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전시장의 토르소: 비평적 전시문화를 위하여

“시간이 흐르고 초기의 매력이 점점 약해지다보면 언젠가는 아예 새로 태어나야 하는 때가 온다. 한때 아름다웠던 것이 모두 떨어져나가고 작품 그 자체만 남아 폐허의 형태로 서 있게 되는 때다.”1)

“진짜 귀중품들은 아주 꼼꼼한 탐사를 통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모든 과거의 연관관계로부터 벗어난 상들이 일종의 귀중한 물건들로─수집가의 갤러리에 있는 파편 혹은 토르소─ 나타나는 곳은 현재 우리의 성찰이 이루어지는 차가운 방이다.”2)

– 발터 벤야민

미술관의 책임

오늘날 미술이라고 뭉뚱그려 일컫는 대상 중 상당수가 한때는 제의의 흔적이었고, 기념비였고, 사원이었고, 과시적 사치품이었다. 20세기 들어 미술은 하나의 표현이자 강령이 되었고, 오늘날은 한계가 없는 창작과 표현의 장(場) 전체가 미술의 범주로 빨려 들어왔다. 이제 “예술 내적으로든, 예술과 전체의 관계에 있어서든 예술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예술이 존재할 권리조차도 더 이상 자명하지 않다는 점이 자명해졌다.”3) 그럼에도 확실한 기대 하나는 분명히 존재한다. 미술이 우리의 지리멸렬한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할 무언가를 줄 것이라는 기대다. 미술을 통해 단순히 역사적 사실이나 고유명사 하나를 인지체계 속에 집어넣는 차원을 넘어서, 인식적 지평을 확장하는 고양된 감정이나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을 갖게 되리라는 기대는 미학의 여명기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유효하다. 그 기대가 철 지난 낭만주의를 상기시킬지라도 버릴 수 없는 까닭은 예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모종의 역할을 실제의 작품들이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음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모종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우리 삶에서 그 작품들을 완전히 들어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떠올릴 수 있다. 우리 주변에 널린 한갓 사물 하나조차 예술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우리가 미술관에 들어서면서 품는 기대도 결국은 비슷하다. ‘집-학교’, 혹은 ‘집-직장’이라는 단편적인 일상의 궤적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식에 눈을 뜨거나 고양된 감정의 흐름에 빠지고 싶은 것이다. 그 마음의 표층에 자리한 욕망이 그보다 더 속된 것, 가령 타인에게 감성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거나, 문화적 소양을 과시하고 싶다거나, 유튜브에 올릴 콘텐츠가 필요하다거나, 그도 아니면 미술 애호가인 애인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것이라도 그 본질은 다르지 않다. 미술관이 그런 속된 기대를 충족시켜주리라는 믿음의 총체임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믿음이 모이고 쌓여 오늘날의 미술관을 특권적인 장소로서 정당화시켜준다. 오늘날 미술관은 작품과 사심 없이 대면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이라는 점에서 미학적으로 가장 특권적인 장소이다.

그렇다면 미술관은 그 특권을 올바르게, 책임감 있게 사용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일단 우리의 삶에서 미술이 어느 정도의 무게감을 지니는지부터 따져보자. 우리나라처럼 먹고 살기에 급급한 나라에서 미술이 인구에 회자 되는 상황은 사실상 두 가지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첫째는 어떤 작품이 경매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에 낙찰되었다는 보도를 접할 때이고, 둘째는 보편적 견지에서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급진적인 미학적 사건이 발생해서 ‘인민재판’이나 심지어 공권력이 개입할 때이다. 전자는 구체적인 사례를 부언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게 20억이라고? 저 정도는 나(혹은, 우리 아들)도 그리겠는데’라는 식의 비아냥을 이골이 나게 들어왔다. 후자에 해당하는 최근의 사례로는 ‘서울로7017’ 개장 당시의 슈즈트리 논란, 조영남 대작 사건 등이 있다. 이러한 경우만 아니라면 미술계와 대중은 나름 데면데면하면서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일단 대중은 미술에 관심이 없으며, 미학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은 미술계 울타리 바깥의 삶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대중은 미술, 그리고 미술관에 대하여 잠깐의 정서적 휴식을 제공하는 안식처가 되어 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중의 그 얄팍한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선에서 미술관의 사명이 끝난다는 뜻은 아니다. 미술관이 짊어진 미학적 특권은 그리 녹록지 않다. 고대의 신전, 중세의 대성당, 절대군주의 왕궁, 지배계층의 분더카머(Wunderkammer)나 교외의 호화 빌라, 수장고, 도서관 등 과거에 미술을 둘러쌌던 다종다양한 구조체계들이 지금은 미술관이라는 단일 플랫폼에 통합되어 있다. 먹고 살기 바쁜 현대인이 작품과 사심 없이 진지하게 마주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미술관뿐이다. 이처럼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4)

