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베 레비츠키의 「모두를 위한 예술?」

: 공공미술, 참여와 개입, 그리고 새로운 도시성 사이에서 흔들리다

Uwe Lewizky, Kunst für Alle?

“모두를 위한 문화란 모토는 오늘날 대체로 오직 자격 있는 부분공중만이 심미적이고 문화적인 부가가치를 지닌 삶을 누리기 위해 특출나고 배타적인 여가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의미한다.”

221p

작년 여름, 옥수역 고가 인근에서 공공예술가 젤리장이 진행하는 <고가 아래 모든 목소리(19.6.15.)>라는 워크숍에 참여했던 적이 있다. 주최측은 옥수역 고가 아래의 공간을 지역 주민을 위한 새로운 참여 공간으로 재구성하기를 원했다. 진행자 젤리장은 워크숍 참석자로 하여금 이 공간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혹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의견을 제시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나는 의견을 써야 할 공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어”

찜질방에서 대형 TV의 리모콘을 우연히 쥐게 된 20대 초반의 어느날, 뒤통수에 내리 꽂히는 따가운 시선의 압박감 속에서 불연듯 떠올리게 된 이 말은, 그 후로 내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 마다 심심치 않게 소환되었고, 공공미술 관련 워크숍에서 또 한번 써먹게 되었다. 그리고 이 말은 지금 소개할 책의 주제의식과도 절묘하게 결부된다.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다는 말은 이 책의 제목이 던지고 있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인 셈이다.

저자(가 인용한 훌륭하신 이론가들)의 논의에 따르면, 공공미술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여러 구조적인 문제들로 인하여 성장연합이라는 지배적 존재 내지 ‘카르텔’에 볼모로 잡혀 있다. 이들은 시장의 성장과 경제주체의 이득을 위하여 공공미술을 도구화하고 사유화하고 전유한다. 그 전략은 매우 교묘하고 은밀하므로 일반 대중이 알아차리기 어렵다.

“지배를 보장하는 가장 조용하고도 효율적인 방법은 대중의 의식으로부터 바람직하지 않은 주제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63p

성장연합과 결탁한 도시 정책은 이질성을 없애는 데 혈안이다. 여기서 이질성이라는 말이 경제 계층구조의 사다리를 의미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이질성의 제거는 개별 구성원이나 사회 조직 간의 돌발적인 개성을 매끄럽게 깎아내 최적의 단일 소비집단으로 귀속시키는 전략에 가깝다. 이 체제 하에서, 태고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연대감이라는 가치는 상실되고, 오직 한정된 자원을 누가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는가라는 경쟁의 매카니즘이 지배적인 규칙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 규칙을 대중이 아무런 불만 없이, 매끄럽고,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큰 공로를 수행하는 영역이 바로 문화정책이다. 공공의, 공공을 지향하는, 공공의 콩고물을 받아 먹는, 심지어 공공의 규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모든 문화기관은 사실상 성장연합의 협력자가 된다. 정치, 언론, 행정, 시민사회단체가 모두 성장연합의 손아귀 안이나 그 언저리에서 맴도는 사회구조에서 성장연합에 공모하지 않는 순결한 공공미술이란 존재할 수 없다.

“문화의 소비는 현실을 극복하는 수단이 아니라, 현실을 망각하게 하는 것이다.”

82p

그럼에도 우리가 대안을 논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예술가, 그리고 그들이 내놓는 작품들의 잠재력을 여전히 믿고 있으며, 그들이 지닌 힘이 더욱 선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추동하는 우리 자신의 능력 또한 믿기 때문이다. 도시정책이 이질성을 지우려 할때, 우리는 그 시공간을 점유한 매우 다양한 공동체와 개인을 기억해야 한다. 반대의 목소리를 가진 소수의 손에 마이크를 들려 주어야 한다. 여기서 누가 마이크를 전달해 줄지가 관건이 된다.

인류 역사에서 신권 정치가 완전히 실패한 모델이라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선지자’의 역할을 수행할 모종의 존재가 필요하다면, 그 존재는 아마도 예술가일 것이다. 그들은 지리한 일상에서 대다수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단서에 귀를 기울일 수 있고, 그것을 모두가 감각할 수 있는 표상으로 만들 수 있으며, 이 시대의 쟁점에 (그나마) 사심없이 참여할 수 있다. 자본이 맥락을 지우고 개체를 동질화시키려고 할 때, 주체로부터 그 동질화를 깨닫게 하고, 저항하게 하고, 맥락을 재생산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예술이 담당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도시의 예술은 ‘장식’이 아닌 ‘실천’이 되어야 한다. 르페브르의 주장대로 이 도시에 생산과 소비의 사슬에서 벗어난 창조적 잉여가 필요하다면, 그 잉여의 세상에서 주인공은 단연 예술가다.

(아마도 오늘날 미대 4학년생은 명확히 ‘창조적 잉여’라는 용어을 발화하지 않고서도 스스로를 이미 그런 존재라고 암암리에 느끼고 있을 터인데, 이렇게 가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 자체가 지독한 블랙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궁극적으로 공공미술은 모든 문화예술 활동과 공간이 경제적 이익을 위해 전유될 수 있는 가능성을 섬세하게 인식하면서, 지역 주민 간의 자발적인 소통을 촉진하고, 공공의 이익을 주도적이면서 지속가능하게 추구해 나갈 수 있는 비판적 견지에서 창조적 도구로 기능해야 한다. 물론 이 목표는 여러 이해관계의 복합적 층위를 고려할 때, 대단히 달성하기 어렵다. 마치 미적으로나 사회적 가치 차원에서나 모두 최상의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는 말처럼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실현 불가능할 목표일 지언정, 그러한 목표의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아무렇게나 휩쓸리는 것 보다야 낫기에, 우선은 ‘좋은 공공미술’이라는 이상적 수준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선행되어야 하며, 실제 성공사례에 대한 공유와 확산도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사례 부분이 너무나 빈약한 반쪽짜리 결과물이라고 평할 수 있다. 좋은 주제를 다루고 있으나, 공공미술을 논하기 위한 이론적 토대를 두텁게 쌓으려는 욕심이 지나쳐 정작 가장 중요한 ‘독자의 관심’를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 전반부의 대부분은 대중문화와 도시 이론에 할애하고 있다. 주요 논지는, 자본(“성장연합”)이 도시 문화와 공공행정에 깊숙하고도 은밀하게 개입하면서 정작 인격과 공동체는 소외되는 현상이 초래되고 있으므로 참여와 공존의 가치를 추구하는 새로운 공공미술의 담론이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비슷한 맥락의 이론이 모양과 용어만 살짝 바뀌어 너무나 자주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프레데릭 제임슨(Fredric Jameson), 게르하르트 슐체(Gerhard Schulze), 기 에르네스트 드보르(Guy Debord),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등이 이론적 합리화를 위하여 주로 인용되는데, 어차피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할 것이라면 계속 새로운 배우를 무대에 올릴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한 권의 책을 읽는 이유는 저자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기 위함이지, 명사들의 ‘이름값’을 즐기기 위함은 아닐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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