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의 큐레이터 되기」

Hans Ulrich Obrist, Ways of Curating

“전시라는 개념은 이곳이 우리가 서로 함께 사는 세상이라는 것이며 배열, 연대, 접속, 말없는 제스처를 할 수 있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러한 미장센을 통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41p

전설적인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t)가 자유분방한 형식으로 써내려 간 에세이 모음집이다. 제목이 가리키는 ‘길(ways)’이란, 큐레이터가 되기 위해 걸어온 길, 큐레이터로서 걸었던 길,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길을 함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번역본 제목만 보면 큐레이터 지망생을 위한 취업 및 경력개발 지침서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님에 유의…)

스물일곱개의 에세이는 마치 그가 기획한 전시처럼, 단일한 결론을 내리거나 즉각적인 행동을 유도하지 않고, 생각의 여지를 남기는 선에서 멈춘다. 하지만 앞에서 제시한 실마리를 뒤에서 받아 상세하게 풀어놓는 형태로 최소한의 맥락화는 이루어진다. 이야기는 독립적이지만 선형적으로 연결된다. 미술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찼던 스위스의 한 청년이 세계 곳곳을 누비며 현대미술의 담론을 주도하는 스타 큐레이터로 우뚝서고, 마침내는 그가 그토록 경계했던 미술권력의 일부분이 되는 과정이 담겨있다.

가시적인 텍스트나 언설로 주제를 설명하는 것이 오늘날 전시의 세계에서 하수로 여겨지듯, 오브리스트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기입하지 않고 사례로 보여준다. 개념미술이 득세하던 6, 70년대 인쇄 매체들의 사례를 통해 인쇄된 형태의 전시가 가능하며, 새로운 가치를 보여줄 수 있다는 주장을 내비치는 식이다. 그가 인용한 사례들, 그리고 그가 걸어온 궤적을 보면 그가 미술의 비정형성이라는 열린 가능성에 대하여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며, 전시의 기획을 통하여 새로운 관념을 창안하고 관객을 설득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어떠한 개념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예술가 혹은 작품을 단순한 수단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스스로 부단히 경계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담론을 주도하는 큐레이터십, 그리고 개별 작품의 고유성을 뒷받침하는 큐레이터십 사이의 딜레마와 긴장감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을 것이다. 늘 그렇듯, 규형은 중요하지만 어렵다.

“전시는 항상 게임의 새로운 규칙을 발명해야 한다.”

87p

“큐레이터의 업무가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와 대중 사이의 중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108p

“화학에서와 같이, 역사에서도 촉매는 사라진다.”

118p

오브리스트가 스스로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하여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으나, 예술가들과의 끊임없는 대화와 협업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진리는 넉넉히 유추할 수 있다. 그는 큐레이터 경력의 출발점부터 멘토로 삼은 예술가들을 만나고, 작업실을 방문하고,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에 상당한 열의와 시간을 쏟았다. 그가 예술가들과 나누는 모든 이야기를 녹취로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은 큐레이터 특유의 자료 강박을 드러냄과 동시에 비범한 열정의 표징으로 읽힌다.

그가 알리기에로 보에티(Alighiero Boetti)의 조언에 따라 가슴 속 깊이 새긴 하나의 질문은 비단 큐레이팅뿐만 아니라 협업이 필요한 모든 프로젝트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본질을 담고 있다. 일리기에로는 오브리스트에게 아직 실현되지 않은 프로젝트가 무엇인지를 예술가들에게 물어보라고 조언했다. 이 질문은 ‘당신은 어떤 생각으로 이 작품을 만들게 되었나요?’나 ‘당신은 어떤 예술가가 되고 싶은가요?’와 같은 일차원적인 수준의 이해를 뛰어넘어, 현재의 구조적 제약과 미래의 전망까지를 단박에 통찰할 수 있게 한다. 최고의 큐레이터는 예술가가 품은 최후의 꿈을 현실로 만든다. 미래를 현재로 가져와 다시 미래를 바꾼다. 우리 주변에도 실현되지 않은 꿈이 산재하다. 먼저 발견하고 현실화하는 사람이 승자다.

한 분야에서 정점에 오른 사람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에세이집은 분명 흥미로우며, 큐레이팅에 대한 역사적 개관이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예전에 출판되었던 「큐레이팅의 역사」보다 오히려 유용하다. 배설물을 주제로 내세운 <클로아카 맥시마> 展 사례와 같이 간과하기 쉬운 전시 사례들도 기획자가 직접 다시 들려주므로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하지만 우리는 전시를 기획한 사람이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가 태생적으로 지닐 수 밖에 없는 편향성에 대하여 경계해야 한다. 찬사 일색의 작품이 없듯, 찬사 일색의 전시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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