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계리의 「북한미술과 분단미술: 작품으로 본 북한과 우리 안의 분단 트라우마」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북한의 미술, 둘째는 북한 혹은 분단에 대한 미술이다. 현재로서는 외부자가 북한의 작품이나 문헌에 접근하기 무척이나 어려운 상황이므로 북한미술에 대한 저술에서도 학술적 깊이를 크게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인데, 저자는 나름대로 북한에 가보기도 하고, 관련 문헌도 열심히 탐독한 듯하나, 체계적으로 그것을 정리하여 엄정한 학술적 결론을 도출하려는 시도는 애초에 접은 듯하다. 대신에 대표적이거나 인상 깊었던 작품들을 중심으로 약간의 정보에 자신의 감상을 덧입혀 가벼운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내는 접근을 택했다. 이러한 접근이 효과적이었는지에 대한 판단은 결국 독자가 북한미술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싶은지, 어떠한 기대를 품고 이 책을 펼쳐 들었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인데, 내 경우에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나는 북한미술에 대한 저자의 감상보다는 실제의 사회/정치/문화적 상황과 역사적 의의에 더 관심이 있다. 이 책보다 앞서서 북한미술을 다룬 책으로는 문범강의 「평양미술 조선화 너는 누구냐」가 있었는데, 그 작업도 학술적으로는 그리 충실한 정리에 미치지 못하였고, 북한미술 중에서도 조선화 장르에만 집중했다는 한계가 있었으나, 그래도 나에게는 그쪽이 더 유용했다.

1부는 북한미술을 다루는데, 북한이 미술을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 사용해온 맥락들, 그리고 사회주의 사실주의가 뿌리내려가는 과정들, 주체적인 양식에 대하여 고민하고 여러 차례 정치적 숙청을 거쳐 오늘날의 주류 양식이 자리 잡은 정황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미 어느 짐작할 수 있으므로 가볍게 훑고 지나갈 수 있다. 다만, 이렇게 훌륭한 예술가들을 이데올로기의 사슬에 속박해 놓은 지도 어느덧 두 세대가 지나가고 있는 시점에, 앞으로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통일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창조력이 날개를 달고 국제무대로 훨훨 비상하기까지는 또 얼마나 많은 세월과 비용이 들어갈지 가늠할 길 없음에 안타까울 뿐이다. 미술사적으로 가장 막대한 규모의 인적 낭비가 자행되고 있는 국가를 우리는 지척에 두고 있다.

예상외로, 이 책에서 북한미술보다 재미있는 부분은 북한 혹은 분단에 대한 미술을 소개하는 2부다. 저자는 동시대 미술계에서 분단상황이 빚어낸 독특한 트라우마에 주목하고, 오랜 시간 현장을 누비면서 다양한 이야깃거리들을 수집해왔다. 분단을 다루는 미술들은 국내외 정치 상황과 예술, 그리고 규제와 표현이 얽히고설킨 복잡한 역학관계를 보여주므로, 정치적 담론과의 조우가 그 어느 때보다 빈번한 동시대 미술계 현장에서 매우 핵심적인 주제라 할 수 있다.

노순택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밀리터리 패스티벌의 아이러니를 미학적인 앵글로 담아냈다. 나도 군 복무 당시 ‘지상군 패스티벌’이라는 행사를 눈여겨봤었던 기억이 있다. 한 나라의 군사력을 지탱하는 온갖 복식, 장비, 문화가 가족 단위로 참여하는 축제의 주제로 다뤄지는 것이 온당한가? 밀리터리 패스티벌에서 전시되고 체험되는 품목들은 우리가 덕수궁에서 보는 수문장 교대식이나 바티칸 대성당에서 보는 스위스 근위대의 교대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덕수궁 수문장은 역사적 실체에 대한 오마주로서, 동시대에 아무런 군사적 기능을 갖추지 못한 저열한 수준의 시뮬라크르이다. 그것은 과거의 한때를 단순히 지목할 뿐, 그때 가졌던 실질적인 기능과 위상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밀리터리 패스티벌에 전시되어 어린이들이 직접 탑승까지 할 수 있는 전차는 지금이라도 전쟁이 발발하면 바로 포신을 돌려 북진한다. 그것은 강력한 화력으로 밀집된 적의 진지를 초토화하고 진출로를 확보한다. 이색적인 체험의 콘텐츠로 관람객들의 밥상에 올려진 전투식량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고, 행사가 끝나고 나면 보급계통으로 재고를 확인한 후 다시 일선 부대로 재배치될 것이다. 회수된 전투식량 중 일부는 DMZ 매복 작전을 나가는 수색중대원의 군장에 들어갈 것이다. 소총, 헬기에서부터 심지어 위장크림 같은 사소한 보급품까지, 축제에 동원된 온갖 대상들의 실전성에 대해서 굳이 부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군의 모든 물자는 아군의 생존성과 더불어 적군의 죽음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고안된다. 그것을 가족 단위로 둘러 보고, 즐기고, 체험하고, 인증샷을 남기는 행위는 휴전 중인 분단국가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군이 축제를 통해 국민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면 평화가 찾아오고 굳건한 국가안보를 보장할 수 있는가? 현 체제에서 평화와 전쟁 준비는 필연적으로 뗄 수 없는 두 날개와 같다.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형식이 축제라는 가벼운 옷을 덧입고, 아직 여물지 않은 어린이들의 사고체계 속에도 나지막이 침잠해 들어가는 방식이라면 재고의 여지가 있다. 전쟁은 땅따먹기가 아니라 실제로 헐떡헐떡 숨 쉬고 뜨거운 피가 콸콸 흐르는 사람들을 하나씩 죽여나가는 과정이며, 그와 더불어 울창한 숲과 그 사이를 누비는 각양각색의 곤충들과 고라니와 멧돼지까지 한순간에 소멸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노순택이 어딘가에서 인용한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말은 곱씹을 가치가 있다.

