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드루얀의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

Ann Druyan, COSMOS: Possible Worlds

“최종 목적지, 즉 절대적 진리를 가정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과학이 성스러운 탐색에 걸맞은 방법론이 되어주는 이유다.”

32p

고전의 반열에 오른 「코스모스」의 후속작으로,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의 배우자인 앤 드루얀(Ann Druyan)이 집필했다. 이번 작품도 전작과 마찬가지로 다큐멘터리와 연계하여 제작되었는데, 그 다큐멘터리의 제작과정에는 두 저자의 아들인 새뮤엘 세이건(Samuel Sagan)이 보조 제작자로 참여했다. 칼은 세상을 떠났지만, 과학대중화를 위하여 헌신한 그의 유산은 가족기업에 의하여 착실히 승계되고 있다.

아들 세이건은 코스모스 후속작 프로젝트 추진과정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죽다 살아났는데, 그 과정이 5장 ‘우주의 커넥톰’에 자세히 나온다. 우리 뇌의 복잡성과 불가해성은 우주의 질서와 닮았는데, 저자는 이러한 신비로운 상관관계를 강조함과 동시에 아들의 치료과정에서 재확인한 ‘과학의 승리’라는 주제의식을 다시 강조한다. 사랑하는 아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순간의 아픔까지도 이야기의 소재로 매끄럽게 녹여내는 능력에 감탄했다.

드루얀은 아무래도 세이건보다는 사적인 이야기를 많이 전해주는 편이다. 두 사람의 연애 이야기와 더불어 젊은 과학도였던 두 사람의 낭만적인 연애 시절 사진이 공개되었고, 세이건과의 사랑을 담은 뇌파를 골든 레코드에 기록해 보이저호에 실어 우주로 보낸 감동적인 이야기, 세이건이 두 스승 사이를 오가며 고통(?)받았던 이야기 등도 실려있다. 과학사나 문명사도 전작 못지않게 흥미로운 편이지만, 저자가 사랑한 사람의 이야기가 더 재밌다. ‘진정한’ 진정성은 늘 건조한 활자 사이를 뚫고 올라온다.

사실 인류 문명사를 헤집으며, 지속가능성과 탐험정신과 연대의식을 끄집어내는 장면들은 현재의 문제점들을 부각하기 위하여 과거를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길이 없다. 기록이 없던 시기의 파편적인 유물 부스러기 몇 개를 들고서 생명의 본질을 논하면서 그때의 순수했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논의는 한계를 노정한다. 아득한 과거에 대한 신화화의 근간에는 ‘지금 우리보다 계몽되지 못했던 그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라는 과소평가가 자리 잡고 있는데, 사실 선조들이나 우리나 뇌를 포함한 신체 기능에는 별반 차이가 없으므로 놀랄 이유도 없다. 모든 면에서 완벽했던 유토피아 시기는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도 없었다.

어리석은 핵전쟁과 환경파괴를 멈추고 우주로 시선을 돌려 지속가능한 번영의 길을 열자는 주제의식이 전편에 이어서 반복된다. 종교적 맹신이나 편견에서 벗어나 과학기술의 전문성에 기반을 둔 냉철한 지적 판단과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연대하자고 호소한다.

이 주제의식은 내가 최근에 본 다큐멘터리, 데이비드 애튼버러의 「우리의 지구를 위하여(David Attenborough: A Life On Our Planet, 2020)」와도 겹친다. 애튼버러 경은 다큐멘터리에서 인류의 번영을 위하여 육식을 줄이고, 친환경 에너지로 전환하고, 열대우림을 지키자고 말했다. 나는 상영시간 내내 죽어가는 지구의 면면을 보며 분노했지만, 정작 이 영상을 보고 분노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 UN사무총장, 미국 대통령, 중국 주석, 그밖에 EU 리더들이라는 생각에 무력감을 느꼈다. 그들이 서로, 그리고 자국민의 눈치를 보면서 가만히 있는데 우리가 페트병 라벨을 뜯고 앉아 있는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편으로, 애튼버러는 개발도상국들을 향해 탄소 배출을 줄여라, 벌목을 줄여라, 태양광 패널을 설치해라, 무분별한 어업을 자제하라고 말하는데, 사실 그 국가들이 지속가능성에 대하여 성찰할 새도 없이 자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화자의 모국인 영국을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이 적극적으로 그 국가의 경제 및 정치 구조에 개입하고 그들을 생산 기지화하면서 종속성을 심화시켜 놓은 결과가 아니었던가? 보르네오 열대림의 목재를 주로 수입한 자들은 누구인가(2017년 세계 목재 수입 국가 순위는 EU, 미국, 중국, 일본, 캐나다 등 순 임)? 제국주의자들은 수백년에 걸친 무분별한 수탈의 결과로 축적해 놓은 유무형의 자본을 창고에 쟁여 놓거나, 인프라 저변에 희뿌옇게 희석해 놓고는 저개발 국가를 협상 테이블로 불러서 ‘개발을 멈추시오’라고 태연자약하게 이야기하는데, 과연 어느 정도나 설득력 있는 논증이 될까?

이 세상에 쾌적하고 건강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부당한 방식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해서 떵떵거리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나는 가난해도 좋으니까 인류 전체의 공존공영을 위하여 묵묵히 참고 살아야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니, 그런 사람도 간혹 있으나, 그런 국가나 민족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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