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슨 페리의 「미술관에 가면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들을 위한 동시대 미술 안내서」

Grayson Perry, Playing to the Gallery: Helping Contemporary Art in Its Struggle to Be Understood

대중이 ‘예술가’라는 존재를 상기하는 이미지는 우수에 찬 낭만주의적 천재와 구제불능의 괴짜 사이를 오간다. 저자는 후자에 가깝지만, 예술계의 견지에서 절대 비주류는 아니다. 오히려 터너상 수상자라는 가장 명예로운 위치에 앉아 있다. 아리송한 동시대 예술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높일 목적으로 기획된 이 소책자는 괴짜이자 터너상 수상자라는 저자의 이중적 정체성에 힘입어 효과를 발휘한다. 한 마디로 재미있고, 권위도 있다.

저자 그레이슨 페리(Grayson Perry)는 거창한 미술사나 미학 이론을 기반으로 동시대 미술을 정당화해주지 않는다. 철저히 현역 예술가의 시선에서 그동안 숱하게 제기되었던 의문들을 곱씹고 내부고발한다. 미술을 정의하는 관점은 ‘미술제도론’을 따르는데, 그 요지는 ‘어떤 작품이 미술인 이유는 그것이 미술의 맥락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로 요약할 수 있다(미술의 맥락에도 위계가 있는데, 184페이지의 일러스트는 대단히 적절하게 그 위계를 보여준다). 사실 이보다 편리한 정리는 없다. 이 책을 세라 손튼(Sarah Thornton)의 「걸작의 뒷모습」과 함께 연계해 읽으면 동시대 미술계의 흑막과 아이러니에 대하여 더욱 다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워낙 상식적으로 쉽게 이해할만한 이야기만 적혀 있으므로 책 전반에 걸쳐 내가 덧붙일 논평은 없고, 그저 저자가 특유의 유머감각을 발휘하여 남긴 촌철살인을 되새기고자 한다.

“진지함이야말로 예술계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통화다.”

48p

예술계는 물론이거니와 사실 돈 받고 일하는 모든 프로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장 가벼운 직업군처럼 보이는 코미디언조차 성공적인 꽁트 하나를 짜기 위하여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연습하던가? 저자가 이 말을 강조한 이유는 그만큼 많은 사람이 괴짜 예술가들을 보면서 진지함이 없다고 손쉽게 평가절하하기 때문이다. 통상적인 인식과 달리 대부분의 (성공한) 예술가가 엄청나게 진지하게 자신의 작품에 헌신하고 있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정말이다. 한 해에 수백, 수천 명의 졸업생이 미대를 졸업하고, 그중 극소수만이 순수예술로 먹고살 수 있는데, 그러한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똑똑한 젊은이들이 오늘도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고 있다. 진지하지 않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진지함 없이 감히 미술관급 작가가 될 수 있겠는가? 흔히 생각하듯 동시대 미술이 모두 사기라면, 기왕이면 그나마 진지한 사기꾼을 선택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예술, 그것은 진지한 업종이다.”

177p

동어반복이다.

“어쩌면 예술을 통해 가장 많은 것을 얻는 사람은 바로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일 것”

104p

이것도 예술의 진리가 아니라 인생의 진리다. “비평한다는 것은 비평하는 사람에게 유익한 일이다.”라는 테리 바렛(Terry Barrett)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작품을 보여주는 현장에서 진정한 가치가 드러날 것이라고 여기지만, 진짜 가치는 그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 사람의 내면에 이미 생성되었다.

축구 경기를 보는 사람은 결과에 따라 일희일비하지만, 축구 경기를 뛰는 선수는 이미 주급을 지갑에 넣었고, 덤으로 폐활량도 좋아졌다.

“보헤미안이자 좌파로서 예술에 대한 지식을 뽐내는 이들은 도시 생태계에서 여전히 높은 통화가치를 지닌다.”