“우리가 세계를, 카메라가 기록한 내용 그대로 받아들일 때, 그것은 우리가 사진을 통하여 세상을 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해한다’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해의 가능성은 ‘NO’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엄격하게 말해서 사람들은 단 한 장의 사진으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다.”

선무의 작품이 국가보안법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부산비엔날레에서 철거된 사례도 흥미롭다. 그는 북한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후, 경계선이 없는, 그것을 넘나든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선무(線無)라는 이름을 짓고 한국에서 미술을 공부해 작가로 성공적으로 데뷔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의 대표작은 북한의 최고지도자를 팝아트의 문법으로 패러디한 작품이다. 북한에서는 감히 아무나 그릴 수 없었던 김정일을 마음대로 그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자유와 희열을 느꼈고, 또 그 과정에서 맞닥뜨린 자기검열의 기제를 직시하면서 스스로를 성찰해갔다. 하지만 결국 비엔날레에서 작품이 철거되는 과정을 거치며 자신이 아직도 완전한 자유에 놓인 것은 아니라는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작품의 외관이 제작자의 의도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은 시각예술 본연의 매력이면서 동시에 위기론을 부추기는 요인이기도 하다. 선무가 찬양/고무 목적으로 김정일을 그리지 않았더라도, 그것을 보는 사람이나 국가 권력기관은 찬양/고무로 받아들이거나 규정지을 수 있고, 그것은 오해라고 작가가 아무리 강변한다고 하더라도 제작 의도를 증명할 방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열 명이 하나를 보고 열 개의 해석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은 그만큼 풍요로운 의미작용이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많은 오해와 억측이 뒤섞여 작품이나 작가가 파멸에 다다를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하나의 작품 앞에서, 보편적인 다수가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문제는 합리성의 개념이 저마다 제각각 다르다는 데 있다.

북한의 예술이 세계 곳곳으로 수출되고 있는 상황도 흥미롭다.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에 있는 아프리카 르네상스 기념탑은 국가적인 기념비로, 아프리카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크고 웅장하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기념상 제작 입찰에서 북한은 상상을 초월하는 가성비를 제안하여 시공자로 낙찰되었고, 그간 수많은 독재자 청동상을 북한 전역에 세웠던 만수대창작사의 노하우가 제작 과정에서 십분발휘되었다고 한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사람들과 함께 찍힌 사진들을 보면, 그 웅장함은 실로 짐작되고도 남는다.

미안한 말이지만, 국가적 거대 기념비에 집착하는 나라는 정권의 전통성 차원에서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일반적으로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일컫는 국가들은 랜드마크에 딱히 집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랜드마크에 집착하는 것은 선진국의 일원처럼 보이고 싶은 산유국 왕조나 아시아의 기업가들이다. 가시적 기념비에 대한 집착은 내면의 궁핍을 가리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20세기 중반에야 독립국가 지위를 획득하고, 아프리카의 부국으로 발돋움하고 싶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세네갈과 북한 만수대창작사의 콜라보레이션은 그야말로 절묘한 조화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통일을 이루더라도 만수대창작사의 청동상 전담 조직은 세계 곳곳의 독재자, 부패 왕조, 신흥국 등의 기념비 제작 수요에 대응할 수 있도록 국가적으로 유지발전시켜 국부 창출에 이바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북한이 기념비만 수출한 것이 아니다. ‘아리랑’으로 대변되는 매스게임도 수출했었다니 놀라운 사실이다(관련 정보). 중남미의 작은 나라 가이아나에서는 70년대에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된 이후, 국민의 단합과 정권의 대내외적 홍보 차원에서 북한의 매스게임을 철저히 벤치마킹했다. 단순히 벤치마킹한 수준이 아니라, 실제 ‘아리랑’ 제작진을 직접 초빙하여 극진히 대접하며 안무와 훈련법을 익혔고, 북한이 했던 방식 그대로 공연을 올리기까지 했다. 부채춤의 고유한 안무까지도 아마존 전통 안무로 재해석했었다니 실소를 금할 길 없다.

이 사례에서도 기념비 사례와 유사한 권력의 의도가 고스란히 배어있다. 우리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북한이라는 악명 높은 공산주의-독재국가는 자유주의 국가의 시선에서 철저히 이질적이고 배타적인 존재일지 몰라도, 그 정권을 떠받치고 있는 몇몇 요소들이 누군가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동시대 세계 정치권력 지형도의 아이러니다. 나아가, 한때 북한으로부터 매스게임이나 배우고 있던 가이아나가 이제는 졸지에 새로운 석유 부국으로 발돋움할 순간을 목전에 두고 있는 반면, 북한은 국제 사회의 제재 속에 나날이 더욱 궁핍해져만 가고 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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