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닐의 「동시대 큐레이팅의 역사: 큐레이팅의 문화, 문화의 큐레이팅」

Paul O’Neil, The Culture of Curating and the Curating of Culture(s)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의 한도를 다시 주목하고 확대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누가 보는지, 그들이 어떻게 하는지, 새로운 종류의 상대주의적/수사적 메타 서사 생산을 통해 무엇이 정당화되는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65p

미술관사, 전시사 분야는 일부 대학 교재를 제외하고는 번역 출판이 그리 활발하지 않은 편인데, 오랜만에 제대로 된 서적이 하나 나왔다. 저자 폴 오닐(Paul O’Neil)은 문헌분석 및 인터뷰를 통하여 동시대 미술사에서 큐레이팅과 예술의 상호작용을 고찰하였다. 분석 대상은 주로 대규모 그룹전이었는데, 동시대 미술사에서 담론 생성의 주된 방식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룹전에서 특출난 기획자가 특정한 담론을 규정하고, 그 담론에 맞추어 예술가 및 작품을 선정하여 배치하고, 관객을 특정한 의도 따라 일정한 동선으로 이끌어 가는 등의 전 과정을 큐레토리얼 담론의 생성 및 실천으로 규정하면서, 이러한 경향이 독립 기획자라는 정체성이 등장한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전의 큐레토리얼 담론은 20세기 초 초현실주의자나 다다이스트가 추동한 역사적 아방가르드 시대의 산물로, 자율적이고 낭만주의적인 미학에 대한 의문으로 태동되었으며,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모여 스스로 주도했던 전시 개념이었다.

1960년대 이후 전시를 기획하는 일을 예술가가 아닌 별도의 전문가 집단이 맡아야 한다는 상식이 보편화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미술 자체가 기존의 형식이나 재현의 한계를 뛰어넘어 즉각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황, 즉 작품과 관객 사이의 새로운 중재자를 필요로 하는 전례없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저자에 따르면 1970년대부터는 큐레이터가 동시대 미술의 담론을 주도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기 시작하였으며, 동시에 예술가나 개별 작품이 거대 담론의 도구로 전락하는 역전 현상이 본격화되었다. 1980년대는 이른바 스타 큐레이터를 중심으로 ‘큐레이터-저자’의 지위가 공고해졌으며, 그룹전 자체가 하나의 총체 예술 작품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일반화되었다. 큐레토리얼 실천의 이론과 역사가 본격 서술된 1990년대 이후로 큐레이팅 자체가 하나의 독자적인 학문 영역으로서 입지를 점하게 되었고, 동시에 실무 분야의 전문인력 양성이 시급한 과제가 되어 여러 커리큘럼이 제안되기도 하였다.

“예술이라는 ‘단어’는 점차 명사가 아니라 동사가 되어간다.”

로버트 배리(1969년) 23p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은 ‘큐레이팅이 담론의 생성과 파급에 있어서 어디까지 힘을 뻗치는 것이 정당한가?’로 정리할 수 있다. 미술이 물질에서 개념으로, 명사에서 동사로 변모하는 과정에 더 많은 개념적 포장과 담론화가 필요하게 되었다면, 그 전면에 나선 큐레이팅의 권력은 어느 지점에서 멈추어야 하는지를 결정하기가 어려워졌다. 동시대 미술 담론에서 큐레이터의 힘이 강해질수록 개별 예술가와 작품은 탈맥락화되어 전시나 비엔날레의 부속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커진다. 대규모 그룹전과 비엔날레가 미술 제도의 최첨단으로 인식될 때, 그 참가자 명단을 작성하는 책임을 가진 주체가 어떠한 기준을 따르는지도 쟁점이 된다.

“비엔날레는 동시대 미술계의 상위 계급을 위한, 그리고 예술가와 큐레이터를 위한 비준 도구다. 즉 미술계 내에서 일반적 트렌드를 더욱 확고하게 서열화하는 것이다.”

80p

가치중립적인 전시사로 포장된 이 책의 저자는 현재의 스타 큐레이터들이 지니고 있는 권력, 가치체계, 그리고 큐레토리얼 실천 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그들이 큐레이팅의 어원이 내포하는 본질로 돌아가 작품을 ‘돌보는 일’ 쪽으로 살짝 선회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조금 더 꼬인 시선으로 문맥을 따라가다 보면, 스스로 현역 큐레이터이기도 한 저자가 자신보다 더 저명한 스타 큐레이터들에게 일종의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예를들어,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t)가 전시에 관한 문헌이 부재하며, 체계적인 역사 서술과 이론의 정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대목에 대하여, 그러한 주장이 선대 큐레이터의 논리적 후계자로 오브리스트 자신을 자리매김하게 한다고 경계한다(45p). 또한 큐레토리얼 실천의 역사를 정리하려는 오브리스트의 야심에 대해서도 그 작업이 스스로를 큐레토리얼 혁신으로 연결시키므로 비판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내비친다. 큐레이터 역사의 서술은 스스로 역사의 중심에 자리한 적이 없는, 즉 스타 큐레이터의 범주에서 살짝 벗어나 있으며, (비교적 음지에서) 오랫동안 전시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온 본인만이 할 수 있다는 뜻일까?

이러한 의구심을 더욱 자극하는 대목은 ‘형식으로서의 전시’를 이야기하면서 갑자기 저자 본인이 큐레이팅했던 전시를 사례로 들기 시작하는 후반부다. 이례적으로 두 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두 장의 도판까지 사용하여 정성스럽게 설명한 후, 전시의 형식에 관하여 자신이 내세운 가설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사용하였다. 이 전시에 관한 분석에서 비판은 없고 찬사만 남아 있는데, 오브리스트의 역사 서술은 문제가 되지만, 자신은 문제될 것이 없다고 느끼는 것일까(96-101p)?

비뚤어진 마음을 추스리고 다시 큐레이팅의 딜레마에 관한 질문으로 돌아와서, 단일 저자 큐레이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무엇을 실천할 수 있는가? 일단 큐레이팅의 일부 기능을 참여하는 예술가나 다른 전문가에게 위임하여 권력의 분산을 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기능의 위임이 오히려 단일 저자성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 권한을 나누어 줄 수 있을 정도로 단일 저자의 권력이 확고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분산된 권한이 비평의 회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도 문제다.

“큐레이터의 모든 매개는 의심스럽다. 그는 관객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으려는 의도로 관객 인식을 교묘하게 조정하며 예술 작품과 관객 사이에 있는 누군가다.”

보리스 그로이스 125p

창조적 큐레토리얼 모델과 예술의 자율성을 지지하는 입장 사이에서 무엇이 더 우선하는가에 관한 가치판단은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모든 대립하는 가치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균형적 관점과 비판적 사고만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나는 개인적으로 카리스마 넘치는 ‘저자-큐레이터’의 강력한 담론화 작용과 개별 작품의 맥락을 중요시하는 사려깊은 전시가 공존할 수 있다고 믿는데, 그 공존의 전제조건은 촘촘하게 균형 잡힌 전시 생태계다. 그 생태계에는 중앙에 있는, 큰, 많은, 눈에 띄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잘 알고 있는 지적 생명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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