은 이유는 그가 숭배하는 만년필ㅡ“내 모든 꿈을 실현시켜줄 녀석(378p)”ㅡ 한 자루에 대한 견실한 집착 때문이었다.

20세기에 가장 선도적이었던 비평가 중 한 사람으로, 벤야민은 비평이라는 평생의 숙명을 어떻게 규정했을까? 그의 비평관은 이미 30대 전에 쓴 학위논문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에서 거의 완성되었다. 벤야민은 비평의 전제가 창조적 파괴라고 보았다. 슘페터(Joseph A. Schumpeter)가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강조했던 그 개념이 비평에서도 그와 별개로 발전했던 셈이다. 비평에서 창조적 파괴는 문화적 대상의 파괴이다(154p). 비평할 대상의 사실관계를 밝혀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아예 그 구조와 신화의 근간을 파괴함으로써 진리성분을 구해내는 것이다. 이 진리성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경계에서 관계된 모든 대상을 한 자리로 불러낸다. 그 자리에서 작품은 그간 걸치고 있던 온갖 거추장스러운 알레고리를 벗어 던지고 사후생을 산다. 폐허 속에 우뚝 선 토르소가 된다. 거기서 작품의 변태가 일어난다. “사실성분이 진리성분으로 바뀔수록 작품의 위력은 점점 약해진다. 10년, 20년 시간이 흐르고 초기의 매력이 점점 약해지다보면 언젠가는 아예 새로 태어나야 하는 때가 온다. 한때 아름다웠던 것이 모두 떨어져나가고 작품 그 자체만 남아 폐허의 형태로 서 있게 되는 때다(311p).”

이렇듯 비평 작업은 작품을 떠받치는 좌대가 아니라 오히려 폐허를 가속화 하는 망치질로 이해해야 한다. 망치질 없이 대리석을 깎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평가는 작품에 한갓 주석을 달아놓는 사람이 아니라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그 맞은편에서 또 하나의 최종 생산물을 만드는 사람이다. 작품의 이데아를 밝혀내거나 그 자체가 되는 것, 작품을 역사, 그리고 독자와 긴밀하게 접합하는 것, 그로써 작품의 사후생을 촉진하거나 새로운 작품을 번식시키는 것이 비평가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물론 그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꼼꼼한 주석을 다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벤야민의 주석은 그 자체로 한 권의 책이 될 정도로 집요했다.

우리는 주기적으로 예술의 위기를 논하고, 그 하위 맥락에서 또 비평의 위기를 논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예술이 위기였던 적은 없다. 그것을 둘러싼 숫자나 몇몇 권력의 위기만이 있었을 뿐. 하나의 위기는 하나의 기회를 부르고, 그렇게 죽고 또 살면서 인류가 일궈낸 예술의 숲은 비옥하고 울창해졌다. 하지만 비평의 위기만큼은 진정 실재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비평이 독자는 물론이거니와 작품 자체에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뿐더러, 비평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자리를 그 무엇도 대체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언젠가 누군가 또다시 새삼스레 비평의 위기를 목놓아 웅변할 때, 우리가 응당 돌아가야 할 지점은 디드로(Denis Diderot)가 아니라 벤야민이다. 그리고 그의 삶을 제대로 응축한 이 책은 그 자체로 그 모든 위기론의 진단서이자 해결책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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