이제 오늘날 미술관을 둘러싼 대표적인 문제를 두 가지만 짚어보자. 이 두 문제는 질적으로 완전히 상이하나,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의 비평가적 책임을 무력화시킨다는 공통점이 있다. 미술의 진정한 가치─각자가 미술에 대하여 품은 기대가 무엇이건 간에 단순히 아름다움을 느끼고 지적 지평과 교양을 넓히는 수준 이상의 가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에 따르면 작품의 진리성분을 구해내기─를 누리기 위하여 우리 모두 비평가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전제하에, 이 문제들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강박적 교사

2019년 여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된 야수파 전시가 열렸다. 피에르와 드니스 레비(Pierre & Denise Levy) 컬렉션으로 구성된 야심 찬 전시였다. 그 야심의 정도는 전시 제목의 구구절절함이 증명한다.5) 최근 미술관에서 작품보다 텍스트에 압도당하는 경험이 한두 번은 아닌지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번에는 정말 선을 넘었다. 작품이 하나 이상 걸린 화가가 줄잡아 20명은 넘을 터인데, 한 사람도 빼먹지 않고 깨알 같은 신상정보가 붙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신상정보의 수준은 교육 및 성장배경, 인맥, 예술적 성향, 주목할만한 에피소드 등을 아우르는 얄팍한 개요로서, 한 사람당 A4용지 반 페이지는 족히 넘길만한 분량이다. 사실 이러한 대략적인 정보들의 나열은 각 화가의 개성과 특징을 구체화 시켜주는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기보다는 관람자에게 한순간의 지적 안도감을 선사하고 이내 휘발되어 버리기 마련이다.

문제는 화가들의 신상정보가 차고 넘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시대적·지역적 배경과 미술사조의 원리를 설명하는 단순화된 도식들이 각 구역의 서두를 장식하고, 현대미술 혁명의 주체들로 상정된 파리 화단의 예술가, 비평가, 화상들이 남긴 주옥같은 명언들은 시도 때도 없이 캔버스 위를 가로질렀다.

이러한 구성은 우리네 교육적 전시의 전형을 보여준다. 뒤늦은 각성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우리의 문화예술 교육은 제한된 시간 동안 다섯 개의 보기 중에서 단 하나의 정답을 고르는 입시 위주 교육제도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그 제도의 기저에 놓인 우리의 근대화 과정은 서구사회의 철 지난 이성중심적 합리주의를 충분히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어느 정도 동질한 제도의 틀 안에서 성장한 우리 대중에게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보편적인 믿음은 문화예술 향유의 저변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고, 이 전시는 그 믿음을 철저히 공략했다.

전시 서두에는 카메라의 발명이라는 단일 변수를 사이에 두고 인상주의가 야수파로 넘어가는 단순화된 도식이 그려져 있었다. 학창시절에 국사나 세계사 참고서의 핵심요약 코너에서 많이 보던 장면이다. 물론 19세기 중반에 등장한 카메라가 미술가들의 당면과제였던 사실적인 재현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내면의 표현으로 눈을 돌리게 한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수없이 논증된 바와 같이, 모던 회화의 태동과 발전의 기저에는 급속한 산업화 및 도시화, 봉건귀족의 몰락과 부르주아의 대두, 제국주의적 부의 집적, 교통통신의 발달, 휴대용 화구의 발명 등 무수한 선행요인들의 입체적인 상호작용이 있었다. 인과관계의 단순화는 다른 변수들에 대한 탐색을 어렵게 만든다. “끝을 보려는 작가의 욕망은 진실에는 치명적인 것이 된다. 결말은 모든 것을 통일시킨다. 통일성은 다른 방법으로 세워져야 한다.”6)라는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은 단순히 하나의 텍스트뿐만 아니라 모든 전시에도 훌륭한 준칙이 될 수 있다.

