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환과 그 친구들 II – 빌 비올라, 조우 展 (부산시립미술관)

Bill Viola, ENCOUNTER

처음으로 부산시립미술관을 찾았다. 미술관에서 영상 보기를 워낙 싫어하는 탓에, 동반자에게는 찢어져서 서로 다른 전시를 보고 만나면 안 되냐고 몽니를 부렸으나, 이내 잠자코 따라갔다.

전시는 초기작과 근작으로 나뉘어 ‘이우환 공간’과 본관에서 각각 진행되었다. 우리는 최근작이 중심인 본관에서 출발하였다. <아니마_Anima(2000)>, <인사_The Greeting(1995)>, <관찰_Observance(2002)> 등 세 작품으로 구성된 공간이 출발점이었는데, 우리가 앞으로 이 전시에서 마주하게 될 것들이 일반적인 영상물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 지점에서 이미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일반적인 영상물이란, ‘공간의 예술’이 아닌 ‘시간의 예술’로서,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으며, 관객이 그 전체를 우두커니 서서 보고 나서야 그 완전한 의미가 성립되는 작품을 말한다.

처음 마주한 세 작품은 시점과 종점의 구분이 무의미한, 사실상 움직이는 회화다. 극단적인 슬로우 모션을 차용하여 일견 정지된 듯 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등장인물들의 드라마틱한 표정과 다채로운 색감은 짙은 어둠 속에서 스포트라이트를 한껏 받아 도드라진다. 카라바조 풍의 초기 바로크 회화가 보여주었던 시각적 언어다. 이 익숙한 언어는 우리에게 등장인물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주목하라고 종용한다. 치밀하게 계산된 아름다운 구도는 그 종용을 더욱 내밀한 것으로 만든다. <인사>에서 바람에 맞아 나풀거리는 여인들의 옷자락은 서구 화가들이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그토록 집착했던 성인들의 옷 주름을 연상케 한다. (한때 미술사가들은 옷 주름의 모양이나 표현방식 등을 통해 특정 회화를 누가 그렸는지 추정하곤 했다. 옷 주름은 회화에서 지문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고전적 사실주의 회화의 제작 측면에서, 옷 주름은 템페라나 유화의 현란한 기법적 숙련도를 자랑하는데 있어서 최적화된 소재이기도 했다. 나는 신화나 종교를 다룬 옛 그림의 옷 주름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아.. 저 시대의 화가 견습생들은 옛 이야기 속의 복식을 얼마나 저주했을까! 그들이 대가의 반열에 오르면 이내 누드로 돌아서는 것도 이해가 간다”) 두 여인이 신고 있는 얇은 끈으로 이어진 샌들도 같은 시대로 우리를 인도한다. 여러모로 이 영상들은 움직이는 바로크 회화다.

비올라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아주 느리게 포착했다. 순식간에 시선을 사로잡는 5분 내외의 유튜브 영상에 중독된 현대인에게는 이 생경한 느림 자체가 의미가 된다. 천천히 보라는 말은 자칫 지나쳐버리기 쉬운 단서나 의미를 곱씹어보라는 말이다. 우리의 시지각적 인지 체계는 찰나의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도 상대방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감지하고 대응한다. 이러한 복잡미묘한 감정의 흐름은 대게 무의식의 영역을 통과하는데, 이 느린 영상들 속에서는 의식적으로 마주하고 철저히 해부할 수 있다. 비올라는 무의식적 현상을 의식의 장으로 끌고 오면서 감정과 교류라는 인간의 본질에 관하여 사색할 기회를 주고 있다. 그 기회가 차가운 강의실이 아닌, 시각적으로 섬세하게 기획된 화면을 통해서 전달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독한 느림을 기쁘게 견딜 수 있다.

늘 접하던 것을 낯선 방식으로 보여주기만 해도 풍부한 의미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은 본관 마지막 방에서 확실하게 증명된다. <우리는 날마다 나아간다_Going Forth By Day(2002)>는 다섯 개의 패널로 구성된 영상 작품인데, 우리의 시선을 단박에 잡아끄는 영상은 정면의 <대홍수_The Deluge>다. 하얀색 건물과 인도를 비추는 시선은, 작가의 다른 작품들처럼 철저하게 고정되어 있다. 사람들은 분주하게 거리를 누비는데, 이내 그들이 무언가에 다급하게 쫓기고 있음이 밝혀진다. 분주함이 극에 달한 어느 시점에 엄청난 대홍수가 건물 전체를 뚫고 나온다. 사람들과 가재도구는 괴력의 수압에 완전히 휩쓸려 무기력하게 내동댕이쳐진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헐리우드 재난 블록버스터에서 지겹게 보아왔다. 이러한 재난 상황의 영화적 문법이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간에 인물을 따라가는 것이다. 한 인물에 관객을 동화시켜 공포감을 주고, 이내 문제해결과 함께 안도감을 선사한다. 그런데 시점이 고정되고 나니 관객 모두가 완벽한 방관자로 전락한다. 숱한 공포와 고통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정적인 미술관에서 이러한 격정을 본다는 것, 그런데 이 격정을 우리가 적극적으로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 이 두 가지 제약과 생경함이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고통에 주목하고 있는가? 주목한 시선은 정녕 나의 것이 맞나? 주목한 것만으로 충분한가? 주목한들 달라질 게 무언가? 이런들 저런들, ‘우리는 날마다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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