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aret Atwood, The Testaments: The Sequel to the Handmaid’s Tale
좋은 문학 작품은 하나의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백 개의 질문을 남긴다. 이 기준에 입각하면 「시녀 이야기」는 더없이 탁월한 작품이었다. 「시녀 이야기」는 인류가 궁지에 몰린 순간에 어떻게 악마적 본능이 분출될 수 있는지, 극단주의적인 종교적 맹신이 교활한 권력과 결탁할 때 어떠한 비극이 벌어지는지, 그리고 그 비극 속에서 원래 취약했던 집단은 얼마나 더 나락으로 떨어지는지를 절제된 어조로 촘촘하게 묘사했고, 한 세대를 초월한 시간에 걸쳐 무수한 독자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작품이 결론 짓지 않은 여백들이 34년 동안 응축되어 또 한 편의 뛰어난 작품을 써 내려갈 공간이 마련되었다. 애초에 기획되어 있지 않았던, 한 작품의 마지막 이야기가 34년의 세월을 초월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그 서사는 여전히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팽팽하다. 마치 사전에 2부작으로 기획되어 단숨에 써 내려간 듯하다. 길리어드라는 지옥도는 그동안 우리에게 잠시 잊혔을지 몰라도 작가의 머릿속에서는 계속 번성과 쇠락을 거듭하고 있었다.
작품은 길리어드의 태생적·구조적 문제점이 켜켜이 중첩되어 자멸의 길로 접어드는 임계점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아, 세 화자의 증언을 병치하는 형태로 전개된다. 리디아 아주머니는 길리어드의 여성 착취 정책을 책임지는 권력자다. 유력 사령관의 딸인 아그네스는 출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데이지는 길리어드의 경계 밖이지만 밀접한 국제관계 속에 얽혀 있는 캐나다 국경 인근에 살고 있다.
극 초반에 세 사람은 별로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지만, 교대로 증언이 이어지면서 서서히 교차하는 지점들이 생기고, 결국에는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한자리에 모인다. 리디아는 사건이 진행되는 틈틈이 독백을 남겼고, 나머지 두 사람은 사건이 모두 끝나고 나서 조사기관의 질문에 답변하는 형태로 증언하였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일촉즉발의 살벌한 현실 속에서 최소한 두 사람은 사건이 끝날 때까지 안전하게 살아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유추할 수 있고, 이 대목은 분명 작품의 태생적 구조 속에서 하나의 스포일러로 작용할 터이지만, 그럼에도 극의 긴장감은 퇴색되지 않았다.
철부지 소녀였던 데이지가 삶의 근간이 뒤틀리는 변화 속에서 성장해 가는 과정이나 리디아가 밑바닥까지 추락했다가 치밀하게 복수의 주춧돌을 올리는 과정이 세심하고 설득력 있게 묘사되었다. 또한, 증언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묵묵한 희생의 가치를 보여준 베카를 위하여 동상을 세워준 동료들의 연대는, 서두에서 등장한 선전물로서의 차가운 기념비와 대조를 이루며 극적인 수미상관을 완성하였다.
한편으로는 누군가를 길들이고자 마음먹은 사람이 이 작품이 가르쳐주는 바를 역이용한다면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결과가 초래되겠다는 두려움도 들었지만, 그에 앞서 많은 독자가 이 작품을 통해 권력이 작용하는 교묘한 방식과 전략을 간접적으로 체득할 수 있다면, 우리가 항체 형성을 위해 투여되는 미량의 바이러스를 두려워하지 않듯, 이 작품도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
“흔히 공포 정치라고 말하곤 하지만, 정확히 말해 공포는 정치를 하지 않는다. 대신 공포는 마비시킨다. 그렇게 해서 부자연스러운 정적이 내려앉는다”
398p
비극적인 이유로 헤어졌던 두 딸과 어머니가 결국 조우하는 마지막 장면은 해피엔딩을 위해 신파조의 무리수를 뒀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하지만 34년을 기다린 독자에게 주는 거장의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이 포옹과 심포지엄 형식의 에필로그를 거쳐 책장을 덮은 우리는 이제 더는 ‘시퀄의 시퀄’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먹먹한 암흑 속의 메아리와 같았던 시녀 이야기는 강인한 세 여성의 연대와 증언들로 이렇게 끝을 맺었지만, 현실의 길리어드는 여전히 견고하다는 것을 뉴스 진행자들의 호들갑 속에서 감지할 수 있다. 세상은 좋아졌지만, 용기, 희생, 연대와 함께 더 좋아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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