가장 압권은 야수파 세션의 관문에 놓여 있던 노란 벽이었다. 거기에는 “안녕하세요. 나는 야수파 화가 앙리 마티스라고 해요….”로 시작하는 친절한 배경설명이 붙어 있다. 이 대목에서 슬퍼지는 까닭은 단순히 우리를 초등학생 단체관람의 인솔교사로 취급해서가 아니다. 예술의 현장에서 모든 관람객이 교육 및 계도의 대상으로 치부되는 현상에 그 누구의 비판의식도 제대로 작용하지 못할 정도로 이 땅의 문화예술 저변이 얕다는 것을 재확인시키기 때문에 슬펐다.

결국, 이 전시장을 가득 메웠던 온갖 잡스러운 설명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급격히 불어닥친 현대미술 혁명의 중심에 파리 화단을 위치시키기 위하여 존재한다. 마티스와 피카소를 중심으로 일련의 ‘유럽-백인-남성-아방가르드’들이 추구한 모더니즘의 계보를 고정불변의 신화로 아로새긴다. 한 사람의 컬렉션에서 비롯된 균질한 내러티브는 급기야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옹립되어 다른 방향에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전혀 남겨두지 않는다. 그들의 성취를 인정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나, 그것이 전부라는 섣부른 신념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같은 시대에 다른 민족, 인종, 젠더, 계급이 써내려간 미술사를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는 이런 전시가 ‘현대미술의 혁명가들’이라는 준엄한 타이틀을 독점할수록, 미술사가와 비평가들이 앞으로 떠맡아야 할 책임은 더 크고 묵직해진다.

사실 출품된 작품들만 놓고 보면, 근래에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었던 어떠한 서양미술 컬렉션보다 뛰어났다. 쿠르베, 마티스, 앙드레 드랭, 브라크, 블라맹크 등 간판급 대가에서부터 알베르 마르케, 키스 반 동겐, 모리스 마리노 등 그간 좀처럼 조명되지 못했던 화가들의 가치를 재발견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만하다. 게다가 대중 전시에서는 좀처럼 부각되지 않았던 후원자, 수집가, 화상의 기여가 독자적으로 조명된 부분도 의미 있었다. 하지만 전시 자체를 하나의 ‘인물 미술사 열전’으로 만들려는 강박적 친절은 출품된 작품들을 미술사 도판이나 교보재 정도로 격하시켰다. 그들이 지닌 다층적인 해석의 가능성과 소통의 매개체로서 가치는 아직 수장고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영상의 딜레마

현재의 미술관은 ‘공간의 예술’에 최적화되도록 설계되었다. 이 말은 오늘날 우리가 방문하는 미술관이 18세기의 정치적 혁명 가운데 탄생한 초창기 근대 미술관의 틀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물론 미술관학의 발전 과정에서 역사주의적 모델과 화이트큐브의 공식이 주도권 다툼을 벌인 적은 있으나, 그 다툼이 공간의 예술 이외의 무언가에게 온전히 자리를 내준 적은 없다. 개념미술의 시대에도 최소한 전시계획서가 꽂힌 바인더나 서명된 변기는 공간을 점유하고 있었다.