137p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아이러니다. ‘좌파-보헤미안-예술가’는 동시대 도시문화에 저항하면서 그들만의 독점적 커뮤니티 공간을 찾아 헤맨다. 그들은 비로소 도심 외곽의 무너진 산업 생태계에서 미학적 가치를 찾아 대안공간과 카페를 만들고 새로운 문화생산기지로 재정의한다. 이런 공간은 금세 입소문을 타고 선망의 대상이 되어 대중의 발걸음을 모은다. 그런데 대중의 발걸음은 필연적으로 스타벅스, 이마트, 유니클로, 나이키 상권 담당자의 눈길을 사로잡게 되고, 결과적으로 예술가는 임대료 폭탄을 맞고 장렬하게 퇴출된다.

‘좌파-보헤미안-예술가’가 성장연합이 지배하는 도시 생태계에서 상권 확장의 첨병, 심지어 총알받이로 전락하게 되는 이러한 메카니즘을 우리는 숱하게 보아왔고, 앞으로도 보게 될 것이다. 상업주의는 상업주의에 대한 분노와 저항마저 상업화한다. 우리는 그 구조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131p).

“모든 예술가는 자기에게 먹이를 주는 손을 물어야 한다. … 단, 너무 세게 물진 말고.”

백남준, 141p

모든 예술가가 제도비판적일 이유는 없지만, 우리는 늘 그러한 태도의 예술가가 새롭게 등장하기를 고대한다. 통상 진짜 성공적인 예술가라고 평가받는 이들은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토대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심심치 않게 그 토대의 정점에 서서 왕관을 쓴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올해의 작가상 2019’ 사례를 보자. 이러한 모습은 전혀 이율배반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동시대 미술계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풍경이며, 가끔 미쳐 돌아가는 듯 보이는 이 바닥이 그나마 자정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저자가 인용한 백남준의 말에서 핵심은 너무 세게 물지 말라는 대목인데, 그 완급조절 능력이 애송이와 대가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완급조절 자체를 권력에 굴종한 결과라고 매도할 필요는 없다. 그러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 목소리는 작업실 밖을 빠져나오지도 못했을 터이니.

이 논의에서 진짜 중요한 사실은 예술계의 치열한 ‘자기비판 콘테스트’에 대하여 일반 대중은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점이다. 그러니 콘테스트도 적당히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자위행위로 전락할 것이다.

“젊은 예술가나 디자이너는 자신에게 생기는 모든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173p

이것도 인생의 진리다. 이 말은 “가만히 앉아서 ‘걸작을 만들 때까지는 아무것도 노출하지 않을 거야’라는 식의 자세는 절대 안됩니다.”라던 발데사리(John Baldessari)의 일갈을 떠오르게 한다. 작품을 제작한 사람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것을 세상에 내놓고, 다양한 평가를 받고, 논쟁을 일으키고, 소통하고, 수정하고, 나아가 더 나은 작품으로 발전시킬 책임이 있다. 공개가 아닌, 제작의 맥락에서도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알려면 그리기 시작해야 한다.”는 피카소(Pablo Ruiz Picasso)의 조언에 경청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작고 우연한 기회가 더 큰 성장의 발판으로 이어지는 일은 얼마나 흔한가. 최종적 완성작들만을 위한 전당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으로 이끄는 과정에는 온 세계가 총체적으로 관여하며, 그 관여란 좀체 종결되는 일이 없다.

내가 속한 학계에서도 자신의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기 주저하는 연구자들을 자주 본다. 그들은 자신의 연구결과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기를 바란다. 검색된 목록의 상단에 노출되지 않기 위하여 은밀한 전략들을 구사한다. 엄정한 검증의 잣대를 피하려 더 깊이 숨어든다. 대부분의 연구가 공적 자금의 직간접적인 은혜로 완성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잠행은 부도덕하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연구, 그 어떠한 논쟁도 야기하지 않는 연구는 차라리 시작조차 하지 않는 편이 나으며, 그 부도덕한 첫걸음은 하나의 숭고한 기회를 잠재적으로 강탈하는 행위라 평가할 수 있다.

예술가든 연구자든, 최종적 완성이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으리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무대에 올리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기 위하여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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