영상매체로 대변되는 ‘시간의 예술’이 이렇게 빠르게 주류로 부상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대변을 보면서도 각자 손바닥 위에 극장을 하나씩 올려놓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술관에 줄줄이 들어선 프로젝터, 스크린, LCD 모니터의 향연을 보노라면 그것들이 제집을 제대로 찾아왔는지 회의감이 들기 시작한다. 미술관에서 영상을 보느라고 서서 사람들에게 발을 밟히거나, 그 작은 오락실 의자에 앉아서 뒷사람에게 팔꿈치로 찍히다 보면 자연히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지금은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시간의 예술을 담기 위하여 구조적인 변혁을 시도해야 하는 적기이다. 유튜브 시대에, 즉, 침대에 누워서나 대변을 보면서도 UHD급 영상을 원 없이 볼 수 있는 시대에 미술관이 그 변화를 제대로 따라잡고 있는지 반문해야 한다.

오늘날 미술관에서 영상물이 겉도는 이유를 파악하기 위하여 일반적인 회화의 감상 경험과 비교해보자. 작품들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고 관람객은 그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한다. 우리의 시각적 지각 능력은 놀라워서, 회화나 조각의 외형을 거의 1초 만에 온전히 파악한다. 거기 무엇이 있고, 어떻게 생겼고, 어떤 느낌을 주고,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작품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반대로 어떤 작품에는 오랜 시간을 들여 그 구성요소 하나하나까지 곱씹어볼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은 우리가 그동안 근대적 미술관에서 누려온 일말의 권력이었다. 그 공간이 우리의 동선을 제아무리 호도할지라도 우리는 나름대로 시지각적 역량을 발휘하여 빠르게 탐색하면서 스스로 방향을 결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미술관을 메우고 있는 ‘시간의 예술’은 다르다. 우리는 그것의 재생, 정지, 되감기, 빨리감기, 다시보기를 통제할 수 없다. 관람객은 작가와 기획자가 구상한 대로, 즉 미술관이 틀어준 시간표에 따라 작품을 감상해야 한다. 이때 예술 감상의 권력 구조는 공급자들에게 완전히 귀속되어 있다. 이는 ‘저자의 죽음’을 위해 흘린 고귀한 땀방울들이 의미 없이 하수구로 흘러 들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미술관이 영상의 시대에 맞추어 변화하던지, 미술관에서 영상을 모조리 퇴출하던지,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다.

통제의 문제를 떠나, 시간이 없다는 것도 문제다. 하나의 영상물 안에 어떠한 아름다움이나 의미가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작품의 전체 러닝타임 이상의 시간을 할애해야 마땅하다. 우리에게는 재생/정지 버튼이 없고, 영상은 한 바퀴를 돌고 나서 우리가 그 앞에 서기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우리는 필경 하나의 영상물을 중간부터 보게 될 터이고, 처음부터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끝까지 재생하고 나서 다시 첫 부분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리거나, 우리가 보기 시작한 장면이 부분이 다시 등장할 때까지 시선을 고정해야 한다. 이것이 ‘시간의 예술’이 ‘공간의 예술’을 위해 설계된 세계로 침투함에 따라 우리가 겪어야 하는 불편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관람객이 직면한 ‘틀어 준 대로 본다’는 한계에는 변함이 없다. 보통의 관람객에게는 하나의 전시에 쓸 수 있는 시간과 체력이 대체로 정해져 있다. 최근에는 영상물의 전체 러닝타임을 합하면 몇 시간을 훌쩍 넘기는 전시도 흔한데, 도대체 누가 하나의 전시에 그 정도 시간을 쓸 수 있을까?

혹자는 영상도 회화와 마찬가지로 보고 싶으면 보고, 보기 싫으면 마음대로 떠날 수 있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관람객이 감당해야 할 비평적 책임감을 떠올리면 사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지도 않고 그 안에 어떠한 아름다움이나 사유의 가치도 없다고 평가절하하는 자는 비평의 자격도 없다. 결국, 비평가로서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보여주는 대로 보아야 하고, 건너뛰지 말아야 하고, 전체를 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관을 점거한 영상물들은 일종의 폭력이다. 작품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던 영혼은 시간의 덫에 갇혀서 옴짝달싹 못 하게 되어버렸다. 비평적 의무를 수행하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영상이 오늘날 시각예술계의 진정한 대안이며, 새로운 주류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그 대안을 위한 대안적 공간 설계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당연히 제기될만하다. 예를 들어, QR코드를 관람객에게 배부해서 해당 IP로만 접속할 수 있는 동영상 URL을 주는 방식은 어떨까? 아니면 좀 더 작고 개인화된 미디어 플랫폼을 제공해서 관람객이 스스로 재생 전반을 통제하는 방법은 없을까? 분명한 것은, 언제 어디서나 UHD영상을 마음대로 볼 수 있는 시대에 미술관을 가득 메우고 있는 스크린과 모니터는 시대착오적이며 공급자 중심적 사고방식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대안은 분명 존재한다. 아직 수면 위로 떠 오르지 못했을 뿐이다.

관람객=비평가

앞서 우리는 강박적으로 단일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교육적 전시와 모든 작품을 차분히 감상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영상 위주의 전시에서 관람객이 비평적으로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문제를 확인하였다. 관람객을 수동적인 시청자로 격하시키는 순간 미술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은 계속 미개척 상태로 남는다. 그렇다면 비평이 무엇이길래 우리가 온갖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미술에 비평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것일까?

우리는 주의 깊은 감상과 숙고를 통해 작품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누군가와 나눔으로써 더욱 확장된 지평에 도달할 수 있다. 여기서 참된 의미란 단일한 정답을 의미하지 않는다. 작품을 다시 눈여겨 볼만한, 그리고 숙고할만한 모든 이유가 여기에 포함된다. 작품의 존재 이유는 인간의 존재 이유만큼이나 다양하고 복잡하다. “의미의 탐구, 즉 해석에는 사실상 한계가 없으며, 그것은 개별 주체의 알고자 하는 욕망이 약화될 때에만 종결될 수 있다.”7) 그러한 의미에서 “비평의 목적은 대상에서 실제로 없는 것을 보는 것”이다.8) 또한, “미술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려 하고 원리상으로도 미술은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영역이다.”9) 이를 종합할 때 우리는 미술의 다양한 가치 중에서도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과 의사소통의 매개체로서 가치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비평은 남들에게 읽히기 위한 글을 쓰는 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비평한다는 것은 비평하는 사람에게 유익한 일이다.”10) 우리는 작품에 비평적으로 개입하려는 노력을 통해 섬세한 눈, 탄탄한 논리, 역사철학적 지식, 깊은 사고, 그리고 폭넓은 지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비평은 작품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각하고 숙고하는 자기 자신을 직시하고 그와 더욱 친밀해지는 과정이다. 왜냐하면 “예술비평은 언제나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이고자 하는가?’라는 질문을 겨냥”하기 때문이다.11) 그러한 의미에서 “비평은 인간 존재의 자각이며, 몸의 지능이다.”12)

예술, 세계,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비평가적 사명을 품고 전시장에 들어서야 한다. 전시장에서 “비평가로 행동하는 것은 정체성의 안정성을 의심하는 것이며, 추론과 결말에 질문을 던지면서 연구 대상을 향해 역설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13) 철옹성 같은 강력한 내러티브에 도전적 시선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다층적인 의미작용이 시작된다. “이데올로기로서의 모든 표상은 본래의 가치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떤 ‘혐의’가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14) 전시장에서 그 혐의를 추궁한다고 해서 내쫓길 일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권장된다. 애초에 “미술사에서 미술이라는 경기의 규칙은 전통을 제외하고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전통은 미술품이 무수히 많은 배치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15)주기 때문이다.

글의 말미에 이렇게 많은 인용문을 배치한 까닭은 그저 이런 글들을 내가 읽었노라고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비평적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행위가 이렇게 많은 사람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제 서두에 인용한 벤야민으로 되돌아간다. 그는 자신의 비평 작업을 창조적 파괴의 과정으로 이해했다. 비평은 작품의 표층에서 드러나는 사실성분이 아닌 참된 의미로서 진리성분을 구원해내는 작업이다. 진리성분은 작품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밝혀내야 하는 것으로, 미래를 밝히는 역사철학적 교훈이다. 진리성분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의미의 심층을 헤집고 들어가야 하는데, 이 과정은 수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는 가시밭길이다. ‘나’의 경계 밖에서 ‘나’를 사유할 수 없듯, 우리는 켜켜이 쌓인 역사와 문화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작품을 둘러싼 온갖 오브제, 질서, 텍스트, 집기, 냄새, 온도 따위의 시공간적 질서가 사방에서 우리를 옥죈다. 이 모든 것이 신화적 알레고리다. 다시 말해서 확실히 의미가 있는 무언가, 아니면 적어도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는 무언가다. 이것을 완전히 부수거나 최소한 재검토하지 않고서는 진리로 들어갈 수가 없다. 창조적 파괴만이 작품의 진리성분을 구해내고 새로운 영구적 가치, 즉 사후생(死後生; Fortieben)을 보장할 수 있다.

이제는 관람객의 비평적 개입을 넉넉히 보장하는 전시질서를 만들어나갈 때이다. 작품을 꺼내고 난 수장고의 빈자리에 깨알같이 촘촘한 캡션과 오디오가이드와 화살표와 총천연색 브로셔를 넣어두자. 그러면 폐허 속에 우뚝 선 토르소가 보일 것이다. 거기에 과거와 현재의 교차점이 있다. 풍요로운 미래를 향한 발걸음은 여기서 시작된다.


참고문헌

1) Benjamin, Walter(1977), The Origin of German Tragic Drama, trans. John Osborne, 182; 하워드 아일런드 & 마이클 제닝스(2018), 김정아 역, 「발터 벤야민 평전: 위기의 삶, 위기의 비평」, 311에서 재인용.

2) 발터 벤야민(2007), 윤미애 역, “베를린 연대기”,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베를린 연대기」, 191.

3) Adorno, Theodor(1970), Ästhetische Theorie, 9; 게오르그 W. 베르트람(2017), 박정훈 역, 「철학이 본 예술」, 19에서 재인용.

4)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 영화 「스파이더맨(2002)」 中.

5) 혁명, 그 위대한 고통: ‘20세기 현대미술의 혁명가들’ 展 (약칭: 야수파 걸작전).

6) 존 버거(2008), 김현우 역, 「G」, 117.

7) 스티븐 반(2015), ‘의미 / 해석’, 160; 로버트 S. 넬슨 & 리처드 시프 편저, 정연심 외 역, 「꼭 읽어야 할 예술 비평용어 31선」.

8) Wilde, Oscar(1891), ‘The Critic as Artist’, in Intentions and Other Writings, New York: Doubleday, 길다 윌리엄스(2016), 김효정 역, 「현대미술 글쓰기: 아트라이팅에 대해 알고 싶은 모든 것」, 50에서 재인용.

9) 우도 쿨터만(2002), 김수현 역, 「미술사의 역사」, 27.

10) 테리 바렛(2004), 이태호 역, 「미술비평: 그림 읽는 즐거움」, 58.

11) 게오르그 W. 베르트람(2017), 박정훈 역, 「철학이 본 예술」, 301.

12) Frueh, Joanna(1988), “Towards a Feminist Theory of Art Criticism” in Feminist Art Criticism: An Anthology, Ann Arbor: UMI Press, 58; 테리 바렛(2004), 이태호 역, 「미술비평: 그림 읽는 즐거움」, 52에서 재인용.

13) 리처드 시프(2015), ‘형상화’, 558; 로버트 S. 넬슨 & 리처드 시프 편저, 정연심 외 역, 「꼭 읽어야 할 예술 비평용어 31선」.

14) 데이비드 서머스(2015), ‘재현’, 33; 로버트 S. 넬슨 & 리처드 시프 편저, 정연심 외 역, 「꼭 읽어야 할 예술 비평용어 31선」.

15) 데이비드 캐리어(2015), ‘미술사’, 219; 로버트 S. 넬슨 & 리처드 시프 편저, 정연심 외 역, 「꼭 읽어야 할 예술 비평용어 31선」.

서지정보

김주일(2020), "전시장의 토르소: 비평적 전시문화를 위하여", in E앙데팡당, 「Fost it!: The Second Issue」, 서울: 부크크, pp. 8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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